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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박노해와 백무산이 등장하여 이른바 노동시라는 장르를 새로 열게 되었던 시대였다. 더이상 시가 지식인들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이들을 비롯해 노동 현장에서 일하던 경험들이 다양한 문학 작품과 생활 수기 형태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러한 작품들이 문학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작품들의 '문학성'을 논하며 갑론을박하던 이들도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대학 동기 중에 출판사에 취직한 친구가, 자신이 일하던 출판사에서 낸 시집을 한 권 선물했다. 그것이 바로 김신용의 <버려진 사람들>이라는 시집이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책도 고려원에서 나온 초판(1988년)이다. 그 이후 여러 출판사로 옮겨 시집을 찍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초판의 권두에 적힌 시인의 자서는 다음과 같다.
나는 모든 버려진 것들을 사랑해야 했다. 바라보면 언제나 막막했던 시멘트의 벌판, 서로의 체온으로 천막삼아 추위를 이겨야 했던 날들......
그 황량한 삶 속에서 모듬 버려진 것들을 사랑해야 했던 나의 사랑법.
그것은 내 생존 방법이었으며 내 시의 명제이자 출발점이기도 했다.(시집의 '자서' 중)
아마도 시인은 소위 말하는 '노숙자'처럼 떠돌며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의 시에는 떠돌며 마주친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고, 그가 마주친 사람들은 당시에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작품을 통해서, 자신을 비롯한 떠도는 이들의 삶의 실상을 낱낱히 드러내고 있다. 당연히 그의 작품에 담겨진 시어들은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들은 엄연히 당시 우리 사회의 일부를 이루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나 역시 그의 시를 읽으면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분명 그의 시들에 담긴 내용과 정신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막노동으로 생계를 연명하던 이들에게 비가 오는 날은 말 그대로 공치는 날이었다.
비의
바늘을 닦는다. 녹슬지 않게......
암울한 구름 덮힌 이 공치는 날
빗물 스미는 방에 속절없이 갇혀
세상 무너지는 빗소리에 흐르고 있다 보면
구름장 더욱 낮게 고여오는 가슴속
비의
바늘, 못이 되어 박혀와도
입김 호호 불어 아픈 마음으로 닦는다.
삶의 터를
진흙탕으로 만드는 저 빗물이
갈증으로 갈라 해진 흙의 입술에
풀잎의
미음 한 술로 적셔지고, 아무도 몰래
땡볕에 몸 비틀던 뿌리에 젖어
꽃 한 송이 떠올려 주는 저 비의
바늘,
보이지 않는다고 잊지 않게......
잃어버리지 않게......
('비오는 날' 전문)
아마도 날품을 팔며 살아가던 시인에게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자, '비의 / 바늘, 못이 되어 박혀'오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시인의 심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를 포함해서 이 시집에 담긴 작품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때로는 매혈로 살아가야만 했던 경험 등이 얽혀 진솔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 이후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시인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 어디선가는 30여년 전 시인의 모습처럼 살아가는 이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출판사로 옮겨 시집이 출간되었던 것을 보면 여전히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가 있다는 의미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이 시집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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