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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로 이해하는 서양 현대 철학'.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왜 이런 부제를 달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덕질'이란 '덕후질'의 준말로, 흔히 덕후란 특정 분야에 빠져 자신의 열정과 흥미를 그것에 발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처음에는 일본어 ‘오타쿠’의 한자어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보편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덕후’는 본인이 직접 선택한 분야이기에 당연히 그 관심의 밀도와 투자하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전문가 이상으로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갖추게 되기도 한다. 특정 가수의 팬클럽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최근 내 주변에도 한 트로트 가수의 팬클럽 활동에 열을 올리는 지인들이 있는데 이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다양한 분야에서 '덕질'을 했으며, 그러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현대 서양 철학자들이 제시한 다양한 개념을 그에 연관시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는 '덕질'과 '철학'의 주요 관심사를 연결시켜 논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오히려 철학 개념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단언한다. 전체 3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목차에서, 1부는 '덕후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철학자들과 그들이 제시한 개념들을 덕후의 세계로 연결시켜 설명한다.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서 '기의'와 '기표'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별명을 붙여주는 것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예컨대 프로야구 경기에서 시구를 해서 유명한 에이핑크의 가수 윤보미에게 팬들이 붙여준 '시구여신'이나 '뽐가너' 혹은 '먹보미' 등의 별명은 그녀의 다채로운 매력에 새로운 라벨을 붙여준 것이라 해석한다.
이처럼 사물이 원래 가지고 있던 의미(기의)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동일한 사물에 다른 이름(기표)이 붙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들에게 통용되는 한 그 사물을 지시하는 의미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문과를 전공했다면 언어학개론에서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에 대해서 복잡하게 설명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려운 외래어를 외우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덕질'의 관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게 새로운 별명을 부여하는 팬의 입장에서 이를 보다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비언어적 기호를 뜻하는 '아이콘'이나, 집단으로서의 팬을 뜻하는 '새우젓'이라는 용어를 통해 레비나스의 '초월' 개념에 적용되고 있다. 나아가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는 '실존주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덕후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굿즈'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이해하도록 하고 있으며, 동방신기의 노래 가사를 통해서 '정반합'에 이르는 과정을 논하는 변증법에 적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덕후'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어, 철학 개념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욕망의 세계'라는 제목의 2부와 '이미지의 세계'라는 제목의 3부에서도 이러한 설명방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적어도 그동안 어렵게 생각했던 개념들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철학자들이 제기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철학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일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철학의 개념을 안다고 해서 삶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철학의 본질에 쉽게 다가설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철학자 혹은 유파마다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동일한 현상이 전혀 달리 서술되기도 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철학자들이 제기한 개념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철학에서 다루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쉽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이 철학자들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다양한 철학 개념들에 대해서 '덕질'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저자의 방식은 매우 유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다양한 철학 개념들로 인해서 생긴다고 할 때, 저자의 설명 방식은 그것에 조금은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만든다고 파악된다. (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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