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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미약화上美若花
꽃의 이름은 아름다움이다
얼굴 따라 이름은 달라도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붉으면 붉은 대로
푸르면 푸른 대로
꽃이라는 이름에는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누가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도
꽃은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꽃이다
#2. 풍년
말 풍년
셈 풍년
천지가 온통
풍년의 풍년이더니,
머얼건 계절에
장마까지 풍년이더니,
멋쩍은 나무들이
덩달아 무성하더니,
버섯이 제 세상인 양
꾸역꾸역 꽃피우더니,
어쩌다가 부는 바람도
태풍으로만 불더니,
제풀에 배부른 참새가
억지로라도 점잖더니
갈대가
퍼렇게 분노처럼 살아서
서걱서걱 서걱서걱
마른기침을 한다.
#3. 이발
머리가 산발이 되어도
죽어라고 이발하길 싫어하는
녀석을 보면
목이 달아나도
머리털 하나 못 깎겠다던
면암勉菴의 말이
비스듬히 보인다
효도를 볼모로
한사코 이발을 거부했던
증자曾子는
지혜로운 사람인가
그렇다면
아예 머리를 감는 것조차
거부하는 아들 녀석은
효자 중의 효자가 되는 셈이다
(1989)
#4. 도심 속 진달래
도심 공원에 옮겨 심은 진달래
서울 간 시골 아낙처럼
잔뜩 겁먹고
벙어리가 되어 있다.
산에서는 그래도
참나무 소나무와 뜻이 통했는데
밋밋한 포플러와는
저만큼 서먹서먹 목이 타나보다.
한 때는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애태우던
자존심도 지녔었거니
소월素月이 보듬던
사랑도 품었었거니
어쩌다가
모진 광풍에
죄 없는 이방인이 되어
생경한 도심 속 회색의 아픔을
묵묵히 저렇게
침묵으로 항변하고 있다.
(1986)
# 5. 까마귀
아침 출근길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까마귀 한 쌍을 만났다.
무엇이 검고 흰 줄을 모르는 세상
겉 검은 게 죄 되어
숨죽이고 까치 밖을 날던 그 때가
차라리 속 편했다고 저리 말이 없는지
아니면 피해 산 몇 해 동안 아예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기로 작정을 한 셈인지
가까이 가도 무서워할 줄을 모른다.
죄 없는 땅만 쪼고 있다.
까악까악 세상을 웃던 그 목청 어디 두고
풀잎 같은 신음소리 하나 보이지 않는다.
흑진주 같이 윤기 나는 머리만 있다.
오늘밤 뉴스가 기다려진다.
(1996)
#6. 마흔 고개
내 나이 벌써 마흔 하나
이 고개만 넘어서면 혹惑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갈수록 귀가 커지고 눈이 밝아진다.
함께 사는 아내의 말도 겉돌던 귀에
멀리 미국美國에 사는 이상구李相玖박사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머리 위 파란 하늘만 보이던 눈에
먼 산마루 흐르는 흰구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이렇게 밝아지는 눈․귀만큼
속까지 밝아지면 얼마나 좋을까?
(1989)
#7. 과학을 하늘로 믿건만
어딘가에선 350미리가 넘는 호우가 쏟아져 철길까지 다 잠겼다는데 여긴 천 년 물흐르던 강바닥이 한길이 되어간다. 자고 나면 모른 척 높아만 가는 하늘 그 흔한 태풍마저 저만큼 비껴가더니 뜬금없이 마른하늘 아래 철길마저 불붙어 세상이고 인심이고 제 정신이 아니다.
비 올 확률 70% 약속 지켜 천지가 다 젖고 있는 오늘도 여기만은 섬처럼 동그마니 속이 타는 마음을 속 편한 사람들은 그게 다 하늘 노하게 한 죄 값이라고 한다. 과학을 하늘로 믿건만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우길 수만 없는 현실이 39℃의 무더위보다 무덥다.
#8. 소나기
메마른 땅에 내리는 소나기
보는 것만도 시원하다.
분盆에 심은 케일 늘어진 잎이
놀란 듯 생기가 돌고
무더위에 헉헉이던 사람
먼지를 뒤집어 쓴 도시가
일순 부활하여
잃었던 말을 찾아 나서고 있다.
껌벅껌벅 졸던 금오산도
푸시시 깨어나
성큼상큼 새 얼굴로
다가서고.
#9. 붓꽃
산 같이 큰 나무도
빛 따라 가지가 휘어지고 바람 따라 잎이 지는데
메마른 땅 풀줄기로 꼿꼿하게 하늘 향한 곧은 줄기
어쩌면 그리도 붓을 닮았나.
꺾이고 짓밟히면 풀이 되는 이치를 알기에
비바람 눈서리에 발이 시려도
꿋꿋이 다져가는 매운 마음
어쩌면 그리도 붓을 닮았나.
서슬 푸른 얼굴에 유연한 자태까지
어쩌면 그리도 붓을 닮았나.
#10. 이유 있는 불만
오랜만에 서울에 갔다가 전철을 탔다. 빈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데 느닷없이 자리에 앉아 있던 50대의 중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앉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마냥 반갑지가 않았다.
환승역에서 전철을 바꿔 타고 서서 오는데 자리에 앉아 있는 중학생들이 서 있는 나를 보고 눈을 돌렸다. 어른을 몰라주는 무례함에 눈을 감았다.
#11. 모개와 모과 2
과원果園에 달린 모과가 하도 탐스러워
어렵게 몇 알 얻어 왔더니만
보기와는 달리 향내가 없다
추석 때 고향집 텃밭에서 주워 온
먹티 흉한 모개는
얼굴은 못 생겼어도 향내는 어릴 적 그 맛이었는데
알고 보니 모양 좋고 빛나는 건 개량종이란다.
아무리 개량종이 좋다지만
모과에서 향내 안 나면 그게 어디 모관가.
찌들고 못 생긴 그대로 모개가 모과다
아무리 다 변해 가도
모과는 모개라야지
#12. 나는
세상이 너무 밝아서
밍밍한 산문 같은 시대
詩세계에 무심하던 P선생이
내게 詩集을 보내왔다.
하고 많은 책 중에
하필 시집을 선물한 마음이 궁금해서
읽고 또 읽었다.
필경 무슨 사연이 있을 듯한데
몇 구비를 오가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럴수록 그 깊이가
한없이 알고 싶은 나
혹 세상이 다 아는
천치가 아닐까
몇 십억 몇 백 억을 가지고도
사생결단 부동산에
목을 매는 세상에
그 좋다는 강남에
땅 한 평 없이 살면서도
그 사람들을 웃고 있는 나
혹 세상이 모르는
천재가 아닐까
#13. 요즘 세상
고희古稀 고개를 넘어서니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많다.
보이지 않는 걸 보겠다고
기를 쓰고 건너온 75년
다 보이는 것보다
덜 보이는 게 신비한데
가려져 있는 부분이 있어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빈틈이 있어야
정이 가는데
바닥까지 다 보이면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데
직선보다 곡선이 아름다운데
참말보다 허담이 웃음을 자아내는데
모자란 듯 어눌한 구석에
웃음이 숨어 있는데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데
죽어라고 밝은 곳만 쫒는
요즘 사람들
#14. 우박
천년 노송이 베어지자
그 끝에 걸려있던 하늘이 떠나가고
바람 따라 뜬금없이
먹구름이 몰려와서는
무식한 우박을 내려
죄 없는 농민 가슴을
듬성듬성 뚫어놓고
모른 척 슬그머니
해 속으로 숨어 버렸다..
15. 有口無言
귀성객으로 교통 정체가 이어진다는 뉴스가 딴 나라 이야기 같다. 민족 대이동이라는 한가위 아침 홀로 집 지키는 여든 노모 의사 아들에 5남매 자식이 있으면 뭣 하는가. 명절이면 만사 제쳐두고 천릿길 멀다 않고 만원버스에 매달려 달려오던 고향 길인데 팔십 리 길이 어쩌다 먼 길이 되어 버렸는지. 서울에서 공부하는 제 자식 보러 갈 땐 천 리 길을 달려가던 며느리가 명절만 되면 허리 병이 도지는 이유를 노모는 알고 싶지 않다. 정신과 전문의인 아들도 못 고치는 병, 당당하던 아들까지 꼼짝 못하게 하는 병을 모른 체하고 싶다.
#16. 한가위 단상
태풍에 쫓겨 간 한가위
텅 빈 도시 한가운데 서서
軍에 간 아들을 생각한다.
지난해 오늘 함께 보던 하늘
파아란 물길 위로 부서지던 햇살
소리 없이 웃던 얼굴을 그려 본다.
송편이며 과일이 가득한 식탁
별로 즐기던 햇대추와 파전에
자구만 눈이 간다.
시원한 맛이 좋다며 탐하던 배[梨]가
올해 따라 유난히 풍성한데
아들 식탁엔 배가 올랐을까?
오늘 밤엔 아들이 있는 兵營의 하늘에도
배 닮은 둥근 보름달이 뜨겠지.
달은 아직도 하늘에 있으니.
(1998. 10. 5)
#17. 불혹의 마루에서
아들놈은 대학생 되어 서울로 가고
딸애는 고등학생 되어 기숙사로 가고
텅 빈 방 둘이 누워 서로 보며 웃는다.
식탁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나누던 얘기
학교 가는 시간마다 한바탕씩 치르던 홍역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이 너무 그립다.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무언들 못 할까.
불혹不惑의 고개 다 넘도록
내 키 큰 줄만 알았더니
아득한 무인고도에 내가 있네.
하늘이 높고 깊은 줄 이제야 내 알겠네.
(1996. 11)
19 시골학교 교사
어쩌다가 도회지 학교 한 번 못 가 보고
구석구석 시골학교만 전전하다 보니
거룩하다는 교직도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는지
어쩌다가 찾아 온 학부형 왈
제 자식 공부 못하는 게 교사 탓이란다
그러기에 농사꾼도 눈 밝고 목심 센 사람들은
도회지로 떠나가는 세상에
발목 잡혀 못 떠나고 농사나 짓는 사람들은
무엇이냐고 했더니
그건 또 세상 탓이란다
세상도 사람도 탓할 수 없는 시골학교 교사는
이래저래 속없이 목만 길어 간다
(1990)
# 20. 일 직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텅 빈 학교를 지키고 앉아
하루 종일 파리를 잡는다.
바람도 숨죽이는 팽팽한 적요
낙엽 한 잎 지는 소리에도 귀가 간다.
오늘 같은 날은 참새소리도 음악이다.
바람 속에 부시럭 부시럭 인기척 있어
나가 보면
아이들 뛰놀던 자리
마른 낙엽들이 뒹굴고 있다.
시끌벅적한 아이들 소리 배어 있는 교실
카키색 커튼이
세상을 저만큼 가리고 있다.
(1997)
# 21. 자식 자랑
국민학교 산수경시대회장엘 갔더니
시험치는 학생보다
선생님, 부모님 가슴이 더 탄다.
따가운 햇살 아래
앉지도 못하는 가슴이 모여
제자 자랑, 자식 자랑에 침이 마른다.
그게 그런 게 아니라며
교정의 소나무가 한사코 고개를 젓는데도
눈 밝은 사람들이 그걸 못 본다.
(1989. 5. 23)
22. 가을 한 때
세상이 다투어 깨춤을 추는 가을
운동장 울타리 따라
드문드문 늘어선 호두나무 몇 그루
탐스럽게 여물어가는 호두나무 열매
틈만 나면 나무에 매달려 몰래 열매를 따는 아이들
보다 못한 교장선생님 왈
“그 녀석들 사람 아니라 날다람쥐 같다.” 했더니
오늘은
아이들 오르던 자리 참 날다람쥐 오르고 있다.
그걸 보고 아이들
“이제 저 날다람쥐, 다람쥐 아니라 아이들 같다 하시겠네.”
하며 웃는다.
아이들의 기센 웃음소리 뒤로
한 무더기 쓸쓸한 바람이 이명을 일으키며 지나가고
모르는 척 쇠털구름이 산등을 넘고 있다.
구름도 숨이 차는 GNP 1만불의 시대
우리의 가을 무게는 얼마나 될까?
(1995)
# 23. 아들
산수경시대회에서 떨어졌다고
잔뜩 풀이 죽은 아들 녀석과
뭘 모르고 저만 붙었다고
좋아하는 딸애
오늘따라 아들이 딸보다 더 나다워 보인다.
딸의 손을 잡던 손을 빼서
차운 아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하루만이라도 오늘은 아들만의 아버지이고 싶다.
(1989. 6. 1)
24. 한산도閑山島에서
희한한 일이다.
수루戍樓에 오르니
충무공忠武公이 생불生佛로 앉아
다짜고짜 누樓 아래 오죽烏竹을 보라신다.
왜놈은 결국 왜놈인 것을
「아왜나무」로는
한 떨기 바람도 못 막는 것을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신다.
웃으며 발길을 돌리려 하니
그 꼴론 다시 오지 말라신다.
왜군의 피보다 더 더러워진 바닷물
그 물이 맑아지거든
그 때서나 보자신다.
참 희한한 일이다.
(1885. 5. 24)
# 25. 낙동洛東에 오니
낙동에 오니
사람보다도 바람이 먼저 보인다.
지붕에도 담장에도
바람이 묻어 있고
선술집 막걸리에서도
바람 냄새가 나고
아스팔트 곧은길을 달리는
바람소리가 요란하다.
낙동에 오니
강보다도 다리橋가 먼저 보인다.
파란 물결 금모래도
그 그늘에 가리고
인정 싣던 나룻배도
그 바람에 다 밀려가고
모르는 물새 몇 마리
다리 위를 날고 있다.
(1987)
26 단계천丹溪川
기껏 오백년인데
청솔 닮은
뒷골바람은
바닥이 났나 보다.
비 오면
흙탕물 생색내듯 붉고
어인 일인지
들리는 새소리가
바람처럼 가볍다.
느닷없이 밀려온
집오리 몇 마리
주섬주섬
봉황의 족보를 훔치고 있는데도
제 그림자 주체할 길 없는
비봉산飛鳳山는
아낙의 방망이 소리에
채신없이
흔들리고 있다.
(1980)
# 27. 호미곶 虎尾串에서
호미등虎尾嶝 긴 해안선 따라
무시로 몰려와서 부서지는 파도
해조에 깎인 바위 서리서리
여름내 벗어 놓고 간
추억의 더께가
이끼보다 파랗다.
파고 높던 무서운 밤
걱정으로 끓던 몸살
시린 사연 딛고
저리 밝은 빛으로
하늘을 껴안고 앉아
둥실둥실 부표를 띄우고 있는 게
막내딸의 눈망울마냥 정겹다.
연푸른 이내 속
살을 에는 겨울 바다
바람도 추위도 잊고
생선회와 소주에 취해
기우는 마음 추스르며
시詩를 앓는 가슴들이 뜨겁다.
(동해안 문학기행에서)
# 28. 강남터미널에서
산 같은 집
짐승 같은 자동차
기계 같은 사람
회색빛 하늘 아래
검은 아스팔트
그 사이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무
그 나무를 닮은
나
아슴푸레
관악산 넘어가는
흥부네 집 제비의
신음 소리 듣는다
(1987)
# 29 안압지雁鴨池
경주 박물관 가는 길에
수상한 바람에 이끌려
안압지를 찾았더니
1330년 전 그때 그 자리
백성들이 땀으로 못(池)을 모으고 석축을 쌓아
동궁으로 사용했다는 임해전臨海殿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역사를 세일하고 있었다.
오리가 노닐던 못엔
금붕어가 가득하고
왕자가 거닐던 길엔
속절없이 빨라져가는 세상의 속도에 맞춰
폐타이어 조각으로 포장을 해 두어
책으로 읽던 신라가 저만큼 더 아득해 보였다.
금빛 박수갈채 머물던 자리
미니아튀르 같은 시간이
저만큼 늘어지고 있었다.
( 2005. 4)
# 30. 진료실 앞에서
3년 전 진료 받기 위해 처음
병원에 갔을 때 무슨 진단이 나올지
그리도 불안했는데
복약 진료를 받으러 가는
걸음은 이리 가볍다.
진료실 앞에서
초조히 기다리는 사람들 보니
초진 앞두고
불안했던 마음 떠올라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다.
돈이, 권력이, 명예가
다 무엇인가
한없이 배포가 커도
생명 앞에서는 겸손해지고 작아지는 게
사람이다.
# 31. 줄어드는 메모
습관처럼 메모를 해 오고 있는데
해를 더해갈수록 메모의 양이 줄어든다.
700자에서 600, 500, 400자가 되었다가
이젠 300자를 채우기도 쉽지 않다.
그만큼 기억할 일들이 줄어든 때문일까
메모 양이 줄어드는 만큼
내 꿈이, 남아 있는 날이 줄어드는 것 같아
저만큼 밖을 내다보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길을 가린 아득한 안개
믿고 있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다가
마지막 메모엔
몇 글자나 남게 될까
순백의 시간 어느 언저리에
머물고 있을 그 메모가
두렵다.
ㅡㅡㅡㅡㅡ
습관처럼 메모를 해 오고 있는
내 꿈이, 남아 있는 날이 줄어드는 것 같아
저만큼 밖을 내다보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길을 가린 아득한 안개
믿고 있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다가
마지막 메모엔
몇 글자나 남게 될까
순백의 시간 어느 언저리에
머물고 있을 그 메모가
두렵다.
# 32. 별리別離
어머니 가시고
밖에 나서니
이 넓은 거리에
수없이 오고 가는
차와 사람들.
하늘과 땅.
모르는 체
잎을 흔드는 바람
한 가지 말고는
다 그대로다
33. 소
사람도 소처럼 일을 해야 하는
이 농번기에
기계에
일을 빼앗기고
배부르게 먹고
밤낮
살이나쪄야 하는 소는
허리가 휘도록 일만 하던
그 때가 그리워 눈을 감지 못한다.
# 34. 빛이 되거라
-선산중고 교지 발간에 부쳐
뒷골 솔바람에
뿌리 내려 자라온 이야기가
버들개지 하얀 눈처럼
다수로이 피었구나
단계천 여울 속 깊이
뜨겁게 흐르던 사랑이
이 추운 계절에
송이송이 영글었구나
솜털처럼 포근한 기쁨이
저리도록 아픈 슬픔이
때 묻지 않은 목소리로
흥근히도 고였구나
물은 강으로 흘러 강을 이루고
흙은 산으로 솟아 산을 이루고
나무는 나무로
돌은 돌로
꽃은 꽃으로 피어
저마다 높고 큰 산이 되거라
세월처럼 긴 강이 되거라
태양처럼 눈부신 빛이 되거라
# 35. 바르게 말할 용기가 없으면
친구와 동업하다 부도를 낸 M군
못 마시는 술을 취하게 마시고
캄캄한 하늘을 향해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사는 게 뭔지
힘이 없으면 50년 지기知己가 외면하고
계산만 맞으면 적도 순간에 친구가 되는 세상
사람들아, 이젠 그 똑똑한 입으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을 말하지 말라.
세상을 모르는 어린 딸이
도덕과 의리를 물으면
그건 도덕 교과서에나 있다고 하라.
바르게 말할 용기가 없으면
차라리 모른다고 하라.
36. 안개 속에서
안개 속에서 뭔가 꿈틀거리기에
시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더니
녹슨 못 하나가 쥐어졌다.
그 놈을 꺼내어 찬찬히 살펴보니
한 번도 호명되지 않은
어머니 잔잔한 주름과
할아버지 기침소리가 묻어 있다.
# 37. 가을 하늘
거울보다 맑은 가을
티 하나 없는 하늘
말없이 그저 바라고만 싶다.
말을 하면 흠이 될지도 몰라
이 무념 이 행복.
38. 문수사文殊寺에서
이름 듣고 찾은 청량산 문수사
청량한 바람은 저만큼 멀고
무너진 계곡 언저리
더운 물 몇 방울 명맥을 잇고 있다.
극락교極樂橋 초입
절보다 커 보이는 영지버섯 재배 포막
즐비한 벌통
쏟아지는 노래가 보들레르의 시만큼이나 상징적이다.
돌보다 무딘 가파른 시멘트길 밟고 오르니
목 빠진 선풍기가 가뭇가뭇 졸고
신식 법당 앞뜰 한 켠
고려 석탑의 분신 하나
나그네의 옷깃을 잡는다.
(1985)
# 39. 도토리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때 아닌 도토리 줍기 열풍이 도를 넘고 있다. 산이란 산 참나무란 참나무마다 도토리 줍는 사람들로 벅적인다. 불가해한 부화뇌동이다. 도토리는 다람쥐에겐 생사가 달린 절대 식량인데 온 가족이 몰려와 놀이삼아 줍는 것도 모자라, 여물어 저절로 떨어질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몽둥이로 생나무 둥치를 마구 두드려대고 있다. 이 무참한 만행을 그저 속수무책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다람쥐 생각으로 마음이 아프다. 사람이라는 이름 하나로 다람쥐의 영역을 이리 짓밟아도 되는 걸까. 정말 하느님이 있기나 한 걸까. 하늘이 다 바로 보이질 않는다. (06년 10월)
# 40. 허전한 가정의 달
오늘은 어린이날 휴일
하루해가 길다.
집집마다 아이들로 떠들썩한데
내 집은 절간 같이 적막하다.
어린이날은 눈감고 귀 막고 보내지만
사흘 남은 어버이날은
어디가 숨죽이고 있어야 할지.
차라리 아는 이 없는 먼 곳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올 요량이었는데
느닷없는 코로나 광풍으로 허둥대다 보니
그 한 틈을 찾지 못했다.
깃발 요란한 가정의 달
내세울 깃발 하나 없는 늙은이에겐
이래저래 힘겨운 터널이다
답답한 이 터널
언제나 벗어나
남처럼 가볍게
5월 하늘 바라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