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롬 8 : 3-5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 영, 육신, 영. 계속 반복해서 나오죠?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
우리는 영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자들이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과연 그 영과 육신 이런 것들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육신을 그토록 기뻐하지 않으시는가 보겠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역사와 인생을 통해서 일관성 있게 일률적으로 추구하는 것은요 자기역사 만들기, 가지역사 쓰기입니다.
내 역사 만들기, 내 역사 쓰기예요.
이 세상에 태어난 아담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이 역사와 인간들에게 뭔가를 새겨두고 가고 싶어 해요.
나를 연필로 삼아 이 역사와 인간들에게 나를 새기고 싶어 해요. 이게 자기역사 새기기, 자기역사 쓰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이다. 라는 이 말이 역사 보편에 격언이 되어 있어요.
어느 민족, 어느 때, 어느 장소에 가도 이것은 아주 보편적 격언이에요. 아주 가치 있는 금언입니다.
정말 이름을 남기고 가는 그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하늘에서도 그렇게 취급을 해줄까요?
그런 연유에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힘을 총동원해서 나 살아있음. 나 가치 있음. 나 존재하고 있음.
이것을 증명하는 데에 올인을 합니다. 나증명하기. 그런데 그 방법도 참 여러 가지에요.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고요, 대단한 명예를 얻어서 나라는 존재를 이 역사에 새기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훌륭한 인격을 자랑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고요.
열심히 인격을 연마하고 도야하여 야, 나는 이렇게 살았어. 여기까지 성숙했었단다, 이렇게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고 성숙한 인간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역사가 추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 목적은 단 하나로 수렴이 됩니다.
나 가치 있음. 나 살아있는 자임, 나 스스로 살겠음. 이리로 전부 수렴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교육의 커리큘럼이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효율적으로 살 수 있는가, 가치 있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멋진 이름으로 살아가다가괜찮은 이름 하나 남기고 떠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어요. 그게 인간들이 추구하는 자기 구원의 내용에요.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구원하려고 삽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살아요.
사는 기술. 살아남기 위한 훈련, 끝까지 자기 힘으로 한번 살아보기.
요거를 배우고 실천하다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산 자가되어서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이에요.
모든 인간은 그 죽음을 두려워하거든요.
그게 너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애써서
그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을 조금 상쇄시켜 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모든인간이 다.
자기가 이 인생 속에서 여러 가지 스펙을 좀 쌓아서 그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그 스펙을 들이밀면서
그 두려움을 조금 해소해보고자 하는 거죠. 열심 있는 종교생활, 도에 넘치는 선행과 구제. 청빈과 청렴.
인류에 대한 공헌과 기여, 훌륭한 학식 등등. 모든 인간이 그 죽음 너머의 어떤 삶에 대해서 음으로 양으로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자신들이 이 시간과 역사 속에서 쌓아놓은 그 스펙들이
그 죽음 너머의 삶 속에서 자신들을 유지시켜주고 지탱하는 데에 쓰이는 자가발전기의 배터리의 충전양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거예요.
이걸 열심히 내가 이 땅에서 스펙을 쌓아서 내 자가발전기의 충전기에 이렇게 쌓아야 훌륭한 인격, 착한 일, 멋진 종교행위
이런 걸 내 스펙으로 쌓아서 내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거죠.
그래서 그 너머의 삶을 준비한다니까요.
그래서 자타가 공인하는 훌륭한 스펙을 쌓은 이들은 자가발전기 배터리 충전이 잘 되어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거고,
누가 봐도 허접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은 거의 방전이 되어 있는 배터리를 들고 서 있는 초라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거예요.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 이런 말이 거기서 나온 거죠? 대연각 호텔에서 팬티만 입고 탈출한 그 여자를 매일 예를 들면서
그런 구원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끄러운 구원. 정말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요. 여기서 난 자랑스러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보세요. 모든 인간은.
내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저를 구원하셨어요?라는? 라는 이 부끄러운 구원받는다니까요..
그럼 예수님 옆에서 벌거벗겨 죽은 그 강도는 진짜 천국 저 변두리에서 개털 모자 쓰고 살고 있겠네요?
뭐 한 게 있어야지? 평생 강도질만 했으니까.. 그러는 겁니까?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도 그러한 인간의 자가발전 충전이 신앙의 내용인 양 가르치고 배워요.
그게 차등 상급론이에요. 그런 건 없어요. 만약에 천국이 그런 곳이라면 저는 안 갑니다.
천국에서도 우리의 육이 행한, 내가 행한, 내가 내놓은 업적과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열매들에 의해서 나의 가치가 매겨지고
그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삶이 차등 있게 주어진다면 거긴 곧 지옥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도 심지어 십자가마저도 자기 스펙 쌓기의 도구로 이용을 해요.
훌륭하고 열심 있는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이리저리 그 십자가, 믿음을 휘둘러 댄다니까요.
거기에서 충분한 자기만족도 얻어내고 너희는 그것밖에 안 되냐? 나는 이 정도 했다.
사십일 금식 3회 실시하고 일 년에 다섯 번씩 단기 선교 가고 집 팔아서 헌금했다, 나는. 교회 열세 개 개척했다. 이러고.
그렇게 해서 자기만족도 얻어내고 그 자기만족에 부응하는 하나님과 세간의 평가도 은근히 기대하죠.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복음은,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우리를 이용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자가발전 충전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그 십자가와 예수, 복음을
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소품으로 사용하시는 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서에 나오죠? 내가 내 영광을, 내 독사, 이걸 드러내기 위해 창조한 그들을 오게 하라! 그런다니까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도록 지어졌어요. 심지어 저 절의 스님, 달마대사, 석가모니까지도.
그 말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계시하는 삶을 살게 되는 모든 인간은 반드시
나 하나님 아님, 나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는 소품임 이걸 깨닫는 그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는 그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계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나 살아있는 자임, 나 선악과 먹고 하나님처럼 된 자임,
그러니까 나는 내 자존심 챙겨야 됨.. 요걸 증명하는 데에 모든 노력과 열심을 다 쏟아버리면
그 속에서 드러나는 건 하나님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영, 말씀, 진리가 떠나버린 죽은 흙이 생산해 내는 흙의 소산밖에 안 나타나요.
그건 타종교인들, 그 진리, 그복음, 그 영, 그 성령 없는 다른 이들, 타종교인들, 혹은 무신론자들, 세상 사람들도 해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열매들이라니까요. 그게 우리의 가치관으로 우리의 세계관으로 선하게 보이던 착하게 보이던 그 영이 없이도, 그 진리가 없이도 해낼 수 있는 그런 건 전부 땅이 내놓는 소산이에요. 나쁘다는 거 아닙니다. 그 영을 가지고 하는 거와 그 영이 없이 그냥 흉내 내는 것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거예요. 그건 하나님 흉내라니까요. 그러한 죽은 흙들이 내놓는 것을 하나님이 뭐라 그랬어요? 저주받은 흙아 네가 내놓는 것은 전부 뭐다? 가시와 엉겅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진리의 영, 그 성령이 없이 인간들이 내놓는 모든 것,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내놓는 모든 것은 가시와 엉겅퀴에요.
선지서에 보면 하나님의 법을 떠난 이스라엘, 율법주의에 묶여버린 이스라엘, 그 안에 뭐가 가득 찼다 그래요? 질려와 형극이.
그게 가시와 엉겅퀴에요.. 그들이 열심히 뭔가 열매를 만들어 내는데 열심히 자기들의 업적을, 스펙을 쌓고 있는데
그게 다 하나님이 보기엔 질려와 형극일 뿐이에요.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질려와 가시엉겅퀴에는 아무 관심 없어요. 그걸 내어놓으면서 이렇게 우리는 살아있어요, 라고 주장하는 그들이
하나님이 죽었다, 하는그들이에요. 하나님은 그들을 죽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 인생 속에서 맞아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먼저 기쁘게 해드립니까?
하나님이 날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쁨이 되셨다라는 걸 알고 그것을 알아드리는 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죠, 라고 자기부정의 자리로 내려가는 이 다나 토스의 죽음을 죽은 그 자를 살았다,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반드시 그들의 인생과 역사 속에서 죽여내십니다.
그게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날마다의 죽음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날마다 살아나요.
날마다 살려고 새벽부터 일하고 날마다 살려고 새벽부터 공부하고 날마다 살려고 하루를 다 써버린다니까요. 내가 살기 위해, 내 배터리 충전하기 위해, 그 죽음 앞에서 조금 덜 두려워하기 위해. 그렇게 날마다 살아서 진짜 죽어요. 그걸 ‘네크로스’의 죽음이라 그래요.
성경을 보면 말씀의 완성이라는 의미의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세상에게도 쓰일 때가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완성되면 그걸 그렇게 써 놓고 말씀의 완성이라고 써 놓고 ‘무트’,‘죽음’ 이라고 읽는다고 했죠? 히브리사람들은. ‘멤’과 ‘타우’의 합성어에요.
말씀의 완성, 진리가 완성되었다, 라고 써 놓고 글자는 그렇게 써 놓고 죽음이라고 읽어요. 무트 타무트. 이렇게.
그런데 그 다나토스, 무트의 죽음을 세상에게도 적용한다고요. 왜?
하나님의 그 말씀에 세상은 끝까지 하나님의 진리에 반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두 번째 사망으로 끝날 것이다, 그럼 완성이에요. 이제. 두 번째 다나토스는 완성. 더 이상 이제 다나토스가 없어요.
그래서 천국에는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없다, 그러는 거예요. 다나토스로 내려갈 때 우리가 아프니까.
그게 두 번째 사망으로 끝이 나는 이 세상이란 말에요.
그런데 성도는 다나토스, 진리로완성이 되어 그렇죠. 저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야 비로소 존재가 되는 피조물이죠. 라고 그 다나토스,
올바른 다나토스로 완성이 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잘 할수 있어요. 한번 맡겨보세요. 내가.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그 수준까지 한 번 성장하고 성숙해 볼게요. 라고 시퍼렇게 살아서 비 진리로 완성되는 이가 있어요.
그래서 진리로 완성이 되면 다나토스로 죽어 생명으로 즉시 그 다나토스가 환원이 되지만
비 진리로 완성이 되어죽으면 그게 네크로스, 완전한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문선명 씨가 죽으면서 그랬다잖아요? 다 이루었다. 그 다 이루고 네크로스로가는 거예요. 비 진리로 완성되는 거라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 아담들의 본성은 내 죽음을 기뻐하지 않아요. 기꺼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능적으로 남의 죽음을 통하여, 남을 죽여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도록 되어 있어요. 그거는 세상의 본성이에요.
잘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살기 힘드시죠?
그런데 우리 주위에 나랑은 상대도 안 되는 어려움을, 고통을 당하는 어떤 이가 나타났어요.
그때에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그의 고통에 내가 참여하여 그와 같이 그 아픔을 겪습니까?
아니면 먼저 일어나는 반응이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라고 먼저 나를 위로합니까? 상대의 죽음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니까요. 이거는 인생의 본능인 거예요. 나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유명한 연예인들, 재벌기업 회장들이 막 뛰어내려 죽고 목매달아 죽고 그러면 일차적으로 드는 생각이
저렇게 돈이 많고 저렇게 부자이고 저렇게 유명한대도 에이구, 저렇게 죽었네? 그래도 나는 살아 있잖아. 라고
남의 죽음을 갖고 내가 위로받는다니까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저주받은 아담들의 본성이라니까요.
절대 죽지 않으려고 해요. 자기는.말로만 죽음, 죽음 하지요. 남이 죽는 만큼, 그만큼 내가 살아나요.
자, 그런 인간의 본능, 운명적으로 타고 나는 그런 본성, 이걸 거스르며 그를 다나토스로 죽여 가는 길이 호락호락하겠어요??
쉽겠습니까? 신앙생활이 그거라니까요.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해버리세요.
그래야 내 새끼 살릴 수 있거든요.
자기가 생명이라고 우기는 걸 요만큼이라도 갖고 오면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완전하게 그 생명을 부을 수가 없어요.
고 조금 때문에. 그게 다 비워져야 돼요. 그게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다 죽는다는 거예요.
하나님 내 것 없어요. 당신 것으로 다 부어주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하나님을 죽여 온 세상이 위로를 얻었죠?
온 세상이 합의하여 하나님을 죽이고 지들이 위로를 얻었다니까요. 그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서
그 세상을 기고만장하게 살려 버렸어요. 그리고는 그들이 다 죽은 자다, 라고 선언을 해버리셨다니까요. 그거예요.
하나님은 그 장자 안에 우리 장자들을 넣어서 이 세상에 보내세요. 그리고는 세상에 뜯어 먹어라! 얘들 죽일 테니까
너희들이 얘들의 죽음을 보고 위로 얻으라는 거예요. 힘 얻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살찌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는 항상죽는 자로 나타나고 그들은 항상 우리를 뜯어 먹는 자로 나타나요.
그래서 심지어 시편 73편에 보면 그들은 죽을 때도 때깔이 좋아요. 얼마나 먹었는지 눈알이 튀어나왔다고 그래요. 살이 쪄가지고.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이 세상에서 세상의 먹이로 살게 되어 있어요.
구차하게 비리비리하게 무슨 뭐 직장도 별로 이상한 거, 그런 거 갖게 되고 가난하게 살고 아프고 이런 말하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은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배터리를 검사하면서 너 세상에서 너희 배터리 얼마나 충전해갖고 왔니?
그만큼 상 준다. 요렇게 심판하는 분이 아니란 말에요. 오히려, 네 배터리 방전됐어? 아직 남았네?그럼 넌 탈락,
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이 돼야 하늘의 에너지로 그걸 채울 수 있어. 그게 생명이고 그게 영생이야.
그렇게 오히려 우리의 배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시간 속에서 방전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기다리시지
네가 얼마만큼 충전해 갖고 왔느냐를 보시고 상을 주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하늘을 사는 에너지가 못 된다니까요. 다 땅의 것, 아래의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우리 자신의 배터리에 이런저런 스펙을 쌓아서 충전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내 자신의 자가발전 에너지를 빼앗기는 시간이 되는 거예요. 오히려. 그래서 힘이 드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야 이 저질 배터리가 방전이 되고 하늘의 진짜 에너지로 그게 충전이 될 거 아니에요? 완전하게.
그게영생이라니까요. 그게 생명이라니까요.
그렇게 내가 준비한 내 에너지, 이 땅에 스펙으로 충전이 된 그 에너지, 그 배터리로 존재하는 것을 성경이 육이라 그러고,
이게 비워지고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배터리가 다시 충전되어 그걸로 존재하는 그걸 영이라 그래요. 영, 육 그러니까 뭐 영은 꼬마 귀신, 꼬마 유령 캐스퍼같이 혼령이고 육은 이거 고깃덩어리,,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그거 아니에요.
성경은 그렇게 안 나눠요. 그건 헬라의 이원론이 나누어 놓은 거지.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 영과 육신이 계속 반복되어 대조가 되어 나와요.
거기서 쓰인 육신이라는 단어가 사륵스이고 거기서 쓰인 영이라는 단어가 푸뉴마예요. 이거는 성경에서 아주 많이 나오는 대조예요. 영과 육, 사륵스와 푸뉴마. 그런데 개역성경은 그 육신, 사륵스라는 단어와 몸, 소마라는 단어와 푸쉬케, 이 단어를 막 혼용해서
육, 육신, 몸 이렇게 번역을 해 놔서 우리가 헛갈려요. 그런데 헬라어는 정확히 구분이 되어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
우리 교인들 중에 미리 예습을 하시는 분이 게시판 같은 데에다가 이거를 예습을 하여 질문을 미리 해 놓으셨는데
그렇게 질문 안 해도 다 해드려요. 걱정하지 마세요.
성경에서 영이라고 번역이 되는 푸뉴마라는 단어는 관사가 없이 쓰이면 심령, 마음 이렇게 번역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라고 번역이 된 그 어구는 사실, 호 푸뉴마 거든요.
푸뉴마에 관사가 붙으면 마음 심령이 아니라 성령, 혹은 진리, 말씀이라고 이렇게 번역을 해요.
그러니까 에이스 호 푸뉴마는, 내 마음 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그것에 갈급한 자는, 이라는 뜻이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라는 게. 그런 차이가 있단 말에요. 그 푸뉴마, 그 심령, 그 마음. 그건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그 마음을 가진. 그 푸뉴마를 가진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 라고 성경이 불러요.
그래서 말라기에 보면 엘리야가 와서, 그거는 예수님도 엘리야로 왔고 세례요한도 엘리야로 왔습니다. 와서 뭐 한다 그래요?
여러분도 엘리야로 오는 거예요. 뭐예요?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리는 거, 연합시키는 거.
아버지의 마음, 그 아가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진리로 전해주고
이 진리로 아버지를 대하게 되면 그게 내 마음이야, 라고아버지가 그 마음을 받아준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말라기 4장 마지막 절이란 말에요.
그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 그런 그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마음을 ‘카르디아’, 심장이라 그래요.
성경에는 이 오장 육부의 심장을 묘사하는 단어는 한 단어도 없어요. 다 그 마음이에요. 그걸 ‘카르디아’, 심장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진짜 마음을 가진 자. 마음이 있는 자라고 하는 거예요.
반면에 그 마음이 없는 자, 그 하나님의 그 하나, 그 아가페가 없는 자는 성경이 두 마음을 가진 자라고 이야기하고
악한 마음을 가진 자라고도 이야기하고 그들에게는 마음이 없다, 라고도 이야기해요.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이야. 짐승이라고도 해요. 마음이 없으면 짐승이에요.
우리는 마음이 뭔지 몰라요? 그죠? 뭐예요? 마음이? 어디 있어요? 어디? 그런데 다 마음이 있대.
그래서 성경이 그러는 거예요. 그래, 그거? 그건 두 마음이야. 그런데 그건 악한 마음이고, 없는 거야.
사실은 마음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야. 그 사랑, 그 진리야.
그거 가져야 심장이 있는 거야. 살아있는 자야.
그가. 카르디아를 가진 자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짐승들과 인간들이 뭐 그렇게 대단히 다릅니까? 심지어 돌고래하고는 아이큐 차이도 별로 안 나요.나요.
짐승들이 굴 파고 사는 거와 사람들이 아파트 짓고 사는 거와 뭐가 달라요?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제비가 하나하나 모아서 2층, 3층짜리 집 짓는 거하고 꿀벌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수 없이 많은 다세대주택 짓는 거와
우리의 건축과 뭐가 다르냐고요?
먹이를 날로 먹는 하이에나와 거기다가 양념 조금 쳐서 쪄먹고 구워 먹는 우리와 뭐가 달라요? 목적은 똑같다니까요.
짐승과 인간의 공통된 유일한 목적지가 뭐예요? 나 왕 되기에요. 나 왕 되기.
그래서 그 마음이 없으면 그를 짐승이라고 해요.
거기서 이성 없는 짐승이 뭐냐 하면 ‘홀 로고스’ 에요. 진리. 그거 없으면 너희,, 짐승이야.
하나님은 그걸 살았다고 안 그래요. 산 자라고 안 그래요.
그렇게 인간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인 푸뉴마가없으면, 진리가 없으면 그냥 죽은 거예요. 짐승이에요.
그 푸뉴마를 마음으로 가졌을 때 그를, ‘호 푸뉴마’, 진리, 말씀. 영. 이렇게 불러요.
그래서 계시록에 가면 우리의 이름을 말씀이라 그래요.
그들이 흰옷을 입고 고통 속에서 고난 속에서 올라오는데 그들의 이름이 말씀이다, 이러는 거예요. 왜?
말씀의 완성으로 우리가 존재가 되는 거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으로 존재가 되는 거기 때문에 우리의 이름을 말씀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 푸뉴마, 그 진리, 그 마음을 못 가진 그 존재를 사륵스, 육체, 육신이라고 하는 거예요..이 고깃덩어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그걸 가지면 호 푸뉴마, 진리,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보고 진리라고 하잖아요? 예수님도 당신보고 진리라고 그러셨잖아요?
그 사륵스라는 단어도 원래 육체라는 단어가 아니라 영이라는 단어에요. 히브리 사람들은 그걸 영이라는 단어로 써요.
그런데 어떤 영이냐 하면 진리가 되지 못한, 비 진리의 그 악한 영. 악하다고 하니까 뭐 더럽고 추악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담아 그릇에 주시잖아요? 레마를 담아 로고스를 주시는 것처럼. 진리를 담아,
하나님을 담아 성전을 주셨는데, 율법을 주셨는데
그걸 그냥 그대로 표피적으로 만 이해하여 내가 가지면 그게 바로 악한 거예요. 고걸 사륵스라고 한다니까요. 고걸 비 진리라 그래요. 진리로 이해되지 못한 거, 깨달아지지 않은 거. 이게 육체에요. 이게 비 진리란 말입니다.
그러면 몸은 뭐예요? 성경에 나오는 몸. ‘소마’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개념이에요.
그 몸은 은혜에게 점령당하면 은혜의 몸이 되고요, 죄에게 점령당하면 죄의 몸이 돼요.
그리스도에게 점령당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그러니까몸, 이걸 막 육신, 육체 이렇게 또 번역을 해 놓아 갖고 이것도 헛갈리는데
몸, ‘소마’는 그 자체로는 그냥 그릇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의해 얘의 가치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몸, 소마와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가 ‘소조’예요. 구원.
이 몸은 어떤 거에 의해 구원이 되느냐에 의해 가치가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소마라고 해요.
골로새서 1장 18절 보세요.
골 1 : 18-
18.그는 ( 그리스도죠?) 몸인 (소마예요. 이게)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ㅡ
보세요, 우리가 근본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근본이라니까요.
그런데 전부 우리는 우리가 근본이고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 모두 다 내가 이용해 먹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
아니에요. 그게 근본이란 말에요.그런데 여기 보시면 소마라는 단어를 쓰고 그리스도의 소마라 그래요. ‘크리스토소스 소마‘,
그러니까 이 소마는 좋은 거란 말에요. 여기서는. 몸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이 소마가 사륵스, 비 진리로 채워지면 그 몸은 그냥 사륵스, 육체의 몸, 죄의 몸이 돼요. 남아 있어요.
그런데 이 몸이 푸뉴마로 채워지면, 은혜로 채워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푸뉴마에 의해 흡수가 돼버려요.이 몸이 이리로 함몰된다 그래요.
그래 갖고 더 이상 그 몸은 멸해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요.
그러면 정죄의 대상이 되는 몸이 없어지는 건 반드시 푸뉴마가 그 몸을 채워야 되는 거네요?
진리가, 그 마음이 그걸 채워야 되네요?
그래서 진리가 된 몸은 하나님 앞에서 멸해져서 없어지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되는 거고, 그 상태를 용서라 그래요.
롬 6 : 5-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로 살 때, 죄에게 점령당한 죄의 몸으로 살게 돼요. 그게 육신, 사륵스에요.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발생된 그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점령하게 되면
그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동시에 영으로 함몰되어 들어가 버린단 말에요. 그걸 바울이 죄의 몸이 멸해지는 것이라고 하고
그러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그 육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죄의 종으로서의 그 몸이 삭제되기 때문에
거기에서 용서가 일어난다라고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 보시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고 해요. 거기에 쓰인 단어가 사륵스인데
율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켜 사륵스라고 부르죠? 육체라고 그래요. 비 진리가 그래요.
왜? 당연하죠. 율법으로 오셨으니까.
그런데 세상이 그 율법으로 오신 주님을 통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은 그냥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육체로 오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사륵스로 오셨다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담고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진리로 봐주지를 못해요. 그럴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육체로 오셨다 그래요.
그런데 3절을 보면 율법이 연약하여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기 위해 그분을 육체로 보내셨다 그러거든요.
그러면 율법이 연약해서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율법이 하려고 했던 거는 뭐예요? 그럼? 로마서 3장하고 5장에서 배웠잖아요.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그러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 때 율법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성문화 된 건 없었지만 하나님이 내리신 말씀이 있었다니까요. 보세요.
하나님이 너, 세 번째 제물 준비해. 셋째 것으로 준비해.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덜렁 삼년 된 걸 갖고 오더니 반으로 ‘바탈’, 쫙 쪼개버렸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카라트’ 라는 이 선을 두고 넘어가 버리셨죠? 이건 안 된다, 라는 거예요.
보세요. 인간은 생래적으로 에피뚜미아라는 이 두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 나에게 뭐 가져와 봐. 내가 기뻐할만한 제물 가져와 봐, 그러면 예수를 가져가야 되는데
그러면은 우리는 내가 선하다, 악하다, 라고 생각한 어떤 것을 하나를 정한 다음에 그걸 하나님에게 쫙 쪼개서 갖다가 바친단 말에요. 이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거 안 된다고 성경 전반에 걸쳐서 말씀하시는 거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에 그게 희생제사요, 이스라엘의 율법지킴이었잖아요. 하나님이 그걸 죄라 그랬단 말이에요. 율법 시대에는.
그런데 모세가 오기 전에 율법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게 죈데 야단을 안 치신다니까요. 죄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로마서5장 12절에도 나오잖아요. ‘야,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다. 당연하죠.
율법이 뭐예요? 우리의 그 에피뚜미아, 두 마음이 뭔지를 글로 써서 설명해준 게 율법이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있기 전에는 너희 양심, 그 마음이 율법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거를, 그게 뭔지. 그게 왜 죄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써 준게 율법이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죠?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걸 죄로 여기지 않는대요.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야단치지 않은 건 하나님은 그가 그렇게 한 것을 야단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란 말에요.
모든 인간이 그걸 그냥 당연한 거, 아니, 바울이 그러잖아요.
내가 탐심이, 율법이 탐심이 죄라고 얘기 안 했으면 내가 그 탐심이 죄인 줄 진짜 모를 뻔했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들이 선악 구조로 나누어서 이건 선한 거야, 이건 악한 거야, 하면서 선한 거는 하고, 악한 거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하는 이거.이게 하나님 앞에 잘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열심히 한단 말이에요
고게 인간들의 두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죄야! 하고 가르쳐 줘야 돼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걸 대표로 보여준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이렇게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그게 죄다, 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성문화된 율법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율법을 주셨어요.
그리고는 내가 아브라함에게 야단치지 않은 거, 그거 있지? 그거 봐. 율법으로 주었잖아 이제. 그게 사실은 죄였어. 라고 가르쳐 준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게 나쁜 거야. 그러니까 죽여 버릴 거야, 가 아니라,
사실 나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제물을 둘로 짝 쪼개서 그 에피뚜미아의 두 마음을 내 앞에서 내놓았을 때도
나는 그걸 나무라기보다는 아브라함을 차근차근 가르쳐서 결국 모리아 산에 세워 버렸잖아?
마찬가지야. 너희들에게도 내가 이 율법으로 그 죄가, 너희마음. 그게 뭔지를 차근차근 가르쳐서
모리아 산에 세워서 너희를 다나 토스로 죽일 거야. 이거를 알면 그 죄가 우리에게 죄냐고요? 더이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죄를 안 물었잖아요.
그런데 율법이 온 이후에는 그걸 죄라고 하면서 이거 하면 안 돼! 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 율법에 의해서 그렇게 우리가 죄인임을 폭로 당하는데
하나님은 이 죄인임을 폭로당하는 나를 나무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말씀, 율법을 주신 거라는 말이에요..
그걸 깨달았을 때, 내가 죄와 무슨 상관이 있냐? 이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하고 그걸 용서라고 한다니까요.
우리의 죄의 몸이 멸해 진단 말에요. 육신은 멸해진단 말예요. 그렇게요.
그런 방법으로. 내가 진리가 되면.
하나님이 그렇게 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그 자유, 그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주시고 이 세상을 주시고 성전을 주셨어요.
그랬더니 인간이 어떻게 했어요? 그거 갖고? 뭐 해요? 자기 자가발전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었다니까요.
열심히 제사 지내고 열심히 율법 지키면서, 네 배터리 얼마나 충전되었어?
20%? 나 30%야. 너는? 어, 나 40%. 이거 경쟁하고 있었잖아요. 율법주의.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은 그거를 알라고 준 게 아니라
네 그 마음. 생래적으로 네가 갖고 나온 그거. 선악구조 속에서의 그 율법주의 그게 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그거 줬더니
그걸로 인간들의 배터리를 방전시키려고 줬는데 인간들이 그걸로 자기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었다니까요.
하나님이 인정하지도 않는 에너지로.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어요. 뭐로? 율법으로요.
얘네들이 율법과 성전으로 줬더니 못 알아먹네? 왜? 말 못하는 성전이니까.
그러면 말하는 율법, 말하는 성전. 네가 내려가서 그 역할을 다시 하라고..
그래서 율법이 연약하여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기 위해
아들을 육체로, 사륵스, 율법으로 보내셨다라고 하는 거예요.
본문 3절이. 그러면 그 아들은 와서 또 뭘 해야 돼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걸 드러내서 배터리를 방전시켜야 된단 말이에요. 율법으로 오시는 거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이 갖고 있는, 자기들이 충전해 놓은 그 율법이라는 배터리, 그 에너지 갖고
하나님을 죽여 버렸어요.
자기들이 역사 내내 구축해 놓고 충전해 놓은 그 스펙, 그 에너지로, 그 율법 지킴으로 그 착한 삶으로 하나님을 죽여 버렸다니까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제 확실하게 그들의 율법지킴, 유대주의가, 율법주의가, 바리새인이, 제사장이 예수를 죽였잖아요.
하나님을 죽였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인간들의 그 율법지킴은 자가발전기 충전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살해 행위였다는 게 폭로가 된 거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율법의 일을 역할을 잘 하신 거네요? 그죠?
그런데 보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러 오신 거지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산으로 올라가 입을 열어 가라사대 율법은 이런 거야. 라고 하면서
십계명 뒤의 다섯 계명을 말로 설명해주시죠?
율법이 내려와서 이게 사실은 이런 거야, 라고 진리로 해설까지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도 그들이 그걸 못 알아보고, 이 생명을 못 알아보고 죽여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 세상의 한계라는 거예요. 이것이. 절대 인간들은 그걸 못 알아보게 되어있다니까요.
그래서 율법이 그러했던 거처럼, 성전이 그러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셔서, 성전으로 오셔서
그들을 완전한 죄인으로 확증을 하고 죽어버려요. 너희들의 수준이야. 그것이.
그것이 너희들의 정체야.너희들의 실체야. 너희들은 절대 생명을 포착할 수도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계시해줘야지. 네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걸 뭐라 그래요?
신의 죽음이라 그래요.
왜? 신은 피조물에게 포착되지 않을 때, 신이라는 이름을 가져요.
그런데 이 신이 피조물에게 포착되기로 결정하고 내려와서 자기를 계시하면
이거를 신의 죽음이라 그러고 이걸 십자가로 그려준 거뿐이에요.
너무 신파적으로 내 죄를 위해서 그분이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서 죽으셨대. 이렇게만 알고 계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내 밖의 십자가고 내 밖의 예수라니까요.
그래서 수시로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게. 믿어졌다가, 믿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내 죽음이 아니면 그건 나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아무 상관.
요한복음 15장 22절 보세요.
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보세요. 율법이 와서 이게 죄야, 라고얘기 안 했으면 죄는? 로마서 5장에서 그러잖아요.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요.
그러면 어느 때는 죄로 여기지 않는데 어느 때는 죄가 되고 이거는 형평상 안 맞잖아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있어서는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게 되면 그 죄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았을 땐 그걸 그대로 그냥 받아들여 버리면 그게 죄가 되어 죽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율법으로 왔어. 그래서 말을 했다. 말을 했으니까.
율법이 지금 말로,진리로 전해졌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
그러면 사륵스로 이걸 취급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죽여 버린 거거든요.
그러면? 그게 죄라는 거예요.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죄가 없었을 텐데 진리가, 율법이 와서 말했잖아.
그런데 너희들이 못 알아먹었지? 그게 죄야! 그게 죄야.
그럼 다 죽어야겠네요?
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살해범으로 선고된 거예요.
그런데 그중에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찾아가시는 거예요. 진리의 말씀으로 찾아가시는 거예요.
진리를 진리로 못 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마저도 그냥 사륵스, 육체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그 육체에 죄를 정하여 죽여 버린다니까요. 세상이. 그런데 그건 하나님의 의도였단 말입니다.
온 세상을 죄인으로 합당하게 선고해 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절대로 세상에게 포착당하지 않아요.
세상은 절대로 자기 자신들의 지혜나 지식으로 하나님을, 그 하늘을, 묵시 세계를 포착할 수가 없어요.
보세요.예수님이 생명이라고 했어요. 자기를. 요한복음 1장에서 그 안에만 생명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럼 생명나무 실과는 거기에 있었네요?
생명나무 실과가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사람들 코앞에서 왔다 갔다 했단 말입니다. 아무도 그거에 손 안 댔다니까요.
그러니까 창세기에서 그 생명나무 실과는 아담이 따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아니, 생명나무 실과가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사람들 코앞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그걸 먹기는커녕 치워버렸다니까요, 인간들이.
그러니까 인간들은 절대로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쟁취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생명도 아니고 엉뚱한 이 세상의 그 잡것들을 갖고 내가 내 생명을 지금 조금씩 쌓아가고 있고 구원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오늘날 교회란 말입니다.진짜 생명이 왔는데도 그걸 못 알아보고 그걸 치워버린 인간들이 엉뚱한 거, 그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이 세상 것들 몇 개를 가지고서 이게 생명이지, 이거 갖고 하나님이 날 칭찬해주시겠지, 이걸로 상 주시겠지. 이러고 있는 거예요.
지금.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생명이요, 진짜 진리인 그 생명이라도 그게 내 밖에 있으면 그것이 나를 구원 못해요.
아니, 이스라엘 전체를 예수님이 이리저리 여행 다니면서 그 생명이 왔다 갔다 눈앞에서 보여줬는데 아무도 못 알아봤다니까요.
그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거예요. 그 안으로 생명이 되어 들어오시려고..
그렇게 이 기식하는 존재, 기식한다라는 건 들 숨, 날 숨으로 존재하는 존재라는 거죠.
밖의 것이 내게 들어와서 그게 내 생명이 되면 그걸 푸쉬케라 그래요. 그걸 개역성경이 그냥 육신, 육체, 목숨 이렇게 막 번역을 해버려 갖고 이것도 굉장히 헛갈리는데 푸쉬케는 히브리어 네페쉬랑 똑같은 단어거든요.
우리가 존재하죠? 존재하는데 밖에 들어오는 들숨을 끊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그건 죽죠?
밖에서 들어오는 양식을 끊어버리면 어떻게 돼요? 굶어 죽지 뭐. 밖에서 들어오는 물 끊어버리면 어떻게 되죠?? 죽죠?
그럼 나의 생명의 근원은 밖에 있네요? 요걸 푸쉬케라 그래요.
그런데 이 푸쉬케가 그 진리를 내 안에 푸뉴마로, 마음으로 갖게 되면??
그게 내 안에 생명이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생명이 있으면 밖에서 아무리 끊어도 안 죽잖아요? 그걸 영생이라고 한다니까요.
자,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럼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되는가,
예레미야 31장 31절보세요.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남편은 내 밖의 존재입니다. 이 남편이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그 첫 남편이에요. 율법의 남편, 들어와서 자칼, 네케바가 되어야죠?
네케바 안에 자칼이란 진리가 딱 들어와서 연합이 되면 그걸 창세기가 ‘사람’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죠? 남편 정도가 아니란 말에요.)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언약, 그 단어가 스타우로스에요. 기둥이라 그랬어요. 십자가. 기둥을, 십자가를 세울 건데)
내가 나의 법을ㅡ
(이 법은 로고스. 말씀, 성경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경을 밖에 두지 않고, 밖에 두면 항상 이게 내가 보고 교훈을 얻어야 될 것이고 내가 지켜야 할 것이고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이렇게만 보인단 말에요.
그 말씀을 , 법을 밖에 두지 않고 안으로 끌로 들어와 마음에 새겨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럼 마음에 새겨 놓고 이젠 성경을 안 보고 도 이 마음에서 시키는 일을 해야 된다는 말인가? 이게 아니라, 이 말씀을 그게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 수많은 레위 기와 신명기, 출애굽기, 그 율법의 세목들, 그리고 신약의 그 많은 하라, 하지 마라의 명령들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아, 그 아가페, 그 사랑? 하나로 알게 되면 그가 바로 산 자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마음에 그 법을 새긴 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더 이상 내 밖의 법에 영향을 안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법에 대해 죽은 자라니까요.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ㅡ
(지금까지는? 너희들이 내 하나님이었잖아. 아니, 내가 법을 너희들 마음속에 이제 새겨서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들은 내 백성의 자리로 내려가야 돼. 이러는 거예요.)
이게 역사와 인생들의 존재 목적이라니까요.
내가 너희 하나님이지 왜 너희들이 내 하나님이 되려고 해? 이런 거예요. 그거 아니? 알면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죽는 거예요.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법을 새기고 이 땅에 내려 온몸이 있었잖아요? 말씀육신.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렇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육은 반드시 십자가 언약에 매달아서 삭제시켜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 성령, 진리만 남기겠다는 거죠. 그게 우리의 인생이라니까요.
고린도후서 3장 3절 보세요.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그리스도의 편지, 편지는 뭐죠? 그리스도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자죠?
너희는 그리스도가 전하고자 하는 그 말을 하는 자들인데 그 말을 인생으로 삼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의 편지다, 그런데)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먹으로 쓴 것이 뭐예요? 성경이에요. 먹으로 쓴 거, 성경. 그거는 그냥 너희들이 갖고 있는 그 성경, 그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진짜 전해야 될 거, 편지로 전해야 될 것은)
-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신 영으로,진리로 한 것이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돌비에 쓴 것이 아니라? 돌비는 먼저 생각나는 게 뭐죠?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께서 계명을 써주신 그 돌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구약에서는 예수님을 돌이라고 그러죠? 뜨인 돌, 산 돌,모퉁이 돌, 흰 돌.
그래서 돌이 떡이 되어 우리에게 온 거예요. 먹이로. 그리고 그걸 진리라고 예수님이 설명해 주시잖아요?
그런데 돌비에 새겨버리면 어떻게 되죠? 예수가 그냥 성경에 적힌 그대로 이해되어지면 돌비에 새긴 거예요. 예수라는 분이,
그가 그냥 하신 말을 그래? 그대로 지켜야지. 오리 가자고 하는 이들에게 십 리를 가줘? 그래 그렇게 가 줘야지.
왼편 뺨 때리면 오른편 뺨 대줘? 아이 그래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그 돌비에 새긴, 돌비가, 돌이 한 말, 그걸 껍데기로만 보고 그리고 그 돌이 행한 그 일. 2천 년 전에 나를 위해 그분이 죽으셨대, 라고 내 밖의 어떤 사건으로만 갖고 있을 때 성경이 나에게 돌비에 새건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뭔지를 알아 아, 그거! 그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는. 내 마음에 생명으로 오시는 그 예수, 그 은혜, 그 사랑, 그 능력? 하고 내 마음으로 갖게 되면 이게 심비에 새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밖에 오리 가자고 하는 놈한테 십 리 가주라는 이 법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게 되는 거잖아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거예요. 그걸 심비에 새겼다고 하는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무슨 성경 지식이나 이런 거를 대단히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어요.
그거 줄줄줄 외워서 여러분이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직면했을 때, 말씀을 떠올려서 그래 그때는 요렇게 대처해야지, 요렇게 대처해지, 이거다 쓰레기예요. 성경은 그렇게 읽으라고 우리에게 준 게 아니라니까요.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말씀, 그 설교를 통하여 그렇지, 저 모든 게 다 그거, 그거를 설명하는거지, 라고 여러분이 알고 있으면
아브라함을 아브라엄으로 읽어도 돼요.그렇게 알고 있어도 아무 상관없어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그 성경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단 몇 구절을 통해서도 갖는 사람이 있어요.그때 그를 생명이 있는 자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가 있는 자라고 하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성경을 무슨 성경신학이다, 조직신학이다 해서 이렇게 풀고, 저렇게 풀고, 좋아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줘야 되죠. 그런데 그냥 거기서 머물러 버리면 그것, 그 진리, 그 사랑, 그아가페,
그 하나로 던져주지 못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러분 왜 사람들이 이 신천지나 이단 같은데 왜 그렇게 팍팍 넘어가는지 아세요? 아니, 이 만희가 성령이라는 그런 말이 도대체 말이 돼요? 그런데 수만 명, 수십만 명이 거기에 있어요. 그것도 똑똑한 사람들이요. 추적 60분인가 어디에서 가서 그 피디가 물어보니까 자기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그러대? 아니, 난 그 사람이 맞다, 이렇게 얘기해 주길 바랐어요. 카메라 앞이라고나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는 거라고? 그렇게 자신이 없어요? 이단을 하려면 확실히 해야지. 아,실망했어. 난 정말.
그런데 왜 거기에 넘어가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 공부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성경 여기저기를, 비유 같은 거 푸는 거 보면 아주 기가
막히게 풀어줘요.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 그것도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그들이 와서, 추수꾼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와서 (여기 추수꾼들 있으면 잘 들으세요~~) 와서 그걸 들이미는데 신기한 거예요. 이게. 그런데 목사님이나 지도자들, 뭐 말씀 가르치는 애한테 물어보면 몰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더 훌륭해 보이는 거예요. 저도 만나 봤다니까요. 아주 열심히 풀어요. 그리고 아주 너무너무 착해 사람들이. 전도할 때만. ㅎㅎ
그래서 제가 듣고 그랬어요. 어, 그래그래, 좋아. 그래 그렇게 풀었는데 잘 풀었어.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야? 그게 성경이 뭐를 얘기하려고 그걸 그렇게 써놓은 거야? 라고 하면 거기서 말을 못해요.
그래 잘 풀었어, 아주 구약, 신약 넘나들면서 잘 풀었다. 그런데 그게 뭐야? 그러면 몰라요. 그러니까 신천지들이 오면 다 들어주세요. 그리고는 그래 그러면 말 다 했어?? 네 수준이 거기지? 내가 결론으로 알려 줄게. 그리고 더 가르쳐 주세요. 걔네들은 여기 오면 꼼짝 못한다니까요.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그걸 감당을 못하니까, 그냥 무조건 이단이다, 이단 그러니까, 누가 나 보고도 신천지래. ㅎㅎ
참 기가 막혀서.
그러니 보세요. 이런 이야기를 누가 듣겠느냐고요?
이심전심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다니까요. 그래 저분이 이야기하는 게 지금 그 말이지? 라고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니까요.
그들에게만 얘기하는 거예요. 저는요. 여러분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리는 이렇게 우리를 뚫고 들어와 우리의 마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계시하는 분이지 우리에게 섬김을 받고 칭찬을 받고 어유, 하나님이 저런 분이었어?
하고 그 앞에서 벌벌 떠는 걸 보고 즐거워하려고 우리를 창조한 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를 만든 분 아닙니까?
그런 게 그분한테? 왜 우리 수준으로 자꾸 생각해요? 그래놓고는, 그거 해드리고 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재롱부렸는데
기뻐하실까? 이러고 있다니까요.
하나님은 네가 누구이고 내가 누구인지 알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네 하나님이라는 거만 확실히 인정하고
너는 네 자리로 내려가라는 거라니까요. 거기에서 여러분이 뭘 해 오고 안 해 오고 이런 거는 별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진리를 품어 안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착한 일들 많이 하세요. 왜 안 해요? 아니, 우리도 아프리카에 가서 우물도 파주고 진짜 공정무역 그걸로 조금 비싸지만 그렇게 수입되어 온 거 그런 거 사 먹자고요,, 이왕이면. 그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왜 나빠요? 이게. 하자니까요. 그러나 먼저 해야 할 거 하고 하자는 거예요. 아니 가슴 안 아파요?
그 조그만 아기들이 세상에 발도 안 씻을 물, 그걸로 하루 종일 마시고, 먹고. 아, 그 즉시 안 죽는 게 다행이지.
그런데 그걸 보고 아무 느낌이 없어요?
난 이렇게 지금 빚에 쪼들리는데도 제 통장에서 따박따박 월드비전으로 나가요. 아니, 그거 하는 게 나쁘다고 했어요? 제가?
그거 하는 거, 그걸로 내 할 일 다 했다. 거기서 멈추지 말라는 거지.
아니, 오늘날 기독교의 목적지가 그거 아니에요? 착한 사람 되기. 그게 왜 나빠요? 하자니까. 하는데
생명부터 챙기고요. 생명부터 챙기고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자격 여하에 관계없이 오로지 당신의 언약만 우리 안에 생명을 쑤셔 박으시기 위해
율법과 성전을 주신 거고 그걸로 안 되니까 율법과 성전으로 말하는 예수를 보낸 거예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더 정확히 말하면 그건 하나님의 의도였어요.
너희들은 내가 불순종에 가두어 놨어. 죄에다가 가두어 놨어. 그게 그냥 피조물이야. 그게 피조물의 한계야.
그래 세상 속에서 너희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거기서 빠져나와 봐! 가, 역사라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빠져나왔다고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닌 분이 되는 거예요. 아무도 못 빠져나와야 돼요.
하나님이 가둬놨는데 누가 어떤 방법으로 거기서 빠져나옵니까?? 죄와 불순종에 가둬놨다며 요? 하나님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못 빠져나오면 어떻게 돼요? 그걸 확실히 알았을 때?
살려주세요. 밖에서 나를 꺼내 주셔야죠. 이게 나의 죽음이잖아요. 다나토스의 죽음.
그리고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먼저. 그다음에 할 거 하자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진리를 담고 온 성전, 옛 성전, 율법, 예수 이것이 싸륵스, 육체에 머물고 비 진리로
그냥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로 이해 돼지지가 않았어요. 그건 모형이잖아요.
그러면, 이것이 진짜 그 안에 든 진리로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모형은 반드시 부정되고 깨져야 되죠?
사람들이 그 모형을 진짜로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AD 칠십 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성전은 깨지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 돌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그 모퉁이 돌이, 깨진 거고
그 안에서 율법, 돌비가 깨진 거예요.
그런데 옛 성전, 예수, 율법은 전부 뭘 담고 있었던 거예요? 진리, 하나님.
그러면 그게 깨져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영으로 들어왔다면 성전, 예수, 율법이 깨진 게 곧 뭐다?
하나님의 죽음. 신의 죽음. 이게 십자가로 우리에게 그냥 설명되어진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너무 신파적으로, 그리고 도덕책, 윤리책으로 그렇게 보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해서 나에게 생명이,그 마음이 내 마음에 새겨진 거구나? 그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온 거구나, 라고 알게 되면
그게 또 나의 부정이고 나의 죽음이네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되니까
나는 구원에 이른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그게 내 거가 되지 않으면, 내 밖의 것으로 존재하면 늘 헷갈리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내가 이것 하고, 저것 하고,이것 안 하고, 저것 안 하고 한 그것에 늘 시달리게 되어있어요. 내가. 불안하게. 고통스럽게.
그게 뭐 자유예요? 그러한 우리의 성도의 목표지점은 비진리의 측면에서 볼 때, 말도 안 되는 거죠.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용납이 안 돼요. 기독교의 목표지점이 뭐예요? 믿음을 가진 자들아 이 세상에, 이 사회에, 이 이웃에 기여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자가 되자. 이거 아닙니까? 그건 뭐예요? 야, 복음으로 열심히 살아,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보여 줘. 이거 아닙니까? 목적지가 잘 못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걸 뭐라 그런다고 했어요? 하마르티아, 죄! 교회는 그걸 보여주는 게 아니에요.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니까요.
세상에 기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영향? 어떤 영향?
그래, 제가 목사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훌륭한 삶, 청빈한 삶. 청렴한 삶으로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쳤어요. 아주 잘.
그래서 여러분이 절 따라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아니네? 그랬을 때 여러분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게 제가 그렇게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영원히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고 더욱더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면
OK. 점 점 점 점 여러분도 저를 따라 살 거니까. 그러나 제가 육을 입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될지 알아요?
여러분이 저에게 아주 좋은 호감을 갖고 저를 본받아 살다가 저에게 실망했을 때, 그 영향은 여러분을 죽인다니까요.
그런데 무슨 기독교가 세상에 영향을 미쳐요? 그런 영향 미치고 사는 게 아니에요. 기독교는.
나 하나 구원받고 가는 거예요. 그마만큼 힘든 거라고요.
우리는 믿음, 신앙, 십자가, 말씀을 갖고도 내가 얼마만큼 훌륭하게 살아있는지 볼래? 이걸 증명하려고 해요..
히브리서 2장 14절보세요.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여기서 죽기를 두려워하므로 가 다나토스예요. 이 다나토스는 우리가 부정되는 거라 그랬죠?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이, 그분의 하신 일이 드러나는 게 다나토스라 그랬죠?
그런데 모든 인간이 그렇게 죽는 거를 싫어한다고요. 오히려 내가 시퍼렇게 살아서 나는 이 정도 할 수 있어요, 를 보여주고 싶어 하지. 그렇게 죽기를 싫어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오늘 분문이 이 내용이라니까요.
예수님이 그 육체로 오셔서,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사망으로 우리를 품어 안고 죽어버리시는 거예요.
다나토스로 죽고 다시 삶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인정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라는 게 인정된 거니까.
그게 그 안에서 우리가 죽는 거라니까요.
그래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비진리, 여기에는 마귀를 없이 했다 그러는데 이 말은 악한 말, 거짓 증거 이런 뜻이에요. 거짓말. 뭐 검은색 장삼 입고 갓 쓰고 이렇게 나타나갖고 입술 이렇게 뻘건 것 칠하고 그런 거가 아니라,
마귀가. 악한말. 비진리라는 거예요. 그렇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비진리가 멸해졌다, 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인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그것에서 풀려난다는 거예요. 왜?
우리는 그렇게 죽기가 싫어서 열심히 내 몸을 동원하여 뭔가를 했어야 됐어요.새벽 기도도 나와서 동판에다가 새겨야 되고
뭔가를 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어야 됐는데 그렇게 다나토스로 예수님이 죽어주시고 그것이 나에게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해되고 나니까 에이, 그거 그렇게 해서 구원받고 그렇게 해서 칭찬받는 거 아니네, 라고 비진리라 멸해지자
내가 인생의 종노릇에서 풀려나더라는 거예요. 이게 히브리서 2장 14-15절이에요.
그러니까 기독교가 인본주의에 먹혀 버리면 완전히 거꾸로 가게 돼요. 뒤집어지게 된다니까요.
그런데 대다수가 그리로 가게 돼 있어요. 여러분은 먼저 진리를 들으셔야 돼요. 들으시고 그걸 마음으로 가져야 돼요.
그리고서 그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오는 그 행함. 그걸 하나님께 내어 놓으면 돼요. 그건 진심에서 나오는 거니까.
내 것으로 카운트 안 되는 그 행함이니까 그거는. 그런데 잘 안되죠? 정말 잘 안 돼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어요.
제가 지난주에 상갓집에 갔다 오느라고 여수에 내려갔어요. 오다가 여수에서 꼭 한번 들르고 싶었던 곳이 있었어요. 난 처음 갔거든요. 손양원 목사님 묘지에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아들들하고 같이 묻혀 있잖아요.그래서 아내랑 같이 갔는데 거기 애양원 있죠? 한센병 환자들이 있는 곳이요. 목사님이 거기서 목회하셨단 말에요. 그 한센병 환자들이 고름을 입으로 다 빨아줬대요? 왜? 옛날에는 그런 속설이 있었다네요. 멀쩡한 사람이 그 고름을 입으로 다 빨아버리면 낫는다고. 안 낫죠. 그들의 아버지죠. 스승님. 묘지에 갔는데 한센병 환자들 20명 정도가 휠체어 타고 와 갖고요 추석이 가까웠다고 벌초하고 있어요. 그 때, 제 마음에 딱 드는 생각이 아, 울컥하더라고요. 울컥. 아, 아버지, 선생님, 그러면서 하니까. 자기들에게 큰 사랑과 도움을 줬다는 거죠. 그런데 다른 거 다 떠나서 제 마음에 딱 드는 생각이 ‘내가 죽어도 우리 교인들이 저렇게 ㅎㅎ, 저렇게 아, 당신한테 참 고맙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생명의 진리를 전해줘서,,,’이렇게. 물론 저는 화장을 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떤 개혁주의 목사님이 그러더라고요. 화장하면 하나님이 나중에 부활 시킬 때 못 찾는다고요. 아니 먼지를 존재로 만들었는데 이걸 못 찾겠어요? 화장하세요.
아니 인간들이 그 정도라니까요. 금방, ‘나를 그렇게 그리워해줄까? 벌초하러 올까?’ 나를 스승이라 생각할까? 이러고,,.
이름 남기고 싶어 하는 자와 똑같지 뭐예요. 그게.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죽여가세요.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우리의 행함 같은 거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세요. 그냥 그 마음 그 진리 가졌니? 이거 확인하는 거예요.
그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잖아요?
모든 율법이 가리킨 게 뭐였어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했죠? 그래서 사랑의 이야기를 갖고 예수님이 비유를 드시는 거예요.
율법사가 왔대요. 율법의 대장. 어떻게 해야 영생 얻습니까?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니? 이거, 이거, 이거, 이거.
그거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한 거예요. 가서 해. 율법 지켜! 그런거죠. 그러니까. 다 지켜봐.. 그런 거죠?
그랬더니 지킬게요. 내 이웃이 누굽니까? 지킬게요. 그랬어요. 그래 예수님이 나중에 뭐라 그러느냐 하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누가 거반 죽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라고 말씀하세요.
그건, 너는 거반 죽어 강도 만난 자지. 그 몸으로 누구를 가서 사랑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것으로 영생을 쟁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지. 그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지.
이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뭐예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예요. 하나는 죽도록 일 한 여자,
하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예수님 앞에서 말만 들은 여자. 누가 율법사냐? 물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 내가 비유로 말해줬어. 이제 현실에서 한번 너희들이 골라 봐.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냐?
마르다가 예수님을 먹이려고 섬기려고 했다니까요. 열심히 일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뭘 계속 이야기해주고 있고
걔하고만 이바구하고 있네, 예뻐하는 거예요. 화가 났습니다. 주님, 너무 걔만 예뻐하지 마시고요 제가 하는 이 일을 보십시오.
걔도 저와 같은 일을 하라고 말을 해주세요. 그래요. 자, 오늘날 교회들인 우리에게 하는 얘기에요.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도 안 하면서 무슨 말만 듣겠다고 저러고 있어? 이러고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얘야 얘가 잘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들렸냐? 내가 너한테 밥 달래?
누가 너한테 나 섬겨 달래? 나에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어.. 그런 건 나에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에게 있어 중요한 건, 내가 가져온 이 생명을 누가 받으려고 하느냐?
그 자가 나에게 소중한 자야.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시면서 뭐라고 하는지 한 번 보세요.
누가 복음 10장 41절보세요.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네가 염려한다, 메림나조. 이거 제가 지난주에 설명해드렸죠?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분리가 일어나면
항상 사람에게 근심이 생긴다고 그랬죠? 그래서 염려하지 마라,근심하지 마라. 가 다 이 단어예요.
율법은 항상 이런 근심을 갖고 와요. 네가 많은 일을 한다고 염려 안에 들어있다.)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던지 혹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게 번역을 해놨는데, 이 단어가 직역을 하면 “그러나 너에게는 한 가지가 결핍되어 있구나,”
이런 말이에요. 그 ‘크레이아’, 족하니라가 결핍이란 단어에요.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면서 무얼 막 하고 있는데, 날 섬기겠다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설명이에요. 이게. 많은 일에 염려를 하고 있는데 너는 그 하나가 결핍되어 있다.
많은 일을 하느라고 그 아가페, 그 마음으로 가져야 할 그 하나를 못 갖고 있구나. 그런데 마리아는 그 하나를 가졌다.
그녀는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게 42절이에요. 여러분이 그걸 가졌느냐고요. 아니면 여러 가지 일을 행하느라 그 하나의 ‘크레이아’ 결핍, 그 속에서 살고 계시느냐고요.. 하나님은 그 많은 일에 관심 없어요. 어차피 불태워버릴 거 그렇게 열심히 해서 살기 좋은 세상, 공평한 세상 만들어 놓으면 뭐할 거냐고요? 하지 말자는 거 아니에요. 하자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놓는 거 그것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란 말에요. 그하나를 가지시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주의, 인본주의에 빠진 이 세상은 그 진리를 못 알아먹여야 맞아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 진짜로 사람이 들고 나는 거에 아무 관심이 없어요. 듣다가 어떤 이가 나갔다? 중요한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천만에요.혹자는 그러죠?
아니, 정도 없고 사랑도 없고 쌀쌀맞고, 전화라도 한 통해서 잡지. 아니요.
어차피 이걸 못 들어내면 나랑 진리를 사이에 두고 관계를 맺은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영원 속에서는 그분과 나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관계? 그건 영원 속에서 아무 관계가 아니에요. 부모? 자식? 마찬가지에요. 진리가 안 되면 그냥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나랑. 그래서 굉장히 독선적이고 이기적으로 차갑게 보여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게 맞아요.진리로 나와 소통하는 그이가 내 가족이라니까요. 그래서 들어오는 이들도 별로 안 반가워요. 언제 나갈지 모르니까. 끝까지 남아서 이걸로 나와 소통하는 이가 우리의 가족인 거예요. 그런데 뭐 들고 나는 거에 우리가 그렇게 센시티브 해야 됩니까? 아무 상관없어요.
중요한 일이 아니라 중요한 일 할아버지라도. 교회에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요?? 말씀 가르치고 배우는 이외에? 그런 거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지금 계속 와서 문제지만.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의 시선에 묶여 있어요. 이 죄인들만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서의 각자의 시선들이 있는데 이걸 지금 모아서 총합이 되면 시대정신이라는 세상의 눈이 돼요.
거기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고 평가가 매겨진다니까요. 사람 존재에.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끌려다니고 그리고 신앙의 가치도 거기에 두네요. 천만의 말씀. 우리를 바라보는 제 3의 시선이 있어요. 하나님의 시선이요. 그 시선은 이 땅의 가시와 엉겅퀴를 보지 않아요.
내 거, 내가 보낸 거, 그하늘의 것. 너 그거 가지고 있니? 그걸 찾으세요. 쓰레기 같은 거 갖고 오지 마. 내가 보낸 거. 내가 준 거. 내가 내 아들에 담아서 보낸 거 있잖아. 그거 줘. 그거 찾는 제 3의시선이 있다니까요. 그 시선을 의식하며 그게 내 안에 있는지를 돌아보시란 말이에요. 그거 있으면 된 거예요.
자유! 법으로부터 여러분이 자유롭게 된 거예요. 왜? 그 죄의 몸이 멸해졌으니까. 다시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이 반복하여 이야기하잖아요. 육신의 일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게도 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야.
그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는 그거 갖고 와서 주여, 주여 내가 주의이름으로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거기에서 멈춰버리면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그걸 내 마음 속에 진리로 가져야죠. 그리고 그 하나님이 하신 일에 불현듯 일어나 갑자기 소름 돋으며 박수 칠 수 있는 그 사람이 천국을 사는 거예요. 그거 가지면 되는거라고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도 없는 선물을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코앞에 놓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지 날마다 깨달아 갑니다.
그것 바라보고 그것에 목숨 거는 우리 서머나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