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에서 생긴 일
유태용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늦더위도 한풀 꺾이고 가을이 온 것 같다. 자연의 법칙은 어김이 없다. 봄이 가면 여름 오고 여름 가면 가을 온다는 것. 나무도 마찬가진 것 같다. 여름날 짙은 녹색 잎을 자랑하던 때가 어제인 것 같은데 어느덧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으니 온 산이 울긋불긋하다. 늦가을 풍경을 체험하러 팔공산을 찾았다.
백안 삼거리에서 버스를 내려 왼쪽으로 동화사 길로 접어들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살펴본다. 날씨 탓인지 나뭇잎들이 완전히 단풍이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꽤 긴 오르막길을 올라가면서 지난 일을 회상해 본다. 마산에서 직장 생활할 때 등산클럽 회원들과 같이 팔공산에 왔던 기억이 생각난다.
버스 종점을 뒤로하고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염불암 가는 길이라고 일주문이 나왔다. 지금도 생각하기 싫은 염불암 이름 석 자다. 직장에서 만난 지인이 어느 날 내게 제안했다. 자기가 가입한 등산클럽에 가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특별히 하는 일이 없으면 등산클럽에 가입해 심신을 단련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도 좋다고 하면서 가입하기로 약속했다. 당시에 나는 과도한 음주, 흡연으로 건강이 몹시 안 좋았기 때문에 등산클럽에 가입해 건강을 챙겨 보는 것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향을 떠난 지가 꽤 오래돼서인지 마산에서 대구로 오는 관광버스를 타고 나는 한껏 기분이 들떠 있었다. 오늘의 등산 일정은 동화사 정문에서 시작하여 팔공산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하산하면서 염불암을 거쳐 다시 동화사 정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라고 등산대장이 설명했다. 대구 출신이라도 실제로 팔공산을 올라 본 경험도 없고 더군다나 팔공산 정상에는 가본 적이 없는 나는 은근히 겁이 났다. 내가 과연 이 등산을 할 수 있을지.
처음 얼마 동안은 일행을 따라 열심히 산에 올라갔다. 그러나 차츰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과 등에진 배낭의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을 내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참을 쉬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드는 거 같아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행의 모습은 벌써 아무도 보이지 않고 나 혼자만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일행이 원망스러웠다. 특히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지인이 미웠다. 죽을 힘을 다했다는 말처럼 겨우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많은 사람이 앉아서 쉬며 이야기도 하면서 가지고 온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오기도 나고 해서 나는 점심을 먹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밑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타나길래 계속 따라서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갔는데도 정상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다른 길로 가고 있구나. 주위를 살펴본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고요하고 적막한 길이다. 뒤를 돌아다 보니 팔공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아득했다. 이미 너무 멀리 왔던 것이다. 뒤돌아 가느니 앞으로 가보자.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데 멀리서 사람이 한 명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스님이었다. 스님이 내게 물었다. “처사님 어디로 가시는데 이렇게 사람도 다니지 않는 길을 가십니까?”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길을 잘못 드셨군요. 이 길로 가면 군위로 가는 길입니다. 동화사로 가려면 저와 함께 왔던 길로 되돌아가시지요.” 스님과 함께 걸었다. 그동안 가졌던 불안과 공포감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스님의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내가 말했다. “ 스님, 좀 천천히 걷지요.” 스님이 말했다. “제가 대구에 볼일 보러 가는데 버스 시간이 급해서 그럽니다.”
위급 상황에서 구해준 스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걸었다. 스님이 가는 길이 염불암을 거쳐서 동화사 입구로 하여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코스였다. 스님을 따라 동화사 정문에 오니 등산클럽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등산대장이 나에게 말했다. “왜 이제 내려옵니까?” 질책 투의 말투였다. 지인도 거들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그들과 별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회원들과 멀찌감치 나 혼자 떨어져 앉았다. 등산대장이 “오늘 다들 수고하였습니다.” 하면서 동화사를 떠났다.
뒤에 알고 보니 이 등산클럽은 전문 산악인들이었다. 매주 산을 찾아 등산하는 클럽이었다. 지인에게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내게 처음부터 전문가들 모임이라고 이야기해주지. 팔공산 갔을 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 너무 섭섭했었다.” 내 말을 들은 지인은 그때야 대단히 미안하다고 내게 사과했다. 자기는 내가 등산을 잘 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이일이 있고 난 뒤 나는 아는 동생들과 매주 가까운 산에 오르기로 했다. 산에 오르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팔공산에 같이 갔던 산악 회원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힘든 산을 오를 때는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오른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유능한 등산대장은 산을 잘 타지 못하는 사람을 앞에다 세우고 경험 많은 베테랑들을 그 뒤에 배치하여 초보자가 힘들어할 때는 행동을 같이해 주면서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간다는 것이다. 나의 팔공산 등산은 이 점에서 등산대장과 나 사이에 소통이 부족했다고 본다. 물론 중간에서 나를 소개한 지인도 소통이 부족했다. 이름도 모르는 스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때 그 스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꺄? 스님이 돌아가셨다면 부처님 옆자리에서 극락왕생하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