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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1일
1년을 생활하면서 3월과 4월이 나에게는 심적인 부담이 가장 큰 시기이다. 지난 1,2월이 추워서 따뜻한 봄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3월이 오니 숨이 막히고 불안감이 더 밀려오는 것 같다. 우리나라 통계에서 성인 자살률이 3월과 4월이 가장 높다는 것은 기온이 오르면서 나른해지는 마음과 무관하지 않지만 삶에 대한 부담이나 압박감 등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새벽에 어깨가 아프다는 아내에게 한참 안마를 해주었더니 통증이 사라지고 몸도 가벼워졌다며 흐믓해 하는데 앞으로도 관심을 가져야 되겠다. 아침 일찍 아들은 죽전에 산다는 친구 집에 갔고 딸한테서는 모레 귀국한다고 전화가 왔다. 산악회에서 북한산 가기로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날마다 가는 안산에 오르니 봄의 기운이 완연하여 금방이라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어날 것만 같았다. 집으로 내려와 나는 김칫국 아내는 미역국으로 점심을 하고 3일 만에 어머니를 뵈러 갔다. 1시간을 함께 보내고 고려대 근처에서 과외 안내장 80장을 복사하고 신설동에서 과자와 빵을 먹으며 임대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어제는 문의가 있었는데 오늘은 전화도 없어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고 9시가 지나자 죽전에 갔던 아들이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왔다.
2일 새벽에 눈이 펑펑 내리는 3월의 일요일이다. 아들 친구까지 4명이 식사를 함께 하고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아직 젊은 나이인 49살 인생이 답답하여 한숨을 쉬니 옆에 있던 아내는 호프집이라도 해보라고 응대한다. 미안함도 없지 않았지만 나에게 목표와 희망이 없는 시간이 고통스러웠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이 불안하기도 했다. 10시가 지나 아들은 봉사활동 가고 나는 산에 오르기 위해 홍제역으로 걸어가 풍림아파트 뒷길을 거쳐 북한산에 올랐다. 눈이 계속 쏟아져 앞이 안 보일 정도라 입구에서 망설였지만 향로봉 근처까지 2시간을 걸어 산에 온 사람들 틈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칼바위 정상으로 이동하여 인천 상가 2개를 버리기도 작정하고 억울한 마음에 가져간 청하 1병을 다 마셨다. 원금을 빌려주고 이자를 굴려 상가로 받은 것인데 결과적으로 나의 무지와 욕심이 일을 만든 것이다. 더 신경쓰고 고민할 수 없어 결단을 내리고 집으로 와서 평소 소통이 잘 되는 동생 정환이에게 형의 심정을 하소연하니 건강 조심하고 힘내라며 각별히 당부한다.
3일 오늘은 각 학교가 개학하는 날이라 날마다 늦잠을 자는 아들도 7시에 학교에 간다. 머리가 복잡하여 누워만 있을 수 없어 7시 20분에 안산에 오르니 시원하고 상쾌하여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9시가 거의 되어 아침식사를 하면서 아내는 오늘 저녁에 민경이가 온다고 설레는 표정이 역력하고 대조적으로 나는 담담한 마음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체육관으로 갔다가 와서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나니 아내는 한양아파트에 과외광고를 붙인다며 복사한 용지를 들고 나간다. 하지만 1개월에 1천5백명 이상도 수강생을 배출한 나로서는 처음부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단 1%의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쌀쌀한 오후에 김성우 사무실로 도피하듯 들어가니 반갑게 맞이하고 따뜻한 컵라면을 만들어 준다. 대화도 잘 되고 인정도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어려움보다 상대방의 심정에 공감하는 배려심이 나를 뭉클하게 만든다. 초저녁에 딸을 맞이하러 서둘러 공항으로 나가니 벌써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3개월의 필리핀 생활에 얼굴이 약간 검게 탄 모습이고 키가 더 자란 모습이었다. 밤 9시에 집에 도착하여 오늘 청주에서 오신 장모님과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까지 모두 삼겹살을 먹으며 귀국한 딸을 환영했다.
4일 어제부터 새학년을 출발했는데 다시 겨울이 오는 것처럼 눈이 펑펑 내린다. 작년과 금년을 합하여 오늘이 가장 많은 적설량으로 방학을 다시 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종로와 서대문 일대의 폭설과 달리 잠실이나 천호동 부근은 눈이 전혀 내리지 않았다니 예측이 안 되는 상황이다. 오늘은 평소 건강관리를 잘 하는 이상용씨가 TV에 또 나와 ‘어제와 내일은 생각하지 말고 오늘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라'는 강의를 한다. 점심을 먹고 종로를 거쳐 신설동으로 가는 중에 얼마나 눈이 많이 내리는지 앞이 안 보여 간신히 1층 가게로 들어가 내리는 눈만 보고 서 있었다. 3시경 동대문 등기소에 들어가 노량진에 있는 김성만 소유의 다세대주택 서류를 열람하니 근저당 설정이 내 앞으로 잘 되어 있다. 곧장 경기학원으로 가서 나이가 있는 국어과 선생과 입시에 대하여 현재와 과거를 이야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5일 오늘은 딸이 옆에서 자는 바람에 좁아서 불편했고 새벽에 안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니 오늘도 아들은 식사를 거르고 학교에 간다. 말을 하면 잔소리가 되고 그냥 두면 내가 화가 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안방에 누워 감정을 정리하고 있으니 아내가 청소한다고 들어와 여기도 시끄럽고 불편하여 바로 일어나 체육관으로 갔다. 점심쯤 어머니 병원에 갔는데 영식이가 딸기와 자몽을 많이 사 왔다. 각 1박스씩 차에 싣고 와서 요양원 사람들에게 전하고 어머니는 그런 영식이에게 아는 체를 하고 특별히 반긴다.
6일 아침에 잔뜩 흐리더니 비가 내린다. 오늘은 산이나 체육관에 가는 것도 포기하고 약수동 김성우 사무실로 오전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사업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오후에 경기도 남한산성 근처 성남 법원으로 들어가 차상률 공증서류를 제출하고 학원과 아파트에 압류를 신청했다. 성남을 출발하여 광주 초월에 있는 동광아파트 차상률 집에 갔다가 곤지암 근처에서 맛있다는 곰탕을 먹었고 서울에서 영식이가 기다리는 방배동으로 들어가니 또 고기를 사 준다. 방배동은 영식이 집 주변이라 여러차례 오지만 그 중에서 전주집 등은 내가 자주 이용하는 단골 음식점이고 또한 거기에는 연예인들의 싸인과 나의 싸인이 동시에 걸려 있어 갈 때마다 호기스런 장소다.
7일 잠을 푹자고 새벽에 일어났는데 아내가 모르는 사람의 꿈을 꾸었다며 횡설수설 한다. 자신이 꿈을 꾸고 인상착의까지 한참을 설명하니 가뜩이나 정신도 어수선한 나에게 어쩌라는 것인지 짜증스런 아침이었다. 거기다가 늦잠 잔 아들은 밥도 안 먹고 구렁이처럼 나가더니 결국 스쿨버스도 못 타고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아침부터 기분이 상해 먹던 밥을 놓고 체육관으로 갔다가 11시경 지하철로 개봉동 도착, 다시 신설동 건물로 이동했다. 구두를 닦으러 내가 자주 다니는 건물 옆 박스로 갔더니 지난 1월에 사망했다며 동생같은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갈 때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액션까지 보이며 이야기를 실감나게 하던 고향의 선배인데 허망하기만 했다.
8일 특별한 일이 없으니 주말도 의미가 없다. 오늘은 아들이 일찍 식사를 하더니 오전부터 다른 중학교 학생들과 축구경기를 한다고 서두른다. 나도 식사를 마치고 북한산에 가려고 버스에 승차하여 자리를 잡았는데 홍제역에서 차를 타는 사람들 틈으로 고향 제월리 형님을 우연히 만났다. 용인에 살면서 오늘 북한산에 가려고 1시간쯤 전철로 와서 시내버스로 갈아 탓다는 것이다. 10시30분 북한산성을 출발하여 대남문을 지나 문수봉 바위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바위에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2시경 불광동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여 사모바위를 지나 탕춘대를 거쳐 홍은동 11번 종점으로 내려오니 오후 4시가 되었다. 집으로 마을버스를 타고 와서 축구를 6시간이나 해서 힘들다는 아들과 외국서 온 딸 그리고 아내까지 태우고 어머니를 뵈러 갔다. 오랫만에 만나는 손녀 딸 그리고 언제나 든든하다는 경목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순간의 행복으로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병원을 나와 퇴계원으로 이동하여 용구네 식구와 전체 9명이 두부마을 식당에서 맛있게 식사를 했다.
9일 일요일 쌀이 없다며 떡국으로 아침을 준비했다. 생활비도 넉넉하게 주지 못해 미안해서 말도 못하고 하루를 살아간다. 식사하라고 아들을 여러 번 불러도 대답이 없어 목소리를 높여 화를 내고 급기야 방으로 들어가 머리를 때렸다. 아들이 나를 무시하나 싶은 생각에 화가 난 상태로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더니 영식이 전화가 와서 강남 우면산에 가자고 부른다. 단숨에 달려가 지난 번처럼 소망탑을 넘어 중턱에서 누룽지탕을 먹고 4시에 내려와 방배동 영식이 집으로 갔다. 이 근처에서 자주 만나기는 했어도 집에는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이다. 재수한다는 아들 혁준이도 많이 컷고 서문여고 3학년 딸 보미도 예쁘게 자라 대입을 준비하고 있다. 영식이 집에서 영덕게를 삶아서 식탁에 올리고 시골에서 올라온 동동주까지 준비하여 맛있게 먹었다. 늦은 시간
택시로 집에 와서 아들을 찾으니 아내와 싸우고 집을 나갔고 화가 난 아내가 억양을 높이어 다투다가 책상유리도 깨졌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아들이 들어왔기에 저녁에 엄마하고 싸운 것과 아침에 나와의 갈등 상황을 지적하니 말대꾸하며 대들어 내가 골프채를 들었고 결국 아들 손가락에 금이 갔다. 차라리 내가 세상에서 먼저 사라지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와 밤새도록 헤매고 다녔다.
10일 눈을 뜨니 찜질방에서 자고 있다. 영식이 전화가 와서 어제 상황을 대략 이야기하니 모든 것을 대화로 풀고 가족은 혈육이니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를 한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속도 쓰리고 배도 고프고 팔뚝에 멍까지 들어 내 신세도 말이 아니다. 10시경 들어와서 식사하라는 아내의 문자를 받고 집으로 들어가니 어젯밤 난장판이던 거실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다. 머리도 아프고 고민도 많고 병원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달려가니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를 반기신다. 병원을 나서 약수동 김성우 사무실을 찾아가니 고등학교 아들의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깊은 고민을 하고 있어 내 상황을 꺼내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나왔다. 저녁 8시30분에 집에 들어오니 아내와 딸은 평상시처럼 TV를 보며 말이 없고 나도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밤 11시경 손가락 골절로 세란병원에서 치료하고 팔걸이까지 한 아들이 식사를 불편하게 한다. 모두 내가 인내하지 못하여 생긴 집안의 풍파인데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일찍 잘 자라고 말했다. 가족 모두가 허탈하고 숨소리도 안 들리는 저녁시간에 나는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괴로움 속에서 밤을 보냈다.
11일 아침에 보니 아내의 얼굴이 시퍼렇다. 엊그제 아들을 나무라는 나를 제지하다가 부딪혔는데 미안해서 뭐라 할말이 없었다. 붕대를 친친 감은 아들이 불편한 손으로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고 하필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늘 우리집에서 모임을 한다고 아내는 얼굴을 가릴 마스크를 준비한다. 사는 것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며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고 EM학원에 가려고 했는데 차 안에 키를 두고 문을 잠가 보험에서 달려와 열어 주었다.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제 정신이 아닌 요즈음이다. 차를 몰고 신설동으로 가서 갈비탕을 사 먹고 저녁에는 대전에 갔다 온다는 영식이가 전화가 와서 방배동으로 가니 참치회를 사 주고 내 이야기를 조심히 듣더니 우리집으로 동행하자는 것이다. 5년 전에 우리집에 왔다가 두 번째 방문한 오늘 아들과 딸에게 용돈 5만원씩을 주면서 우리 가족에게 힘내라고 격려를 한다. 10시 지나서 택시로 보내고 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눈물이 돌았다.
12일 어제 친구가 떠나면서 나보고 조금 느긋하게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하더만 집에 돌아와 잠자는 아내를 바라보았는데 슬픈 모습이었다. 내가 성격이 급하여 15년을 살면서 마음 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 이제부터라도 이해하고 사랑하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행복한 날도 돌아올 것이다. 아침에 아들은 학교에 늦어 그냥 나가고 딸에게 학교생활 잘 하라고 말하니 대답도 없고 얼굴에 그늘만 가득하여 마음이 안타까웠다. 아침에 개봉동 사무실에 갔는데 아직도 해결되는 것이 없고 오히려 이 곳에만 오면 우울함과 혼란스러움만 남는다. 신설동으로 가면서 노량진에 있는 김성만 다세대주택 가격을 부동산에서 확인하니 1평/1500만원 정도로 전체 6~7억원 정도의 가격이 나온다.
13일 오후에 비가 내린다더니 날씨가 흐리다. 영식이가 청계산에 가자고 하여 아침에 부지런히 신설동에 가서 가게 임대를 설명하고 동작대교를 건너 방배동에서 영식이 태우고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농수산물센터를 끼고 10여분을 달려 주차장에 도착했다.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는 처음 와 보는 청계산, 계곡은 있어도 계단이 많고 1시간을 오른 593미터 매봉 정상에는 표지석이 위치하고 있다. 비가 오려는지 날은 흐리고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 근처에서 컵라면을 먹고 영식이가 가져온 술도 한 잔 마셨다. 4시경 방배동으로 이동하여 소머리탕과 수육으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어머니 병원에 갔다가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집에 사탕을 사 가지고 들어오니 아내가 좋아한다. 화이트데이가 오늘인지 내일인지 모르지만 늦게 온 아들도 사탕막대 2개를 가지고 왔다.
14일 아들이 궁싯거리다가 또 학교 차를 못 타고 갔다. 아들이 나간 직후 아들 친구가 차가 출발해 가고 있다고 집으로 전화가 온 것이다. 오전에 EM학원에서 원장과 대화하고 수학 선생을 구하기 위해 함께 광고를 만들어 구인란에 실었다. 점심을 먹고 내부순환 도로를 타고 병원에 가면서 계산하니 어머니께서 서울에 오신 지 6개월이 되었다. 가까이서 자주 뵈는 행복은 있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거동이 불편하신 것은 마찬가지로 변화가 없다. 그런가운데 병원비용 110만원과 잡비까지 매월 총130만원 정도를 광선형이 부담하고 있는데
물질적으로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차원장 때문에 분당에 갔다가 집으로 오면서 장모님께서 오셨다기에 제과점에 들러 빵을 사 가지고 들어가니 어제가 아니고 오늘이 화이트데이라고 한다.
15일 화요일 아침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간다. 오늘은 아들이 인창중학교 총학생회 부회장에 출마하여 선거를 하는 날이다. 2학년이라 런링메이트로 부회장 자격이지만 당선이 되고 다음에는 회장까지 도전하여 앞서가는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화이팅을 하고 기대한다니 자신이 없다며 포기하듯 대답을 한다. 8시경 아내와 장모님을 모시고 북한산을 오르는데 장모님께서는 69세 나이임에도 등산을 잘 하신다. 대단하다고 말씀드리니 수 십년 동안 청주에서 부모산을 오르내린 결과라며 오늘도 아무 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산을 오르신다. 대동문 정상에서 집에서 가져온 토란을 함께 먹고 오후 1시에 명성학원 입학설명회 간다는 아내 때문에 바로 내려왔다. 집에 오니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학생회 선거에서 떨어졌다고 예상한 것처럼 말하더니 우거지탕을 배달시켜 먹는다. 내년에는 회장에 도전할 수 있도록 실력은 물론 친구관계까지 잘하라고 식사하는 아들을 격려했지만 관심을 주지 않고 밥만 먹는다. 저녁에 영식이와 지하철로 일산에 가서 길종성 시의원을 만났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독도사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지방선거에서 여당후보로 당선이 된 경상도 사람이다. 우리를 참치집으로 안내하더니 다음에는 고양시장에 도전한다고 의욕을 보이며 의기양양하다. 나도 꿈꾸었던 정치인의 길이었는데 영식이 고등학교 동창인 오늘의 길의원이 너무 당당하고 멋있어 부럽기만 했다.
16일 새벽에 아내에게 '운동할 때 너무 힘이 들어가면 부상이 생기듯이 수강생에 욕심을 내면 강의가 힘들고 흥미도 사라지며 나아가 수강생까지 탈락하는 것이니 매사 넉넉하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물이 흐르듯 강의에 임하라고 말했다. 아내는 자기 마음을 족집게처럼 잘 안다고 감탄을 연신했지만 살아가면서 나는 그렇게 무관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들이 축구하러 간다고 스페인 대표팀 파란 팬츠에 빨간 상의 유니폼까지 맞춰 입고 등번호 10번에 David 이름을 달고 있다. 시험이 없는 주말에는 축구나 농구도 하고 친구들과 친목을 다지는 생활은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하다. 11시에 안산을 올랐다가 집에 와서 국수로 점심을 먹고 있으니 축구하고 돌아온 아들도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는다. 2시에 신설동 1층 임대로 서둘러 도착하니 보증금 1500만/월임대료 130만원으로 계약을 원한다. 물론 임대료가 월150만원은 되어야 하는데 내가 당장 어려우니 어쩔 수가 없어 계약을 했지만 내년에는 인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17일 초저녁부터 잠을 잘 때는 나도 모르게 자다가 새벽에 아내의 콧소리에 잠을 깨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 아침에 정신이 몽롱하다.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가고 안방에 혼자 누워 있는데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증상이 오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 더 열심히 운동을 하여 땀을 흘리고 독서를 하고 긍정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을 만들어 가야 할텐데, 다시 나와의 긴 싸움이 필요한 시간이다. 바로 일어나 산으로 올라가 나무 아래에 앉았다가 바위에 누웠다가 시간을 보내고 점심쯤 내려와 어머니 병원에 갔다. 어젯밤 잠을 못 주무셨다고 간병인이 말하는데 안색이 안 좋고 불러도 대답도 없으시다. 신설동으로 가니 어제 계약한 임차인이 의류 박스를 들이면서 남은 보증금을 전하고 집으로 오면서 경기학원으로 들어가니 장원장이 학원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발전 방향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는데 내 코가 석자라서 조언도 못했다.
18일 아내하고 딸하고 함께 잤는데 아침에 딸이 인상을 쓰고 잠을 제대로 못 잤다며 울상이다. 가족들이 비몽사몽이고 피곤하여 맥이 없는 상태로 마지못해 라면으로 식사를 해결하였다. 오전에 개봉동 사무실로 갔는데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아 다시 돌아와 명지대 근처에서 차용곤하고 삼계탕을 먹었다. 오후에는 영식이가 정릉에서 모임이 있다기에 대리운전 취직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태우러 갈까 했는데 홍제역 근처로 먼저 출발하여 왔다. 영식이는 정릉에 있는 정석학원을 운영하면서 그 지역의 파출소장이나 동장 그리고 부녀회장 등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과 땀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19일 아내와 딸은 거실에서 나는 안방에서 혼자 편하게 잤는데도 아침에 눈이 아프고 피곤해 정신이 없다. 학교에 가는 아들이 시간이 없다고 간장에 밥을 비벼서 먹고 나는 옆에서 미역국으로 식사를 조금 했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갔더니 1년 기간이 끝나 1회권 5000원 지불하고 입장하여 런링과 기구운동을 했다. 12시경 EM학원에 가서 광고를 원장과 함께 만들고 오후에 신설동에 가서 가게를 점검하고 있는데 영식이 전화가 왔다.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문제가 없다며 의기양양하기에 100년은 더 살아라고 농담섞인 덕담을 해 주었다. 병원으로 가서 어머니를 뵈니 엊그제보다 활력이 있어 간병인에게 더 성심껏 모셔 달라고 식사비용 2만원을 주었다. 집으로 오니 아들과 딸이 학원에서 돌아오고 공부 열심히 하는 딸을 칭찬하면서는 4월달 생일에 핸드폰을 사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20일 어제 영식이가 오늘 북한산행을 하자고 해서 소풍을 가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서울역에서 10시에 만나 차에 태우고 구파발을 지나 북한산성 입구에서 걸어 올랐다. 현재의 삶은 어려워도 한가하고 완연한 봄기운까지 오늘의 산행은 고민이나 잡념을 잊기에 충분했다. 약 100분을 걸어 대남문에 도착하여 숨을 정리하고 오르막길 문수봉 정상에 올랐다. 바위아래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평소처럼 컵라면을 꺼내는데 영식이는 야채와 핫꽁치 그리고 초장까지 가져와 즉석 생선회 무침을 준비한다. 밥과 술과 김치 또 과일까지 산에서 잔치하는 분위기였고 오후 3시에 내려오면서는 물이 흐르는 계곡에 앉아 영식이가 어린시절에 독파했다는 천자문을 낭독하는데 놀랄 정도였다. 홍제동 우리 아파트에 차를 두고 아내와 딸까지 불러 호프집에서 닭튀김과 닭강정을 먹고 맥주도 마시며 저녁을 보냈다.
21일 7시40분인데 아들이 일찍 학교에 갔다. 어제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워 아내와 안산에 올라 산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맑아오고 가져간 무 조각을 먹으니 갈증도 사라진다. 11시경 산에서 내려와 인왕시장에 간다는 아내를 홍제역에 내려주고 EM학원에 갔다가 1시경 집에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쉬는데 아들이 내일 토요일에 친구들과 축구경기를 한다고 운동장을 빌려 달라해서 여기저기 알아 보니 모두 예약이 되어있다. 다행히 인왕초등학교가 가능하여 곧바로 달려가 2만원을 지불하여 사용승인을 얻어두고 내부순환도로를 달려 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집으로 오면서는 약수동 김성우 사무실에 들어가 차용액과 3월달 이자 등을 정산하고 차용증을 다시 썼다.
22일 오늘은 자율학습 토요일이다. 날마다 공부하는 아들과 딸이 잠을 더 자도록 조용하게 아침을 맞이하는데 아들은 습관처럼 일어났다. 9시에 식사를 마친 아들이 어제 예약한 인왕초등학교에 축구하러 간다고 유니폼을 입고 바쁘게 준비한다. 정릉에서 북한산을 오르려고 출발하면서 아들을 태우고 학교에 내려주니 상대편 친구들이 나오지 않았다며 자신들끼리 편을 갈라 게임을 시작한다. 나는 별도로 정릉에 도착하여 100분을 걸어 대성문 보국문을 지나 칼바위 정상에 섰다. 남서쪽으로 트인 서울시내와 한강 물줄기를 바라보며 탄성을 하고 바위 아래에 시선을 돌리니 분홍색 자태를 뽐내며 진달래꽃 하나가 수줍게 피어 있다. 넓은 북한산에서 제일 먼저 핀 꽃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데 성격이 급한 것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어머니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오는 중에 비가 내린다. 어제부터 팔이 욱씬거리고 몸도 무겁더니 비가 올려고 그랬던 것인가 생각하니 내 나이도 이제 50을 앞두고 있다.
23일 어제부터 내리는 비가 일요일 오늘 아침까지 부슬부슬 내린다. 아마 이 비가 그치면 봄기운이 완연할 것이고 만물이 소생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할 것이다. 몸살 기운에 머리도 어지럽고 몸도 무거워 설렁탕을 먹으러 갈까하다가 집에서 된장찌개로 아침식사를 했다. 10시경 아들은 서대문 독서실에 가서 수학문제 풀고 오후에 엄마가 하는 논술수업 간다며 계획을 짠다. 비가 내리는 일요일의 무악재는 한산하다 못해 적막하고 날이 어두워 음산하기까지 하다. 11시경 아들을 태워 서대문 독서실 앞에 내려주면서 곧 점심시간이니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돈가스라도 사 먹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체육관에 가려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바로 집으로 와서 떡국으로 점심 먹고 오후에 병원으로 가면서 아들부터 논술학원에 태워주려고 한양아파트 후문쪽으로 가니 비를 맞고 아들이 걸어오고 있다. 차에 태워 한양상가에 내려 논술학원에 보내고 어머니 뵙고 다시 와서 저녁에 삼겹살과 등심으로 아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24일 어젯밤에 잠자리를 바꾸어 거실에서 잤더니 역시 컨디션이 좋지가 않다. 학교에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날마다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라도 다독여 주리라 다짐하는데 아침마다 시간이 부족하여 뛰어 나가니 기회를 놓친다. 그래도 아들이 자라서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 아빠나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헤아릴 수 있는 충분한 아들이 될 것임을 나는 믿고 있다. 10시가 거의 되어 지하철로 개봉동에 갔더니 조사장이 폐가 좋지 않아 병원에 있어 대화도 못하고 김성우 차를 타고 신정동으로 이동하여 고향 친구를 만나고 학원이 즐비한 목동을 지나 오목교까지 걸었다.
25일 날씨가 흐려 내일 모레까지 비가 오고 또 주말에 계속된다고 한다. 아들이 식사도 거르고 학교에 가면서 점심을 일찍 먹으니 괜찮다고 하는데 잘못된 상식이 아닌가. 식사후 잠깐 쉬다가 체육관으로 가서 런링과 기구운동을 땀이 흐르도록 열심히 했다. 11시에 EM학원 원장을 만나 운영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병원에 가서 어머니하고 1시간 넘게 대화를 했다. 듣기만 하고 고개만 끄덕이시는 어머님이지만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고 훗날 어머니께서 이승의 삶을 다하는 날 오늘의 시간을 아름다운 그리움으로 나는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오면서 동대문 세무서에 들어가 신설동 세금에 대하여 상담하고 나오니 김성만으로부터 차용액 준비가 되어가니 걱정말고 내일 동영상 회의에 참석하라는 문자가 와 있다. 홍제동에 도착하여 새벽 1시까지 아들을 가르친다는 홍제역근처 유선생 수학학원에 들어가 상담하고 9시에 돌아왔다.
26일 BMW 승용차를 타고 체육관과 EM학원을 다녔는데 확실히 승차감이 좋아 사람의 위상이나 포스가 달라지는 기분이다. 광고를 보고 찾아온 수학 선생을 2시에 만났는데 학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 면접을 보는 일이다. 대화할 때는 열심히 성의껏 잘 한다고 하고 선남선녀의 모습이라도 막상 채용을 하면 이기적이고 일처리나 실력이 부족한 경우가 80% 이상은 된다. 오늘 면접자도 당장 내일부터 수업을 할 것처럼 의욕을 보이지만 나로서는 눈감고 사람을 고르는 것처럼 답답하다. 오후에 남부터미널 근처에서 영식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이정렬 사장과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욕설을 남발한다. 성품이 바른 친구에게 자제를 권유하니 나를 닮아서 그렇다고 하여 한참 웃었다. 저녁에 미성회관에서 함께 짬뽕탕과 탕수육으로 저녁을 먹고 집에 10시에 들어와 다시 스프를 만들어 먹는데 아내와 딸은 남의 일인 양 관심도 없이 거실에서 책만 보고 있다.
27일 목요일 늦게 일어나 식사를 거르고 옷만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배웅하고 곧바로 스쿨버스를 내려다보니 출발을 했고 아들은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간다. 마치 인생에서 낙오하는 아들의 단면같아서 마음이 안타깝고 착잡하기만 했다. 북한산에 가려고 정릉 주차장에서 11시에 차를 두고 나서니 날이 쌀쌀하고 바람까지 분다. 영취사 방향으로 오르다가 일선사를 거쳐 대성문에 도착하니 12시30분이 되었고 대남문을 지나 문수봉 정상에 오르니 이내 싸락눈이 내린다. 기온조차 떨어져 손이 시려울 정도로 공기가 차갑고 오고가는 사람도 없는 겨울도 봄도 아닌 을씨년스러운 날씨다. 따뜻한 국물이 있는 컵라면을 먹고 2시경 정릉으로 내려와 어머니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오니 아들이 일찍 들어와 있다. 아침처럼 지각할 바에는 스쿨버스 통학을 중지하라고 하니 말도 안하고 분위기만 어두워진다.
28일 아들은 학교에 갔고 식사를 하는 아내는 오늘 딸의 초등학교 학부모 모임을 간다고 한다. 개봉동에 가려고 차를 몰고 내부순환 도로를 달려 성산대교 지나 고척교로 나가니 바로 목적지다. 김성우를 만나 함께 사무실 들어가 이야기하고 2시에는 6촌 종식이형을 만나 금전을 부탁하니 선뜻 850만원을 빌려 준다. 본인도 힘든 마당에 말없이 수용해 주는 고마움을 언제라도 보답할 것이다. 영식이는 운반선에 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사업을 시작했는데 내일 배가 입항한다고 부산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알래스카 베링해에서 잡은 랍스터나 킹크랍을 운반하는 선박으로 입항하는 절차도 까다로워 현재는 부산외항에 정박해 있다는 것이다. 저녁에 장안동에 사는 정식이와 볼 일이 있어 서대문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우연히 대신고 강형수 선생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셨다. 성격이 급하여 계속 권하는 강선생 때문에 연거푸 마셨더니 일을 보기도 전에 나와 정식이가 미리 취해 버렸다.
29일 토요일 아침 비가 내리고 아들과 딸은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에 가더니 오전에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고 돌아오니 벌써 집에 와 있다. 친구와 함께 온 아들은 컴퓨터를 하면서 바로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여 딸에게만 라면을 끓여 주었다. 내일 부산에 와 달라는 영식의 말에 서울역으로 나가 티켓을 예매하니 KTX 서울-부산 교통비가 51000원이다. 비가 하루 종일 내리고 어머니 병원으로 가는 중에 종로에 차가 너무 막혀 세운상가에서 차를 집으로 돌렸다. 영등포에서 남석이가 맥주라도 마시자고 전화가 왔는데 어제도 과음해서 그냥 집에 들어오니 서대문 도서관에 간다고 아들이 나간다. 시험기간도 아니고 더구나 주말이라 의아해 하니 아내가 친구들과 어울릴 상황이니 묵인하자며 눈치를 준다. 거실에는 누가 사 왔는지 코골이방지 베개가 놓여 있어 보는 내가 더 반가웠다. 효과는 있을까!
30일 나는 지금 부산에 가고 있다. 20년전 청산학원 근무할 때 해운대로 단체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영식이가 배사업도 확인하고 머리도 식히자며 나를 부른 것이다. 어제 저녁 거실에서 딸과 자던 아내가 코골이 베개를 하고 자서 그런지 신통하게도 조용한 밤이었다. 아침에 아들은 축구하러 나가고 나는 일찍 북한산에 갔다. 서울역 1시50분 열차를 타야 해서 홍은동 11번 종점에서 탕춘대를 거쳐 향로봉 아래까지 갔다가
내려와 병원에 12시에 들어가 어머니 얼굴과 다리를 잠깐 주물러 드리고 나왔다. 집에 1시경 도착하니 축구를 마친 아들이 라면으로 점심을 먹기에 오후에 엄마가 하는 논술수업 집중하여 잘 들으라고 당부하고 서울역에 택시로 갔다. 영식이가 하는 운반사업이 잘 되어야 하고 나도 사업이든 뭐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살다가 죽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행복과 불행이 교차되기에 현재의 내 어려움도 잘 극복하면 머지않아 밝은 희망으로 전환될 것이다. 서울역을 1시50분에 출발한 기차는 동대구역에 3시30분에 도착했고 3시50분에는 경산을 통과하여 4시50분 목적지 부산역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선박을 관할하는 선장 신영재를 영식이와 함께 만났다. 우리와 같은 나이로 강원도 출신 외대를 졸업하고 외국회사를 다니다가 여러 이유로 배의 운항을 책인지는 일을 하고 있다. 일단 투자한 영식이 1차 사업이 잘 되어 자갈치 시장으로 가서 양곱창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까지 불렀다. 늦게 영식이 큰형이 사는 연지동으로 들어갔지만 깊어가는 부산항이 꿈속처럼 아른했다. 다음달부터 나도 투자를 하면 10부의 수입(5천만원 투자시 5백만원)이 되고 그러면 살아가는데 다소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영식이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한다.
31일 새벽에 눈을 뜨니 영식이 형님 집 부산 연제동에서 자고 있다. 편하게 자고 거실에 나오니 부산의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형님 부부는 이발소를 운영하시어 일찍 나가셨고 우리를 위하여 꽁치찌개를 끓여 두어 감사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세면을 마치고 부산역으로 나와 신사장을 만나 함께 배가 정박해 있는 감천항으로 택시로 이동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항구의 초입에서 해물탕으로 점심을 하고 간단한 신분 확인을 거치고 배에 올랐다. 러시아에서 만든 약 800톤 규모의 선실에 들어가니 식당과 샤워실, 개인 숙소가 있는데 알래스카 베링해 근처는 파도가 심해 조업하는 동안에는 배가 완전히 뒤집힐 정도의 파도라서 서랍이나 옷장은 물론 온갖 기구나 생필품들을 거의 고정시켜 두고 있다. 선실에는 모두 러시아 사람들이 있어 영어로 의사를 전달해 보는데 러시아어가 아닌 이상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근처 배에서는 냉동 참치가 막대처럼 쏟아져 장관이고 여기에서 보니 사람들 살아가는 방법이 다양하기도 하다. 큰 탑차에 참치를 실으면 가격이 10억원이 되고 산지에서는 1킬로에 1만원 한다니 서울시내 참치집에서 먹는 가격은 터무니 없이 비싼 것이다. 선박 안을 살피며 기관실에 들어가 보니 과거 외항선 기관장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누비며 스페인 라스팔마스 주변에서 오랫동안 조업을 했던 큰 형님의 시간이 상상되었다. 점심쯤 서울로 돌아올 때는 영식이 차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집에 도착했다. 곧바로 EM학원에 갔다가 오면서 얼마전 아들이 등록을 하여 다니는 명성학원에 들어가 1층 로비에서 수업장면을 보았다. 화면속의 아들은 맨 뒤에 앉아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움직임이 없는 상태로 공부를 하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긴 하루를 보낸 3월의 밤, 어제와 같이 가족들이 현관에 들어서는 10시가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