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하나님 나라와 민중가요
마가복음 4장 30절-32절
30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32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1. 잡초 같은 하나님의 나라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두고 “겨자씨 같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포도나무처럼 단 열매를 맺거나 백향목처럼 귀한 목재도 아닌 겨자씨 같다는 말씀은 듣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드는 말이었을 겁니다. 겨자는 사람들에게 잡초로 여겨지는 풀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밭으로 비유하자면, 겨자는 그 밭을 망치는 존재입니다. 어떤 농부도 잡초를 부러 밭에 심지 않습니다. 잡초가 나면 지체 없이 뽑아야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하시기를 농부가 애써서 자신의 밭에 겨자를 심었다 합니다. 신학자 크로산에 따르면, 이 식물은 번지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땅을 뒤덮어 망칠 수 있는 식물, “땅을 차지하는 위험한 성질의 매운 맛 관목”이라고 설명합니다. 양식이 되는 곡식도 아니고 재목으로 쓰지도 못하는 이 매운 불청객이 어째서 하나님 나라와 같을까요?
기성교회에서는 이 겨자씨의 비유를 두고 작은 것이 점점 커져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며 성장과 성공의 신화를 말할 때 자주 인용하긴 합니다만 겨자가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잡초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성장과 성공의 신화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보다는 ‘민초’를 떠올리는 것이 더욱 어울리지요. 하나님 나라가 민중에게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2. 하나님 나라와 잡초
고등학생 때, 저는 “들꽃반”이라는 교내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들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고, 당시 제가 좋아하는 문학선생님이 동아리 담당 선생님이셔서 별 생각없이 희망 동아리 란에 “들꽃반”을 적었더랬습니다. 선생님은 동아리 첫 날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나 그냥 스치기 쉬운 것들의 이름을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교정에 있던 나무이름, 꽃이름을 하나 하나 알려주셨는데 고백하자면 저는 들꽃의 이름을 많이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저 동아리 시간에 한가롭게 학교를 어슬렁거릴 수 있었던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아리 시간에 슬렁슬렁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순찰을 도시던 교장선생님이 할 일 없이 학교를 돌아다니는 저희가 못마땅하셨는지 화단 곳곳에 있는 잡초를 뽑으라고 하시는 것 아니겠어요. 입을 삐쭉 삐쭉 내밀고 있었는데 동아리 선생님이 “잡초가 아니고 저희 교구입니다.” 하셔서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릅니다. 이름을 모르면 그냥 죄다 잡초로 보이는 것이지요. 사실 잡초에도 이름들이 다 있습니다. 저희의 교구를 잡초라고 부르는 교장선생님을 규탄하기는 했지만 사실 저도 들꽃의 이름을 알아가는 데는 영 관심이 없었으니 쌤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졸업할 때 즈음이 되는 좋아하는 들풀 몇 가지가 생기긴 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했던 들꽃은 “봄맞이꽃”이었습니다. 학교 담을 따라 걷다보면 쉽게 볼 수 있는 하얀 들꽃이었어요. 이름 그대로 봄철에 피어나고, 봄을 맞이하는 손길마냥 바람에 살랑거리는 귀여운 꽃이었습니다. 이 꽃은 크기가 아주 작아서 무릎을 굽혀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꽃입니다.
03. 하나님 나라와 꽃다지
그리고 좋아했던 들꽃은 “꽃다지”였습니다. 꽃다지는 냉이처럼 생겼는데 생김이 특별나게 이뻐서 좋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노래하는 꽃다지가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래패에 이름을 지을 때 냉이를 닮았지만 냉이는 아닌 이 들꽃을 골라 이름을 지은 사람은 ‘안 봐도 알만 하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멋진 이름도 많았을 텐데 굳이 이 이름을 고른 것이 꽃다지의 정신이었겠지요? 이 이름을 고른 꽃다지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두고 더 멋진 이름을 고르지 않고 겨자씨를 고른 예수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생각해보면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참 별나지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로 불리는 잡초와 같다면, 우리에겐 잡초의 이름을 한 노래패가 있으니까. 그이들의 노래 가사를 찬찬히 곱씹어보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가 감이 조금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꽃다지의 음악을 좋아하시나요?
대중음악의견가 서정민갑은 세상 사람들을 꽃다지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지금은 꽃다지를 아는 사람들보다 꽃다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우리 동녘에서는 꽃다지를 아는 사람들이 꽃다지를 모르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겠지만 그건 우리 공동체가 이상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꽃다지가 노래를 통해 지켜온 가치들은 꽃다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소중한 것일 거라고 평론가는 말합니다. 자유와 평등, 통일과 연대의 가치. 우리 모두가 이 가치에 빚지고 사니까요.
놀랍게도 저에게도 꽃다지와 관련된 추억이 있습니다. 저에게 꽃다지는 제주 강정에서 지겹게 부른 <바위처럼>이 거의 전부였는데 대학에 입학해서 들어간 도시빈민선교회 동아리에서 20학번 정도 높은 선배가 밥을 사준다며 종로로 불러내어서 새벽 4시까지 술을 먹였던 어느 날, 그 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속이 좀 안 좋은데요. 마지막 4차인지 5차인지를 종로 근처 사무실에서 편의점 맥주로 하였는데, 그 때 그 선배가 “이 노래를 아느냐”며 틀어주었던 곡이 꽃다지의 ‘전화카드 한 장’이었습니다. 한번 들어볼까요.
(노래)
그러니까 제가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젠장, 전화카드가 다 뭐야”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모토로라 핸드폰을 썼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미 술에 떡이 되어서 말대꾸를 할 힘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노래를 들었습니다. 노래를 듣다가 울었던 것이 기억이 나는데 가사가 좋아서 울었는지 이제는 정말 집에 가고 싶어서 울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여간 그 이후로 종종 이 노래를 찾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시위 현장에 나가며 꽃다지의 노래를 더욱 자주 듣게 되었죠. 꽃다지의 노래들은 대부분 ‘전화카드 한 장’처럼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은 단어들이 등장하곤 했지만 사실 그것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90년대 현장만큼이나 2020년대의 현장에서도 꽃다지의 노래가 아직 유효했고, 또 필요했으니까요. 문화제를 준비하고 기도회를 준비할 때 저도 빼놓지 않고 꽃다지의 노래들을 채워 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꽃다지의 노래를 더욱 깊이 알게 된 것이 역시나 농성을 직접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농성장에 연대를 하러 다닌 적은 많았지만 아예 농성장을 차려서 붙박이로 그곳에 있으려니 또 마음가짐이 다르더라고요. 그 때 농성장에서 듣던 꽃다지의 노래 “내가 왜?”라는 곡이 저에게 그 이전과는 또 다르게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이 곡도 한번 들어볼까요?
(내가 왜)
“내가 왜 세상에 농락당한 채 쌩쌩 달리는 차 소릴 들으며 잠을 자는지 내가 왜 세상에 버림받은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이 가사가 저에게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내 마음을 누가 대신 읽어준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노래로부터 받은 힘이 너무 커서 꽃다지의 노래가 민중들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를 건네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새삼 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을 때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아마 그 사람은 “내가 왜 세상에 농락당하며 살지?”라는 질문을 가진 사람들 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세상에 버림을 받은 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었지?”하는 질문들을 가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공간일까, 궁금합니다. 저에게 하나님 나라는 반기지 않은 잡초들로 엉망이 된 밭을 닮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반김을 받고 사랑을 받는 그 작물도 밭에 있고, 발에 채이고 욕을 먹는 게 일상인 잡초도 그 밭에 있습니다. 열매를 따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그 밭에 있고,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 배를 채우는 새와 벌레가 그 밭에 있습니다. 모두가 뒤엉켜 있는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04. 꽃다지 이후의 민중가요
꽃다지 이야기만 하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마치자면 역시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꽃다지 이후의 민중가수 한 명을 더 소개 시켜드리려 합니다. 출장작곡가 김동산입니다. 김동산이 노래를 만드는 방식은 참 독특합니다. 출장 작곡가를 표방하는 그는 이야기가 있는 곳에 직접 가서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곧바로 노래로 만듭니다. 그가 주로 듣는 이야기는 자기 땅에서 쫓겨나고,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서발턴’ 이라고 하지요?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을 가리켜 우리는 ‘서발턴’이라 말합니다. 김동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 김동산이 노래로 담는 사람들은 서발턴입니다. ‘성장’이라는 이름에 밀려난 사람들, 촛불을 들고, 피켓을 만들어도, 뉴스 한 줄 실리지 않는 사람들, 김동산은 그들 곁으로 가서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되돌려 줍니다. 들어보실래요?
(아현포차 30년사)
아현동에서 쫓겨나야 했던 노년의 여성 포장마차 주인의 일대기입니다. “이승만 박사 때가 더 가난했는데 지금 이 세상이 더 각박하다” 말하는 포장마차 주인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궁금합니다.
05. 겨자씨, 하나님 나라와 민중가요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옆길로 새어 겨자씨를 닮은 민중가요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꽃다지’, ‘민중가요’라고 하면, 80년대 90년대 떠오를실 줄 압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 노래가 어느 현장에서는 귀하게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 너머에 새로운 노래들이 나오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는 것 또한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노래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와 맞닿아 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전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