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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한복음 14장)
고별만찬(13장), 고별담론(14-16장), 고별기도(17장)
공관복음서들과 요한복음이 지니는 여러 차이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요한복음에 유독 ‘고별 담론’(13:31-17:26)이라 불리는 유언 성격의 긴 말씀이 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11:47-53),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12:1-19), 죽으실 때가 되었다고 천명하셨습니다(12:23). 그리고 13장에서는 마지막 식사를 하시는 중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13:1-17). 이 식사 자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는 동시에 고별사를 하시는 시간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고별 담론을 나누시고(14-16장), 제자들을 위한 고별 기도를 드리십니다(17장). 그리고 18장에서 체포당하십니다.
담론인 14-16장은, 예수의 떠나심 이후,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에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 공동체를 위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의 유언을 부활절기에 읽는 것이 시기상 적절치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고 승천(昇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예수의 떠남은 승천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승천은 7주에 걸친 부활절기의 끝부분에 놓입니다. 그렇다면 승천일이 가까워지는 부활절기 후반부는, 교회가 예수님의 고별사를 듣기에 최적의 시기입니다. 요한복음의 고별 담론은 마치,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죽음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을 모으고 들려주는 유언 형식으로 기록된 신명기와 유사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1절)
이 고별 담론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13:36) 라는 베드로의 걱정 어린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베드로의 물음은 예수의 떠나가심을 경험하는 모든 제자와 교회의 불안을 대표하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 따라가겠다고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지금은 그럴 수 없다”라고 잘라 말씀하십니다(13:36, 37). 결국 예수께서 제자들을 두고 혼자 떠나신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로 확정되고, 예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근심이 제자들을 휘감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놓인 정황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예수의 말씀은 매우 단순하고 단호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절). 그런데 근심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근심이 없어질 수 있는가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도 근심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면서 심령에 비통하게 여기셨고(11:33),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내 마음이 괴롭다’라고 토로하셨으며(12:27), 제자의 배신을 말씀하실 때도 괴로워하셨습니다(13:21).
근심은, 어찌할 수 없는 고통과 어둠을 겪는 인생의 밤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필연입니다. 간단히 근심하지 말라는 한마디로 근심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근심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을 믿고, 나(예수)를 믿으라”고 명하십니다(1절). 요한복음에서 ‘믿는다’는 동사는 한 단어가 아니라 두 단어(pisteu,w eivj, believe into)입니다. 이 말은 인식적인 이해와 동의, 판단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에서 비롯된 신뢰와 일치로서의 믿음입니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2-3절)
이어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2절), “너희와 함께 있을 곳(거처)을 준비하러 간다”(3절), “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3절) 등의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은 “집, 곳, 거처” 등의 공간적 장소를 가리키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통 이 단어들은 천국을 가리킨다고 이해되고, 많은 경우, 장례식에서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의미로 읽히곤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집(oikos)은 한 가족이 소유하는 건물을 말하지 않고, 가족이 함께하는 상태로서의 가정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곳은 하늘에 있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가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 어디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야곱은 거친 광야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그곳을 “하나님의 집(벧엘)”이라 불렀지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 어디나 하나님의 집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특정했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의 육체’를 성전(하나님의 집)으로 여기셨습니다(2:21). 예수 자신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거할 곳이 많다”의 “거할 곳(mone)”은 “거하다(meno)”는 동사의 명사형으로서, 마찬가지로 고정된 물리적 장소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거하다’는 말은 특정한 공간에 거주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특별한 “관계”를 이루어 함께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10, 11절)는 말씀은 “거함”을 가장 잘 설명하는 예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는 너희 안에 거하겠다”(15;4)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거할 곳이란 떼어놓지 못할 관계로 함께 있음을 말하는 관계적 공간을 지칭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2, 3절)
제자들을 떠나, 예수께서 가시는 곳은 “아버지 집”(2절)입니다. 아버지 집이란 아버지 소유의 저택이 아니라,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들이 거하는 자리로서, 곧 자녀의 집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의미는, 아버지의 자녀가 된 이는 누구라도 함께 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거함은 정해진 한 저택에서 같이 산다는 얘기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산다는 것입니다. ‘거할 곳’이라는 말은 물리적 공간이기보다는 관계적 공간이며, 그 관계는 사랑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위해 (아버지 집에) 거처를 준비하러 간다”는 예수의 말은, 너희(제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를 완성하러 간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의 떠남(죽음)이 갖는 가장 중요한 취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위한 공간을 만듭니다. 그 공간은 서로의 마음과 영혼 안에 있는 공간이자 관계적 공간으로서, 보이지 않는 공간입니다. 이 비물질적인 공간이야말로 물리적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영원히 함께 거하는” 공간입니다. 떠나간 이와 남은 이들이 함께 거하고, 하늘에 있는 존재와 땅에 있는 존재가 함께 머물며, 죽은 이와 살아 있는 자가 함께하는 거처입니다. 물리적인 거처(장막)들은 어느 때엔가 무너지게 마련이지만, 사랑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준비하시겠다는 거처가 바로 이 관계, 사람과 하나님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만드는 자리요, 이는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됩니다. 그 거처(관계)는 이미 예수께서 거하시는 곳이며, 예수께서는 우리를 그 거처로 영접하십니다(3절).
나는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4-6절)
예수께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안다”(4절)고 말씀하시고, 도마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모르니 길도 알 수 없다”(5절)고 응수합니다. 처음 예수를 찾아왔던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께 “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지요(1:38). 예수를 재판하던 빌라도는 “당신은 어디로부터 왔느냐?”고 묻고(19:9), 수가 성의 여인은 “어디에서 ‘생수’를 얻을 수 있겠는가?”(4:11)고 물으며, 오병이어 만찬에서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오천명)을 먹이겠는가?”라는 물음이 등장하고(6:5),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디로 가려고 하기에, 자기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가?”(7:34)고 묻습니다.
“어디”는 근원을 의미하는 출발지이자, 돌아갈 목적지입니다. 고대 세계 상식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낳았고, 아들이 죽으면 열조(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예수 역시 아버지로부터 오셨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그 아버지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통하여 그 어디는 바로 아버지(하나님)에게로입니다. 제자들이 이(어디)를 안다면 그 길도 알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반면, 도마는 어디인지 모르니 길도 알 수도 없다고 되묻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길이다”라고 언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로 다가오신 그 길이 예수셨습니다. 이제 떠나시는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십니다. 앞서가는 사람이 길이 된다는 점에서 예수는 길이십니다. 그리고 길은 그 길이 닿는 목적지(하나님)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인정한다면, 진리에 이르는 길이신 예수는 진리입니다. 그 길을 가는 이는 그 길의 목적지인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일체입니다. 나아가, 요한복음의 이해를 따르면,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고, 생명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길이신 예수는 목적지인 진리(하나님)와 분리되지 않으며, 그 길을 걷는 자(제자)들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그 길은 그대로 생명이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한다 (11-14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제자 공동체의 불안을 진정시켜 안심하게 하려 함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12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예수께서 하신 일 혹은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했고, 바울은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했으며,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고 알려집니다. 이런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이들은 예수의 일 혹은 더 큰 일을 감당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이를 살리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하고 신실함을 지키는 일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이 참임을 증언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3, 14절)라는 약속은 기도하는 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오해와 부작용을 낳은 구절입니다. 첫째,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기도를 마무리하는 기도 공식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 기도자가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욕망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간구를 예수의 이름을 구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실제로 야고보와 형제가 비밀히 예수께 와서 높은 지위를 구했을 때, 예수께서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막 10:35-40). 섬기고자 종이 되신 분이 높은 자리를 약속해 줄 수는 없는 이치입니다. 예수께 구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이신 분에게 파괴적인 승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평화이신 분에게 폭력적 능력을 구할 수 없습니다.
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기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던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마 6:10)라는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에 합당한 기도가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예수께서는 반드시 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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