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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 원문보기 글쓴이: 여산
(주장자를 세 번 치고 들어 보이시고)
금일 대중께서는 아시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바로 여러분이 알아차려서 계합을 했다 하더라도 하늘과 땅 사이로 거리가 멉니다.
서로 눈 마주치면 다 알았다, 더이상 들어야 할 말이 없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된 사람을 참으로 잘했다고 칭찬을 해야 되는데, 이 산승은 그것도 또한 하늘과 땅 사이로 거리가 먼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산승이 말씀드린 이런 대목에서 여러분이 스스로 분명히 바로 보고 알아듣는다면,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과 제가 만난 것이 참으로 값어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못 알아차렸다,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제가 여러분을 만났지만 동과 서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뱃속에 있을 때는 태아이고, 또 태어나서는 한 살의 모양이고, 또 20살이 되면 20살의 모양이고, 30살이 되면 30살의 모양이고, 50살이 되면 50살의 모양이고, 이렇게 오늘 이 자리에 앉기까지 한 번도 자기 모양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본 일이 없지요. 그러면 그 가운데에 어느 것을 진짜 자기 모양이라고 할까요?
마음도 한 생각이 일어나서 금방 없어지고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수천만가지 생각이 일어나면서 하나로 고정돼서 굳어 있는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모양일까요?
모든 게 고정돼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걸 한마디로 달팽이 뿔과 같다고 했습니다.
와우각상삼천계 (蝸牛角上三千界)라. 달팽이 뿔 위에 삼천대천세계더라.
이 문제를 여러분이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 가운데 진짜 나의 모양이 있을 텐데, 어떤 것이 진짜 모양인가?’
하나의 주장자가 해와 달을 뚫고 지나가니
우주 대천세계를 광명이 비추는 구나
절벽 위에 서면 나아갈 길(進路)이 없는데
계곡의 물은 계곡 입구를 벗어나서 흘러간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바람 부는 데 맡겨 놓았는데
꽃향기는 천지에 가득하더라
이러한 게송의 의지가 어디에 있는가를 여러분이 잘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법문을 듣는 맛이 납니다.
암두(巖頭) 스님이 이르길,
“내가 가르친 뜻은 독을 발라놓은 북과 같아서(吾敎意如塗毒鼓), 그 북을 쳐서 소리를 내면,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모두 죽느니라.”
당시에 소암(小巖) 상좌라는 스님이 나와서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독을 바른 북(塗毒鼓)입니까?"
그러자 암두 스님이 손으로 무릎을 쓸어 만지면서 하는 말이,
"한신(韓信)이 조회(朝會)에 임했도다.“
佛法無情報爾曹(불법무정보이조)
忽生忽殺在吹毛(홀생홀살재취모)
若教韩信得妙訣(약교한신득묘결)
自是深明防漢高(자시심명방한고)
불법은 무정(無精)히 모든 이에게 나타냄이라
살리고 죽이는 것이 취모리검에 달려있으니
한신(韓信)이가 만약 묘한 비결이 있었다면
한고조가 죽이려 하는 것에 방비가 잘 되었으리
이 게송이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나이가 들었든 안 들었든 이 생명은 기한이 없는 것입니다. 늙었다고 해서 먼저 죽고, 젊다고 먼저 죽고 그런 건 아닙니다. 먼저 가는 건 기한이 없으니, 죽음에 다다랐을 때 염라대왕이 여지없이 수갑을 채워서 끌고 갈 텐데, 어떻게 그 죽음을 대처해 나갈 수 있겠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묘결이 있어야 됩니다.
어느 선사에게 묻길,
"부처님이 일생 동안 가르치신 교리 밖에 별 따로 한 글귀가 있습니까?“
"촌 노인이 밤중에 금고에 있는 돈을 가지고 나와서 다 불살라 치우더라"
다른 대답으로, "독을 발라놓은 북이다. 그 북을 치는 이는 죽고, 북소리 듣는 이도 죽는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거겠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오늘날 세간의 여러분은 생존 경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장에 돈 1억을 메꿔 넣어야 회사가 부도가 안 나는데, 오늘 여기 와서 법문 들으라고 하면, "나는 지금 그 법문 들을 여가가 없다. 내가 지금 돈 1억을 못 구해 놓으면 부도가 나는 판인데, 내가 한가하게 가서 법문 들을 여가가 어디 있나?"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리 인생이 사는 데, 뭔가를 잘못 이해를 하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풍요롭고, 자기 자신과 가정이 편한 것이 가장 중요한 거잖아요? 편하지 못하면 불편한 거 아닙니까? 불편하면 괴로운 거고, 괴로우면 그것이 불행한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편할까? 이 몸뚱이 하나 편하게 해 보겠다고 갖은 연구를 다 하지 않습니까? 물질도 많이 발전시키고 여러 각도로 많은 걸 우리가 연구를 해서 좋은 걸 만들어 내고 하는데, 그리 해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괴로운 것은 해결이 안 됩니다.
결국 어떻게 해야 우리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느냐 이게 문제인데, 그 방법을 우리 중생들은 다른 방향으로 추구하다 보니까, 일생을 한 번도 편안하게 안착이 안 되어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이 가정에 화합이 안 되고, 친척지간에도 화합이 안 되고, 또 자기 자신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괴로운, 일체의 모든 불행한 요소가 어디서 나오는지 그걸 잘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물건인지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를 확실히 알아버리면 그 사람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우리는 무수겁을 내려오며 세상살이를 살면서 본래 깨끗한 내 진면목을 보는 공부는 안 하고 세상살이만 익혀온 것입니다. 세상살이를 아주 진하게 익혀서 그것을 영화 촬영하듯이 모두 촬영해 8식(識) 가운데다 차곡차곡 저장해 놓았습니다. 자기가 많이 저장해 놓은 줄도 잘 모릅니다. 많이 저장해 놓은 그것이 음지가 돼 깨끗한 밝은 빛을 막고 있습니다.
핸드폰도 안에 너무 많이 저장시켜 놓으면 빨리 작동이 안 되고, 그걸 비워야 빨리 작동이 되듯이 우리 인간도 똑같습니다. 내 안의 팔식(八識) 속에 이 세상 살아오면서 모든 생활한 걸 촬영해서 저장해 놓은 게 꽉 차 있어서 우리의 본심을 쓸려고 해 쓸 수가 없어요. 그 기운이 꽉 차 있어서 밖으로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화합도 잘 안 되지요. 서로 간에 눈만 끄떡해도 잘 통해야 되는데, 안 통해져요.
“이거 해야 되지 않나”, “저거 해야 되지 않나”, “어찌 해야지”, 이런 말을 해야 되고, 그것도 상대방이 얼른 말을 들어줘서 화합이 되면 되는데, 듣는 쪽에서 그 말을 안 들어요. 말하는 것조차도 싫어해요. 거기서부터 서로 싫어하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져요. 또, “내가 이렇게 하자고 하는데 왜 안 하느냐?” 요구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또, "니가 뭔데 그걸 자꾸 나보고 하라 하느냐?"
부부 간에도 갈등이 생기고, 부모 자식 간에도 갈등이 생기고, 친척 간에도 갈등이 생기고, 이웃끼리 갈등이 생겨서 싸움 하는데, 기업하는 분이나 정치하는 분이나 학자나 노무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마음이 하나로 통해져서 잘 맞으면 시비가 있을 필요도 없고, 서로 언짢고 괴로울 일, 불안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해지고, 하는 일이 안 되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고 하는 모든 일체사가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무한한 것을 촬영해서 마음 가운데 저장해 놓은 것이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걸 비우게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라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은 중생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중생심을 죽여서 본래 무한대한 막힘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사는 사람은 어딜 가도 화합이 되고, 어딜 가도 사람들한테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고, 모든 사람한테 절대 나쁜 걸 주지 않습니다. 좋은 기운을 항상 줍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영원히 좋은 나날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에 담아두고 비우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갈등이 생기고 불협화음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이 되다가 안 되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별별 희한한 일이 이 지구상에 마구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많이 보지 않습니까? 이러한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우리들이 마음에 무한한 중생심을 가지고 자꾸 쌓아 놓은 것 때문입니다.
쌓아 놓은 이걸 죽이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갑자기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 신선의 비방약을 한 알만 먹이면 그냥 씻은 듯이 병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우리 중생들이 중생심에 쌓은 업이 장벽이 돼서 막혀 있는데, 그 장벽을 무너뜨려서 죽여주는 비방약이 바로 ‘이뭣고’입니다.
앉아서 해보면, 안 할 때는 모르는데, 수도 없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무한하게 오랜 세월 동안 촬영해서 저장해놨기 때문입니다. 극장에 가면 광선이 나가야 영화 필름이 돌아가지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조그만 반딧불 만합니다. 그게 화두를 해서 조용히 일념이 되면 의식의 빛(識光)이 쫙 나오면서 그 빛에 의해서 지나간 세월 동안 저장해 놓은 것이 영화 상영하듯이 돌아갑니다. 그거 돌아가는 거 보고 앉아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겁니다.
그때 자기가, '내가 여기에 끄달려서 이 저장해 놓은 망상 때문에 모든 게 안 되는구나' 이걸 빨리 알아차려야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게 좋아서 이거 끝나면 또 다른 거 하고, 그거 끝나면 또 다른 거 하고, 계속 나오는 대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걸 즐기면서 본 것을 또 바로 촬영해서 저장해 놓게 됩니다. 그게 업이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중생심에 쌓아 놓은 것이 모조리 없어져서 깨끗하게 비워져야 되는데, 그 비워내는 비방이 바로 '이뭣고’ 화두입니다.
'이뭣고?' 하고 지극히 일념으로 모아서 들어가다 보면 그 일념에 의해서 망상이 영화 상영하듯이 돌아가는데, 그걸 보고 좋아하면 안 되고, 그건 관계하지 말아야 됩니다. 한번 영화 상영이 끝나면 그만이듯, 지나가면 그게 없어집니다.
화두 일념이 용광로와 같아서 ‘나는 무엇일까’ 하고 지극히 일념으로 나를 돌이켜보고 생각해서 의심해 보면, 그 일념에 의해서 무량겁으로 쌓아온 것이 다 녹아버립니다. 번갯불이 번쩍하듯이 한번 여러분의 마음에 섬광이 번쩍하면, 무량겁에 지은 업이 싹 다 소멸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모든 곳에서 초연합니다. 어떤 곳에 가도, 나한테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불행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게 다가와도 그런 게 아무 소용이 없고, 허공처럼 즉각즉각 텅텅 비워져서 물들지 않고 거기에 속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멋지게 잘 사는 도리고, 복되게 되는 거고, 그렇게 된 사람은 사업을 해도 막히고 장애가 생기는 게 없이 승승장구하고, 하는 것마다 다 잘 됩니다.
"왜 이렇게 사업이 안 될까?" 이 말 할 필요도 없고, 정치하는 사람이 "왜 이리 정치하기가 어려워?" 이 말 안 합니다. 정치하는 게 어려울 게 없고 쉽습니다.
"왜 이렇게 어려워?“, "왜 이렇게 화합이 안 돼?" 이러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나의 주장자가 해와 달을 뚫고 지나가니
과거 현재 미래가 텅 비어져서 우주 천하를 광명이 덮고 있더라.
그렇게 되는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세가 필요 없고, 을미년이 필요 없고, 병신년이 필요 없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래서 그 사람은 매일매일 즐겁고 편안하고 하는 일이 걸림이 없고 다 잘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서 사업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예술가가 돼야 되고, 그런 사람이 종교인이 돼야 이 사회는 그야말로 풍요롭고 맑고 안정된 즐거움이 매일매일 넘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방법이 그것 뿐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그거만 알아내세요.
여러분이 그걸 등지고 사회생활 아무리 해봐도, 별놈의 짓을 다 해봐야 맨날 엎어졌다 자빠졌다가, 엎어졌다 자빠졌다 그럽니다. 그거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 이 공부를 놓치지 않고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부인에게도 편안함을 주고, 부인은 남편에게 편안함을 주고, 자식에게 편안함을 주고, 자식은 간섭하지 아니해도 스스로 다 알아서 합니다.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에게 도가 무엇이냐 물으니, “평상심이 도”라고 했는데, 평상심이 참 중요합니다. 이뭣고 화두를 하다가 길에서 돌에 걸려 넘어지려고 하면 "아이고 엄마야!"하는 소리는 빨리 나오는데, "이뭣고!" 이건 안 나온답니다. 그게 평상심이 안 돼 있는 것입니다.
欲識平常道(욕식평상도) 天然任自然(천연임자연)
行船宜舉棹(행선의거도) 走馬即加鞭(주마즉가편)
若遇飢來飯(약우기래반) 還應困即眠(환응공즉면)
盡從緣所得(진종연소득) 所得亦非緣(소득역비연)
평상의 도를 알고자 한다면, 천연히 자연에 맡기라.
배가 갈 때엔 돛을 올리고, 말을 달릴 때 채찍을 내리치라.
시장기가 들거든 밥을 먹고, 피곤하거든 잠을 자라.
모두가 반연 따라 얻는 것이나, 얻어지는 것 또한 인연이 아니다.
이런 말이 살아있는 소리라. 여러분이 이 세상 살아가면서 걸림 없이 멋지게, 자기도 그렇고 많은 사람에게 매일매일 기쁘고 즐겁고 편안함을 주고 사는 게 여기 있어요. 이렇게 살아야 살맛이 난다는 건데, 이런 사람이 하는 일은 안 될 게 없다는 것입니다. 다. 마음만 먹으면 척척 된다는 겁니다. 그게 여의주(如意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뭔가를 아는 공부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촬영해서 저장해 놓은 걸 없애 치우는 걸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한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서 육바라밀행을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된 사람은 부처님의 품안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님 품안에서 못 벗어나고 있어요. 맨날 ‘부처님! 부처님! 주세요! 주세요!’ 하며 종노릇하고 살 것입니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無)"하니까 그만 꼼짝 못하고 '아이고 나는 뭔지 모르겠는데' 하고 조사 스님 품안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오늘까지도 '무~'하면서 앉아 있는 사람이 있고, '이뭣고?' 하면서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품안에서 벗어나서 살아야 됩니다. 맨날 구차스럽게 살지 말고 벗어나서 멋지게 살아보자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걸 바라고 있고 조사스님들도 그걸 바라고 있습니다.
“나를 밟고 딛고 일어서라! 나한테 맨날 구속되어 살지 말고 벗어나서 딛고 일어서라!”
오늘 여기 오신 여러분은 뭐가 잘 사는 길인지, 당장 죽음이 닥쳐왔을 때 그 길을 면할 수 있는 묘결이 뭔지 오늘 배웠지요?
‘이뭣고?’ 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염라대왕이 그걸 못 봅니다. 저승사자도 못 보고 잡아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옴마니반메훔을 하면 그거는 압니다. 염라대왕한테 잡혀가면, "너는 옴마니반메훔 했구나?" "너는 아미타불을 불렀구나?" "너는 관세음보살 불렀네?" "너는 금강경 독경했구나? 참 잘했다. 뭘 해줄까?"
그런데, 이뭣고를 하면 염라대왕이 못 봅니다. 염라대왕 영역권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삽시다.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 사는 것이지, 그래 안 되면 안 됩니다.
牛頭沒馬頭回(우두몰마두회)
曹溪鏡裏絶塵埃(조계경리절진애)
打鼓看來君不見(타고간래군불견)
百花春至爲誰開(백화춘지위수개)
소머리가 없어지고 말머리가 돌아오고
조계의 거울 속에는 티끌 하나 없네
북을 쳐서 보려고 와도 그대는 보지 못하네
온갖 꽃이 봄에 이르러 누굴 위해 피었는가
여러분이 '나는 무엇인고' 이걸 공부를 해서 알게 되면 이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8만 4천 선신 신장님한테 ‘도와주소서! 도와주소서!' 했는데, 그 영역권에서 벗어나고, 부처님과 조사의 영역권에서 벗어나고, 신이니 뭐니 하는 것도 일체 벗어나서, 초연하게 정말 멋지게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불교TV 대원스님 초청법어 2016. 01.10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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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 원문보기 글쓴이: 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