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을 마치고 왔습니다. 여행과 관하여 있었던 즐거운 이야기들은 이따 밥을 먹으며 찬찬히 하기로 하고요. 한 가지만 말씀 드리면, 목요일 저녁에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시차적응에 완벽히 실패하여서 해가 떠 있을 때는 헤롱헤롱하고 해가 지면 그제야 말똥말똥해집니다. 그 말은 즉, 지금 너무 졸립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사히 예배를 마치고 이따 우리 이율님의 연주회도 가야하는데 거기 가서 괜히 꾸벅꾸벅 졸다 오지 않을까 걱정이 큽니다. 여하 간에 배려해주시고 또 축하해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믿음, 눈이 없는 날에 하는 눈싸움>
오늘 우리가 나누어 읽은 본문은 마가복음이었습니다. 동일한 장면을 마태와 누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장면들은 이런 식으로 같은 사건이 겹쳐 기록되기도 하였습니다. 기록한 사람의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서술되어 있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자기네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그들 앞에서 했던 설교의 내용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동네사람들의 반응이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식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카메라를 상상해보시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이 풀샷을 잡고 있는 ‘1번 카메라’라고 한다면 예수의 클로즈업 샷을 잡고 있는 누가복음이 ‘2번 카메라’이고, 회중들의 반응을 인서트로 담고 있는 마태복음이 ‘3번 카메라’인 것이지요. 어떤 카메라가 더 좋은 카메라인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화각을 가지고 그 장면을 담고 있다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저는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중간 중간 마태와 누가복음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사렛에 도착합니다. 나사렛이 예수의 고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마 예수를 기다리며 모인 회중들은 예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었을 겁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의 성장과정을 꽤나 자세히 알고 있다 자부하는 어른들, 그러니까 술만 마셨다고 하면, “왜 그 옆 동네에서 이름 꽤나 날린다는 걔 있잖아”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들먹였을 사람들, “야 너가 걔에 대해서 뭘 알아, 걔는 내가 업어 키웠어”라고 없던 추억도 만들었을 사람들도 몇몇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가 밖에서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었어도 마을 사람들 눈에 예수는 열 두 살 소년의 모습이었겠지요. 예수도 아마 그런 상황을 짐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였을까요? 자랑스러움? 기대? 호기심? 어쩌면 의심이지 않았을까요? 시기? 질투? 그런 것들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수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제가 예수라면, 꽤 복잡한 마음으로 나사렛으로 향했을 것 같습니다. 내 어린시절, 그러니까 내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 서서 나의 앞으로를 설명해야할 것만 같은, 설득해야할 것만 같은 이상한 책임감이 있었을 것 같거든요. 예수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합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바 예수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랐지요.
이 장면을 마태는 이렇게 그립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지혜를 얻었을까?” 그리고 옆에 사람이 또 말은 얹습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그의 아우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가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이 대사에 대한 첨언이 조금 필요한데요. 예수의 부모로 요셉이 아닌 마리아가 언급된 것은 사실 이 시대상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수 많은 족보들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여기의 여성의 이름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겠지요. 예수의 자매형제들을 언급하는 그 뒤에 문장을 보더라도 예수의 남동생들은 그 이름이 자세히 나와 있지만 그의 누이들은 그저 그의 누이라고만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건 이 시대상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헌데 예수는 왜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이건 예수를 향한 욕이었습니다. 예수의 아버지가 요셉이 아닐 것이라는 노골적인 표현이었지요. “애비도 없는 자식이 꼴값은”이 정도의 발언이었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예수는 이 모욕 앞에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법이 없다”는 로마사회의 격언으로 답을 합니다.
예수는 나사렛에 오기 전,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회당장의 죽은 딸을 되살리셨죠. 그 밖에 여러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헌데 나사렛에서는 아무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말 합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이 삔또가 상하셨던 걸까요.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https://youtu.be/mhrySe6JlcA?si=2G6k3Y9YEe7J1z1j)
영화의 주인공인 앙뚜는 전생에 티베트 캄 사원에서 살았던 수도승의 기억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여섯 살이 되던 해 라다크 불교협회로부터 ‘린포체’로 인정받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할 만큼 ‘린포체’는 티베트 불가에서 특별한 존재이지만, 앙뚜는 날아오는 공을 무서워하고, 자신의 작은 키를 부끄러워하고, 친구와 눈싸움 하기를 좋아하고, 사탕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런 앙뚜 곁에는 이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인 우르갼이 있습니다. 그는 앙뚜를 돕는 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말하는 노승입니다. 그는 앙뚜와 함께 있습니다. 앙뚜를 입히고, 먹이고, 앙뚜를 가르치고, 앙뚜를 씻기고, 앙뚜를 재우고, 앙뚜와 함께 걷습니다. 그리고, 그는 앙뚜를 믿습니다. 린포체인 앙뚜를 믿고, 또 앙뚜 그 자체인 앙뚜를 믿습니다.
앙뚜와 우르갼의 관계가 잘 드러나는 영화 속 장면을 한번 보여드릴게요. (23:27-25:57) 눈싸움을 하는 앙뚜와 우르갼은 서로의 친구이기도 하고, 앙뚜를 입히고 먹이는 우르갼은 앙뚜의 부모이기도 하고, 이 영상 속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앙뚜에게 불경을 가르치는 우르갼은 앙뚜의 스승님이기도 합니다. 앙뚜에게 더 없이 소중한 존재이지요. 그런 앙뚜에게 우르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앙뚜를 가짜라고 말하는 옆집 할아버지도 있습니다. 그 장면 역시 보여드릴게요. (33:50-35:25)
“옆집 할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말했어요” 앙뚜가 우르갼에게 말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저는 이 말 앞에서 멈칫하게 되었습니다. 옆집 할아버지가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앙뚜는 두려움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를 의심하는 저 사람이 제 정신이라는 사실은 무서운 법입니다. 그가 맞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 사람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 생각이 나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다릅니다.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저는 그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잠깐 예수의 이야기로 돌아 가보려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예수를 그 전부터 잘 알았던 이웃사람들이라면, 예수 역시 그들을 그 전부터 잘 알았을 것입니다. 나와 같은 곳에서 나고 자란 나의 이웃들, 동네 삼촌, 옆집 아주머니, 뒷집 형, 나를 유독 이뻐해주시던 건너편 할머니.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겁니다. 그 순간, 예수는 어땠을까요? 예수는 그들이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그들이 지금 잠깐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맨 정신에 멀쩡히 나를 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예수가 더 잘 알았을 겁니다. 예수는 그 순간 힘이 빠지지 않았을까요?
그 때 예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힘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믿음, 또 예수 자신이 자신을 향해 품은 믿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예수를 나사렛에 주저 앉게 두지 않았습니다.
영화로 돌아가, 영화의 마지막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앙뚜는 우르갼과 함께 앙뚜의 전생 속 사원이 있다고 하는 티베트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앙뚜는 자신의 사원을 찾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사원에서 가르침과 돌봄을 받게 되고 우르갼과 헤어지게 됩니다. 그 헤어짐의 순간을 보여드릴게요. (1:29:04-
“린포체, 저는 믿어요” 하는 우르갼의 말을 듣고, 예수가 말했던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불경하게도 그 말은 “너의 믿음이 나를 구원했다”는 말이었구나 하는 생각까지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서로를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예수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 앞에서 아무 기적도 행할 수 없었다 말했던 것은 정말이지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어떤 기적을 행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속임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나사렛에서는 기적이 없었습니다.
눈싸움을 하는 앙뚜와 우르갼을 보십시오. 흙이 눈으로 바뀌는 기적을 보십시오. 나사렛에서 없었던 기적이 우르갼과 앙뚜에게는 있습니다. 그들은 풀이 푸릇한 흙바닥에서 서로에게 흙을 뿌리며 눈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앙뚜에게 가짜 린포체라고 소리 질렀던 이웃집 할아버지 눈에는 무엇으로 보일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기적을 보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나사렛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 기적을 볼 수 있었을까요? 내 편협한 생각에 기적을 보고도 기적인줄 모르는 삶을 살지 맙시다. 앙뚜와 우르갼처럼 그 순간만 즐길 수 있는 눈싸움을 놓치고 살지 맙시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줄 믿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