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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장벽 넘어 땅끝으로
사도행전 2:1-21
유월절(부활절)에서 오순절(성령강림절)로
일곱 번의 부활절을 지나고, 교회는 성령강림절에 다다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가르치시다가 승천하신 후, 열흘이 더 지나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였다는 누가-사도행전 시간표에 따라, 교회는 부활절 첫 주일로부터 오십일이 되는 여덟 번째 주일을 성령강림절로 정하여 지킵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유대 명절인 유월절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신 출애굽 사건에서 유래한 명절인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놓이기에 유월절보다 적합한 때는 없습니다.
유월절로부터 오십 일 후에 오는 까닭에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명절은, 농경사회의 전통으로는 첫 수확에 맞추어 감사하는 절기이지만, 출애굽 전통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수여하심을 기념하는 취지가 덧붙여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율법을 수여 받는 때로서의 오순절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제자들이 성령을 수여 받는 성령강림의 시간적 배경이 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뛰어난 이야기꾼이자 신학자인 누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유월절 사건으로, 성령강림사건을 오순절 사건으로 각각 배치합니다. 이런 유월절과 오순절 구도에서, 부활과 성령강림은 구원과 계시의 원형으로 각각 자리매김이 됩니다. 또한 이 구도는 구약성서의 구원사를 재현하는 정통성을 지니면서, 해석적 지평을 넓히고 깊이를 품게 됩니다.
오순절에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1절)
“그들”이 누구인지는 1장에서 언급됩니다. 죽은 가룟 유다 대신에 보선된 맛디아(1:26)를 포함한 열두 사도(1:13)와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여자들(1:14)인데, 백이십 명(1:15)에 이른다고 알려집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5)는 약속을 하셨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1:4)고 명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약속대로 죽으신 곳이요, 부활하신 곳입니다. 또한 약속된 성령이 도래할 곳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고”(1:14절) 있었습니다.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유대인의 삼대 명절에 하나인 오순절에는 모든 유대인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팔레스틴에 사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소아시아, 아프리카, 메소포타미아, 로마 등 먼 이국에 디아스포라로 사는 유대인들(나그네 유대인)이 속속들이 모입니다(9-10).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 10)도 명절에 맞추어 순례를 옵니다. 얼마나 멀고 다양한 국외 지역에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는지, 9-11절에 걸쳐 상세히 알려집니다.
홀연히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가득했다 (2절)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설명하는 첫 번째 이미지는 바람입니다. 이 바람의 특성은 홀연하고, 급하고, 강하며,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람은 가장 신비로우면서 두려운 현상이었습니다. 신비로운 이유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소리로 인식), 바람이 부는 때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 기인합니다. 홀연하다는 수식어가 이를 묘사합니다.
바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제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상할 수 없이 불어온 강풍은 집을 날려 보내고 나무를 꺾으며 배를 뒤집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막을 도리도, 피할 방법도 없습니다. 순식간에 바람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넙니다. 급하고 강하며 가득하다는 표현들은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바람의 특질을 나타냅니다.
알 수 없음과 통제할 수 없음이라는 두 특성으로 인해, 고대 세계는 바람을 신(神)의 조화(造化)로 간주했습니다. 하나님의 등장에 바람이 동반되고, 성령이 바람으로 비유되는 이유입니다(겔37; 요3:8).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바람으로 알려지는 것은, 성령의 임재는 사람이 예측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후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성령 임재의 순간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기존의 틀과 장벽들을 허물며 내달아 갑니다. 가장 먼저, 무리 사이에 소동을 일으키고(6절), 신기하게 하고(7절), 놀라며 당황하게 하는(12절) 오순절 성령강림이 그 첫 단추입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며 나타나다 (3절)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의 두 번째 이미지는 “불의 혀”입니다.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공동번역)는 다른 역본 성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성령은 불이 아니라 “혀”입니다. 불이 혓바닥처럼 갈라지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불처럼 갈라지는 혀가 성령으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그 혀는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났고, 그들 각 사람 위에 임했으므로, 이 혀가 바로 성령이었다는 얘깁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내려왔다고 성서는 말합니다(눅3:21-22; 막1:9-11; 마3:16-17). 그때도 성령은 보이는 형상으로 임했는데, 그 형상은 비둘기였습니다. 예수의 세례 때와 오순절 때에 강림한 성령의 형상이 각각 다르다는 것은, 성령이 하나의 형상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예수께 임한 성령이 비둘기와 같은 이유는, 그 성령을 받은 예수는 복음(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분(눅4:14-19)이기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노아 홍수 때 에 ‘심판이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배 안의 사람들에게 알게 해준 새였기에(창8:8-12), 복음을 전하실 예수께 임하는 성령은 비둘기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이 “혀”와 같았다는 것은, 이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다른 언어(방언)”로 말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직결됩니다(4절). 실제로 “혀”에 해당하는 명사인 “tongue(glossa)”은 “방언”이란 뜻으로도 사용됩니다(4, 6절). 널리 알려진 것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의 가장 큰 특징이 방언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를 근거로 방언이 성령 임재의 증거 혹은 최고의 영적 은사라고 오해하는 이들도 꾸준히 있었습니다(고전 13-14장).
소동하고 놀라다. “어찌 된 일인가?” (5-11절)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오순절에 많은 인파가 몰려든 예루살렘은 소동합니다. 그런데 놀라는 무리는 바람 같은 소리를 듣지도 못했고, 불같은 혀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놀라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의 방언으로 듣고 있다”는 사실로 인함입니다(8절). 그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먼 이국에서 살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입니다(10절). 유대인들의 언어(아람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그들의 입장으로 볼 때,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역의 말(방언)로 “하나님이 하신 큰일(11절)”에 대해 말하는 갈릴리 사람들(7절)을 목도하는 이 상황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곳이고, 거룩한 곳에서는 거룩한 언어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는 최초의 구약성서인 히브리 성서를 두고, 더 이상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이 없게 된 상황에서도 다른 말(방언)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되었던 이치와 같습니다. 이런 판국에, 외국에서 온 이들은 거룩한 절기인 오순절의 예루살렘에서 이방어(방언)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더구나 이들이 부정한 이방 언어로 소리 높여 말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큰일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소동이 벌어집니다. 이런 당황스럽고(12절) 조롱을 받을 만큼(13절) 금도를 넘어선 상황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리라(14-21)
이 소동과 조롱에 베드로가 답합니다.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2:28-32)을 인용하여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이 해명의 결론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구절로 귀결됩니다. 이 결론의 핵심은 “누구든지”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의인만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이들만이 아니라, 거룩한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만이 아니라, 선택된 이들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이들은 거룩한 언어가 아니라, 누구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으로 하나님이 하신 큰일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방언이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사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언어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비밀스러운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전하기 위한 소통의 도구입니다. 그러니, 나도 남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내뱉으며 황홀경에 빠지는 현상을 방언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의사소통 수단이 다른 이들 사이의 장벽을 넘어, 하나님이 하신 큰일(구원)을 증언하고 공감하는 사역의 수단이 방언인 것이지요.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오순절 상황에서, 성령 받은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은사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방언)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성령은 “불같은 혀”로 임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 땅끝까지 … 나의 증인이 된다 (행1:8)
사도행전이 전하는 예수의 대사명(大司命)은 “세상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며, 이를 위해 성령을 주신다고 특정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증언하는 것은 지당하고, 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견이나 반대가 없습니다. 하지만 “땅끝까지”라는 단서는 제자들을 매우 곤혹스럽고 힘들게 만듭니다. 세상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장벽 넘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 장벽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그 장벽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에 수천 명씩 회개시키고 신앙공동체의 참된 삶을 사는 일에는 어려움을 겪지 않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에 대한 장벽을 넘어섬에 있어서 끔찍한 내분과 진통을 겪는다는 사도행전의 스토리(6-15장)가 이를 방증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데에 필요합니다. 세상 끝까지 다다르기 위한 장벽을 넘어설 힘도 부족하거니와, 애초에 우리에겐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하지만 하늘과 땅의 장벽을 넘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장벽을 넘어 땅끝으로 가도록 이끄십니다. 한편으론 언어가 장벽이고, 때론 금기가 장벽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세계 각국 땅끝에서부터 온 사람들에게 복음이 닿게 하는 사건입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가 가장 멀다는 말처럼, 땅끝은 지리적으로 먼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장벽, 결코 넘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쌓아 올린 장벽 너머가 땅끝입니다. 보통은 내가 그 장벽일 정도로 장벽은 가까이 있기에, 대개 땅끝도 지척입니다. 그 장벽을 넘는 것이 평화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요, 성령의 뜻을 따라 성령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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