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고 있다. 내일은 또 어떨까. 이처럼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자체가 신기하게도 고맙다. 그저 그러려니 생각던 하루 24시간이었는 데 말이다. 오늘도 7호선 청담역에서 지하철이 아닌 생지옥철(生地獄鐵)의 느낌으로 오른다. 평소처럼 객(客)들이 붐비지는 않는다. 예기치 않은 코로나19의 습격이 두렵기 때문일 게다. 코로나 TAXI가 아닌 초고속열차 보다도 더 빠르게 온 동네방네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녀석이다. 치료제는 물론이며 VACCINE도 아직은 미완성이다. 달랑 마스크에 의지한 채 생(生)과 사(死)의 들판에 버려진 느낌이 아닐까. 비빌 데도 기댈 데도 없는 자신만의 전쟁일 터이다. " 다음 정류장은 마포역입니다. ~~~ " 1번출구로 오르는 계단입구에 연세한강병원이라는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2017년 11월 말에 아들이 개원한 병원 이름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항상 대견하고 뿌듯한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정형외과 중점으로 진료하는 곳으로 아들은 족부(足部) 전문의사(全門醫師)이다. 2층에는 외래진료실과 각종 검사실과 물리치료실이 있다. 3층에는 3병동과 내과진료실 그리고 구내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5층으로 오르면 5병동과 수술실 그리고 약제실이 한켠에 차지하고 있다. " 아빠 ! 별일 없으시죠," 수술을 끝내고 나오면서 약제실(藥濟室)에 들르며 아들이 하는 말이다. 일주일에 토요일 빼고 5일은 오전 아니면 오후에 수술을 하고 있다. " 최원장님이 직원들 먹여 살리느라 제일 힘들거예요 " 간호부장이 가끔하는 말이 마음 한켠에 걸린다. 환자가 없어도 많아도 마음 고생은 같을 것이다. 힘들고 바빠도 환자로 붐비는 시간이 어쩜 더 즐겁고 보람있는 나날이 아닐까.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까. 매일 거의 같은 증상과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대하며 진료하고 수술을 해야하니 말이다. 힘들다는 말 한마디도 표정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천생의 직업으로 피할 수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약사(藥師)인 애비는 그저 환자들의 퇴원약을 조제하고 마약을 비롯한 의약품을 관리하여 진료에 차질이 없도록 조용히 도와주고 지켜볼 따름이다. 2년 몇개월이 흘렀지만 휴가를 하루도 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필히 자신의 휴가일을 챙기리라 생각을 하고 있다. 아내와 세계 곳곳을 함께 여행을 하리라 다짐도 한다. 하지만 1월부터 시작된 "신종 CORONA VIRUS 19"의 유행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가 초비상 상황이다. 오늘 현재로는 감염확진자가 중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다. 이태리 독일 스페인 영국 일본 이란등도 뒤를 이어 맹렬히 확대되고 있는 형국이다. 요즘의 하루 하루는 여행은 커녕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 약사님 ! 이것 좀 드세요 " 5병동 수(首)간호사가 피자 두 쪽과 콜라 한컵을 양손에 나눠 들고 약제실로 들어선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간호사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곤 한다. 자신의 아버지로 아니면 시아버지를 모시듯 하는 느낌도 든다. 점심도 거르고 있는 약사이기 전에 노인네가 가엾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3층에 직원들의 구내(構內) 식당이 있으나 지금껏 딱 두번 식사를 했다. 개원 초기에 수간호사의 재촉으로 한번 그리고 작년 삼복(三伏)인 어느 날에 간호부장의 전갈을 받고 삼계탕을 먹은 것이다. 아침식사는 아홉시 삼십분 즈음에 먹고 느즈막하게 출근을 하니 점심시간은 생각이 없는 노릇이다. 우유와 요구르트 500ml에 미숫가루를 반컵 넣어 영양바와 견과류등으로 점심을 대신하곤 한다. 저녁 여섯시에는 다시 전철에 올라 퇴근길에 나선다. 저녁 여섯시 퇴근시간에는 언제나 전철은 만원으로 좌석은 언감생심이다. 출퇴근에 지친 직장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고생하는 모습이 안스럽기도 하다. 우리 젊은 시절의 어른들에 대한 자리 양보는 생각지도 바라지도 못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내 아들 딸 며느리 사위와 비슷한 삼사십대 젊은이들이 대부분으로 노객(老客)은 거의 유일하다. 팔십의 나이를 바로 눈 앞에 둔 노객이 이렇게 젊은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출퇴근을 할 줄이야. 주마등처럼 삼사십대 삶의 과정이 저들과 겹치고 있다. 꿈에도 상상도 아니한 오늘의 모습이 아닌가. 2017년 10월에 40여년 약국을 경영한 세월을 접고 인생 황혼기를 여유를 가지려 하던 때이다. " 아빠는 앞으로 내 병원에 나오시면 좋겠어요 " 갑작스런 아들의 한 마디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지하철이 아닌 생지옥철을 오르내리는 오늘도 그저 하루가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