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
뿌리 없이 서있는 잎새처럼 세상은 시들했다
불거진 나무들도
새살을 감추느라 한껏 구부려졌다
나는 그가 흩어진 자리에 성호를 그었다
학비를 버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는 늘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과도한 정신의 혹사는 육체의 시듬 임을 몰랐던 우리는
털털거리는 버스안에서
볼펜 자루와 맞바꾼 그의 자존심이
입술위에 허연 버께로 남던 것만 기억한다
동전 몇 닢과 교환한 얼굴의 두께를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며
빳빳한 카라 깃을 목까지 잡아당겨
다음 차를 기다리고 섰는 그를
나는 버스 정류장 미니 수퍼 앞에서
딱 한번 보고 말았다
오빠만은 공부를 해야 한다 믿었던
어린 누이들이
고무공장으로 건빵 공장으로 흩어질 때
굴뚝을 솟아오른 검은 연기에
나날이 말라가는 그의 잎맥을 우리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 별을 심어놓고
어서 북극성처럼 반짝이기를 기다렸다
목을 곧추 세워 뛰기만 했던 그는
서른 문턱에서 스러졌다
빗물에 씻긴 산비탈은 싱싱하다.
난 말없이 그 길을 걸어 내려왔다
노을 속에
붉은 물방울이 대롱
꽃의 하부
젖어있던 몸 아래에서 마른 풀 냄새가
올라오는 저녁
길고 구불한 그 속에 무슨 일이 있었나
부어오른 관절들끼리는 서로
슬픔이나 쓰라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젖어야하는 이유 말고는 아는 게 없다
안구 건조증의 눈까풀은
너무 많은 풍경을 담고 있어
산동네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면 늘 부딪치는
회색빛 이끼들.
얇은 유리미닫이와
시멘트 골목이 한 경계를 이루고
문 열면 부엌, 문 열면 안방이던 집은 사철
푸른 물이끼가 자라나고
현관 바깥 골목까지 튕겨 나온 신발들과
머리카락이 삐죽삐죽한 아이들이
나선형 이발소 간판아래서 막대기로
시궁창을 찔러대곤 했다.
꽃 대궁의 아래위는 언제나
막힘없는 길이어야 한다,
꽃이 피는 이유
오뉴월 한 갈피 넘기면 능소화 피어나고
비가 갠 하늘에 노을꽃이 피어나고
지줏대 마른 등걸에 꽃구름이 피어나고
단단한 등뼈 하나의 소망을 심어 올려
허방을 딛고 서서 발톱도 키웠지만
제 안을 파고든 뿌리,생채기로 키가 커서
혼자서는 닿지 못할 아뜩한 높이라도
내 몸속 풍차처럼 감고 또 풀어지는
그것이 꽃피운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네
흔들의자
절뚝이며 너무 오래 걸었나 보다
발바닥 마디마디 시퍼런 멍이 들고
접혔던 기억 하나가 도드라져 일어선다
맨 처음 떠나온 게 오지의 숲이었나
구절초 오만하게 꽃잎 터트리는 날
불 지른 한 생의 끝에 달랑 남은 뿌리 하나
상처를 긁어내던 벼린 손 벼린 칼끝
무늬를 맞추면서 빗금을 궁글리며
비로소 완성에 이른 환한 창가에 섰다
낮게 흔들리다 부드러워지는 시간
내 안의 하얀 그늘이 고요처럼 깊어지고
지상의 한 모서리가 이명 같이 멀다
수덕사에서
쇠락한 단청빛은 햇살아래 더욱 곱고 저혼자 흔들리던 풍경소리
이우는 날 대들보 金龍 佛畵는 비늘 되어 내린다.
이 세상 버거운 짐 돌담 아래 벗어놓고 가슴 속 넘쳐나는
탐욕도 내려놓고 아득한 백 팔 계단을 타박타박 오른다.
육신은 뒤에 두고 마음 먼저 닿으니 견승암 푸른이마
솔바람에 젖어 있고 먼저 와 엎드린 고요, 누리에 가득하다.
거꾸로 흐르는 강
안개속에서는 모두가 뒤로 흘러간다
지하철을 타고 끝까지 가보기로 한 날
반대 편 차창 속 나와 마주한 나를 본다 낯익은,
지나간 뒤로도 잊어본 적 없는 얼굴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를 낳고
핏덩이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설때
발등을 적셔오던 더운 눈물의 의미를
너의 눈망울은 모르듯이, 하염없는
너의 시선에 매달린 나는
줄타는 그림 속 무용수처럼 더 이상
높이 오르거나
내려오지 못한 채 허공에 고정되어
푸른 이내가 이따끔씩 흐르는
저 건너를
숨죽여 내다볼 뿐이다
내 신발굽은 언제나 앞으로 굽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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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시조부문)을 수상하며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