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본문은 세 가지 장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잠깐 쉬어라(31절)
첫 번째 장면은 예수가 여러 마을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외딴 곳으로 가서 쉬라고 하는 장면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을 묵상하며 첫 번째 장면에서부터 갸우뚱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제자들은 파송 받아 여러 마을에 흩어졌던 이들입니다. 이들이 다시 예수님 앞으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보냄을 받았던 제자들은 보내고 땡이 아니었나 봅니다. 저는 ‘파송’이라고 하면 ‘하산’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살펴보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주기적으로 다시 모이라 하셨나 봅니다.
예수님은 왜 모이라고 하셨을까요? 숙제검사라도 하실 모양이었던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숙제검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절주절 자신들이 행한 것과 자신이 회중들에게 가르친 것을 보고하는데 예수님은 잘했다, 못했다,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그저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일까요?
제자들이 행하고 가르칠 줄은 알았지만 쉴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31절 끝에 보면, 지금 몰려든 사람이 많아서 음식 먹을 겨를도 없다고 하지요. 제자들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특히나 일을 처음 맡아 하다보면 힘을 어떻게 분배해야하는지 조차 잘 모르기 마련입니다. 처음이라서 낯선 일인데, 또 잘 하고 싶으니까 힘이 더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힘을 잔뜩 주고 일을 하다보면 탈이 나기 마련이죠. 끝까지 가지 못하고 맥이 풀려버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오래 할 수 없습니다. 마라톤 선수는 100m를 뛰는 사람처럼 뛰지 않습니다. 40km를 넘게 가야 하니까요. 마라톤 선수가 뛰는 방법은 자신의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끝까지 뛸 수 있을 만큼의 속도로 달리는 거죠. 하지만 이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어느 페이스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처음 달려본 사람은 결코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페이스메이커, 먼저 그 거리를 달려본 사람과 함께 뛰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의 페이스 메이커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쉼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바란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또 열심히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끝까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3절)
두 번째 장면은 사람들이 쉬기 위해 떠난 예수와 제자들을 쫓아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한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와 제자들을 쉬게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사람들을 피해 부러 한적한 곳을 찾았는데 웬걸, 사람들은 그 곳이 어딘지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도착해서 예수와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우리는 예수와 제자들이 밥 한 끼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애쓰며 일하다가 이제 잠깐 숨을 돌리려 했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그래서 모여든 사람들이 염치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함부로 이들에게 염치없다 말을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염치없이 굴어본 적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저는 새벽 3시에 술에 잔뜩 취해서 울면서 선배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습니다. 전화를 걸어서 다짜고짜 “나 너무 힘들어.” 라고 이야기해 본 적이 있어요. 이십대 초반의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적이 있었다는 것이에요.
선배는 술에 취한 제게 이렇게 말을 했죠. 유미야, 그러면 일을 조금 줄여. 아르바이트를 관두든가, 단체 일을 관두든지, 교회 일을 관두든가, 하다못해 학교 땡땡이라도 쳐. 우선순위를 정해서 뭐라도 줄여봐. 그러면 제가 막 더 울면서 말하는 거예요. 뭘 줄여. 다 중요한데. 아르바이트를 안 하면 돈이 없고 단체 일은 내가 관두면 당장 할 사람이 없고, 교회 일을 어떻게 줄여 해야 하는 일인데 학교에서 장학금 받아야 되는데 땡땡이를 어떻게 쳐. 그 때 선배가 뭐라고 했을까요? 그래, 유미야, 그러면 술이라도 줄여.
이런 식의 새벽의 만행을 이십대 중반까지도 분기별로 한 번씩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니까 아주 최근이네요. 누군가의 쉼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던 것이지요. 오늘의 이야기와 완전히 같은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또 다른 일이라고 보여지지도 않아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이 몰려든 사람들에 대해서 손가락질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날 술을 마시고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던 김유미를 저는 아직도 조금 가여워하는 편이거든요. 지금도 크게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 때에 김유미는 잘 살고 싶었는데 도통 잘 사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인지 모르겠어서 무척이나 힘에 겨웠거든요.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 처지가 어떠한 것인지. 염치가 없어보여도, 그 염치는 어째서 없는지. 왜 없을 수 밖에 없는지. 알겠으니까. 예수와 제자들의 쉼을 방해한 이들이 잘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살기 위한 몸부림을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4절)
마지막 세 번째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모인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불쌍히 여기다는 말이 시혜적인 표현으로 읽혀서 썩 마음에 드는 번역은 아닌데요. 영어 성경에서는 컴페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미권의 많은 신학자들이 이 본문을 컴(함께)/페션(고통), ‘함께 아파함’으로 읽습니다. 저는 이 해석이 조금 더 원문의 의미를 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모여든 사람들을 보시고 함께 아파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염치 없음을 두고, 예수님은 그래, 이 땅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얼마나 징글징글한가. 하는 생각을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생의 어려움을 모르시지 않으셨겠지요. 그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사람들의 자리에서 온 몸으로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가여웠습니다. 그이들과 함께 아팠습니다.
예수님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본문에서는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이 무엇이었을까, 저는 궁금해지더라고요. 여러분들은 예수께서 모인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을 것 같으신가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새벽 3시에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었던 그 무렵에 받았던 가르침이 떠올랐습니다. 박준 시인의 산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이라는 책에 나온 글인데요.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선생님도 전해들은 것 같았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독주를 각자 한 병씩 비워갈 무렵,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선생님이 말을 시작했다. “사는 게 낯설지?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선생님의 이 말은 당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삶의 장면 장면마다 불러내는 말이 되었다.
박준 시인에게 선생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제가 사는 일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으면 제 주변에 저보다 조금 더 산 사람들이 제게 해주었던 가르침도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다 해결해준다는 말은 무책임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해결해주는 것이 사실이기도 해. 엄밀히 말하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 너에게 구력이 생기는 거야. 너가 너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더 커지는 거지. 그걸 조금 믿어 봐. 믿고 불안해하는 걸 멈춰 봐.
저는 예수님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만 주셨던 것이 아니라 이런 가르침을 잊지 않고 전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너를 조금 믿어봐. 이렇게 당장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너에게 큰 일이 생기지 않아.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너는 네가 처한 상황을 해결할 힘이 있어. 할 수 있어. 그걸 조금 믿어 봐. 믿고 불안해하는 걸 멈춰 봐. 스스로 해결 못 할 일이 너에게 생기면 그 땐 내가 너를 찾아갈 거야.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어. 예수는 찾아온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그들을 달래며 가르쳐주셨습니다.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그날로 달라졌을까요?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눈 앞에 여전히 있는 삶의 어려움으로 아니면 새롭게 생긴 어려움으로 힘들었겠죠. 그렇지만 그들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순간에 자라서 새벽에 걸려온 후배의 전화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때 그들은 자신이 들었던 가르침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은 지난 날에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아주 옛날부터 진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후배에게 가르침을 전수해주겠지요.
“얘야, 너는 너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 그 힘은 점점 커다래질 거야. 너를 지킬 수 있을만큼 충분히 커질 거야. 너무 두려워 하지마. 하나님이 너를 지켜보고 계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 여러분에게 새벽 3시에 누군가 전화를 걸어 온다면, 070이 아닌 이상에야 잘 받아주세요. 여러분에게 그럴 힘이 있다면 가능한 응답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아파해주세요. 젊은 날에 내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려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전하십시오. 불안해하지 말고 또 두려워하지 말라는 가르침,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와 함께 아파한다는 가르침. 이 날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달된 가르침을 필요한 이에게 전달해주세요. 이 거듭 전해지는 가르침이 많은 이들을 살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