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박규연 옮김. 동문선 현대 신서 간
일전에 모리스 블량쇼의 저작인 《문학의 공간》과《카오스의 글쓰기》을 읽으므로써 처음으로 모리스 블랑쇼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를 통해서 모리스 블량쇼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 궁금하고, 또 다른 사람의 편에서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듣게 되면 그의 문학이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듯 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블랑쇼는 철학자가 아닌 문학적 철학을 자신의 문학세계에 반영시키는 문학자란 점에서 한 번쯤은 저자의 주장에 대하여 어떤 소리든 듣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한마디로 카오스가 연속적인 이 시대에서 그가 문학인의 시선으로 어떻게 감지해내고 있으며, 그 삶의 현장을 문학이란 본질에 투영시키고 있는가에 부분적인 또는 핵심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벗어나 신에게로 피신한다고 적힌 이븐 가비롤의 유명한 문구처럼 진리는 삶으로 향하기 위해 삶을 벗어난다. 어떻게 세계로부터 탈출할 것인가? 어떻게 -장켈레비치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부르고, 블랑쇼는 '바깥의 영원한 넘쳐흐름'이라 부른 - 타자가 시선에 포착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타자성과 외재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 다시 말해 누군가를 위해 존재할 수 - 있을 것인가? 어떻게 힘을 담보하지 않은 타자의 현현이 있을 수 있는가?"
어쩌면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모리스 블랑쇼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철학의 중심에 있는 "타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리스 블랑쇼 역시 엠마누엘 레비나스에 대하야 충분히 대답을 시도해 왔다는 측면에서 모리스 블랑쇼와 레비나스와의 관계성을 따라 가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물론 모리스 블랑쇼의 글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그의 심오함이 반드시 가치를 드러낸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한 사람의 문학적 혹은 철학적 접근의 차이일뿐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일단 한 사람의 생애가 문학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왔다면 그의 말에 한 번쯤은 귀를 기울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블랑쇼에 의하면, 작품은 진리가 아닌 발견을 통해 어떤 암흑을 발견한다. 진리가 아닌 발견! 이것이 바로 형식적 구조가 규정짓는 '내용'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블랑쇼의 특이한 방식이다. 그 어느 포착도 불가능한 외부의 절대적인 암흑, 마치 사막에서처럼 우리는 그곳에서 아무런 거쳐도 발견할 수 없다. 정주하는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유목 생활의 기억이 고개를 쳐든다.유목주의는 정주 상태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장소 없이 거주하므로 대지와의 어쩔 수 없는 관계이다. 죽음 앞에서처럼 예술이 되돌아오게 하는 어둠 앞에서 권력들의 기바인 '나'는 편력의 대지에서 익명의 '그 누구'로 소멸한다."
"블랑쇼(그 또한 적어도 명시적인 형태에서 지나친 윤리적 관심을 거부한다)가 인도하는 문학의 공간은, 예술을 거주 가능한 세계로 보는 하이데거의 세계관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 블량쇼에 의하면, 세계를 밝게 비추는 것과는 거리가 먼 예술은 세계의 기초가 되는 모든 빛이 차단된 황량한 지하의 세계를 일깨운다. 예술은 우리의 거주에, 그리고 사막에서의 오두막의 기능을 하는 우리의 건축물의 찬한함에 추방의 본질을 되돌려준다. 예술은 빛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빛은 위로부터 내려와 세계를 만들고 거주처를 구축하는 빛이다. 반면 블랑쇼에게 이 빛은 지하로부터 올라온 밤의 어두운 어두운 빛으로 세계를 해체하고, 그 세계를 기원으로, 되물이됨으로, 중얼거림으로, 끊임없이 딸각거리는 소리로, 어떤 '깊은 옛날, 아주 먼 옛날'로 인도한다. 비현실에 대한 시적 탐구란 실재의 멘 밑바닥을 탐구하는 것이다."
"블랑쇼는 분별 있는 행동을 하는 특권을 지닌 자인 어떤 언어, 샘과 하구와 흐르는 물의 밑바닥 상태에 있는 어떤 언어가 지닌 겉으로는 확인 불가능한 의도를 고발하고 있다. 분별 있는 자는 논리적인 담론을 세우기 위해서 문법에 따라 확립된 전치사들의 질서를 중요시할까? 또는 의미가 그러한 파편들 사이에서 뜻을 갖기 위해(블량쇼 문법을 준수했다). 하지만 추후의 해석을 기대하지 않은 채 언어를 폭발시키는가? 《기다림의 망각》은 문학 비평가로서의 블랑쇼가 따랐던 지고한 언어의 위엄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해석을 위한 철학적 언어를 거부한다."
"독서는 각자의 몫으로 개개인을 필요로 하는 이성의 현현이다. 그 어느 독서도 진정한 책이 지닌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수수께끼나 비밀을 흩뜨려 놓치 못한다. 그러나 각자 안에서 씌어진 것의 헤아릴 수 없는 미래의(혹은 고대의) 삶들이 작가의 의도를 포섭하는 가능한 것들 그 너머에서 싹을 내민다. 비록 마지막까지 지적인 작가가 독자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발성을 탐색하고, 영감을 받은 상태로 있기 위해 자동적일 필요는 없는 그의 글쓰기가 이미 그렇게 해서 놀란 의미의 방향을 바꿀지라도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마지막 탈출구이다. ....타인을 위해 타인 안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무관심성에 이르지 못한다. 이타주의자인 의식은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타인들을 위한 타인들 안에서의 고통, 나에게 고통을 주는 이들은 바로 타인들이다! "이 거대한 타인은 내가 원했을 법한 것 이상으로 나 자신을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리고 이는 살인의 유혹을 낳기에 이른다. 분명 "타인들의 최소한의 방해는 무한한 악이 되지만" 그러나 필요하다면 나는 단호하게 그들을 희생시키며 그들에게서 모든 행복한 감정들을 박탈한다(내가 그들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레비나스처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윤리를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마지막 말'을 캐내는 끝없는 무위의 움직임과도 같은 글쓰기 속에서 '죽어감의 수동성'을 통한 타자에로의 염림을 보았다.그리하여 6백여 페이지가 넘는 자신의 저서 《무한한 대화》(1969)를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 대한 화답의 글로 바친다.
세상 속에 자리할 수 없는 불가능성들이 존재하는 황야에서의 고독.
문학은 우리를 그러한 황야로 이끈다. 문학은 언제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한다.
- 레비나스
한참 머뭇거렸다. 마치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와 내가 소설을 쓰고 싶은 이유를 담아낸 듯한 저 문장 앞에서.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사물들을 말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존재로 하여금 메아리가 울리는 근원적인 언어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일 게다. 사물들의 존재는 작품 속에 명명된 것이 아니라 말하여지는 것이며, 말들은 사물들의 부재를 가리킨다.
- 레비나스
그렇다면 한국어 문학 중에 그런 문학이 있었던 걸까?
오늘 잠시 들른 서점에서 모리스 블랑쇼 선집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았다. 기분이 묘했다.
블랑쇼.
매혹적이면서 기묘한 고유명사이다.
침묵은 언어를 낳고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낳는다. 그리고 그 곳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심연. 그리고 어두움. 내가 꿈꾸는 언어가 있다면 밝혀지지 않은 어두움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지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