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점은 인간 본질에 놓여 있습니다. 9, 10 세에 바로 이 나이에 선하고 훌륭한 인간에 대한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생을 인도해야 할 내적 확신이 모두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맙니다(7-14세를 위한 교육 예술, 2022, 72)."
요즈음 언론에서는 20, 30대 청년들에 대한 우려가 많다. 극우로 간다거나, 또 삶에 대한 열정보다는 무기력해서 안타까운 경우 등등 어찌되었든,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이리 저리 휩쓸리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떤 경우에도 당시 자신의 삶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숱한 어려움을 헤쳐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왜 현재 이 시대의 청년들이 유독 자신의 삶을 살지 않고 이리 저리 휩쓸리는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살까'가 질문이다.
현장에서 겪은 경험이다. 당시 초등 3학년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수업 전에 아이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 늘 하던 대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사랑합니다'하고 말을 했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이면서 얼굴에 미소가 가볍게 올라온다. 그러면 수업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날 한 남자아이가 '왜 선생님이 우리를 사랑해요'라고 혼잣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순간 놀랐지만 아이 열굴을 보면서 모른 척 넘어갔다. 아이도 자신이 그런 말을 해놓고 놀란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렇게 쭈욱 해 왔는데, 갑자기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말이 아이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필자 역시 당시 슈타이너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발달상황을 이해는 하였다.
초등 3학년이면 9-10 세로 자신과 다른 존재를 파악해서 구별을 하는 시기이다. 예컨대 그 전에는 모든 존재, 선생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파악해서 선생님이 '사랑한다'고 하면 자신과 같은 존재가 사랑한다고 하므로 무리없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자신과 다른 존재를 파악하게 되면, 선생님도 자신과 다른 존재이므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당시 그 아이 몸이 또래보다 컸던 걸로 보아 발육이 빨랐던 모양이다. 학급 내 아이들 발달상황이 혼재하므로 '사랑합니다'와 같은 말은 자재했지만, 계속해서 그와 같은 활동(스트레칭과 가벼운 명상 언어)은 이어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들의 발달상황은 이해했지만, 그런 경우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슈타이너 책도 찾아보고 물을 곳도 찾아보았지만 답은 얻지 못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를 고민했지만, 그냥 시간만 보내고 말았다. 그때의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어서인지, 그 답을 슈타이너 책을 읽으면서 찾았다.
9,10세 자신과 다른 존재를 파악하는 시기에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다음은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아이가 자신과 주변 환경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우리는 다시금 더 높은 단계에서 아이가 주변 환경과 하나가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위 책, 97)." 먼저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존재를 파악하게 되면, 그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교육'으로 가르쳐줘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가 혼란스러워진다. 결과는 다른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이것이 위 문장 슈타이너가 말하는 인생을 인도해야 할 내적 확신이 모두 불안정하게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인간(훌륭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 요컨대 어떤 인간도 믿을 수가 없다면, 자신이 믿고 따르는 인간, 훌륭한 인간도 있을 수가 없다. 결과 어떤 인간도 믿지 못한다면, 삶을 살아갈 내적 확신이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믿고 따르는 스승은 자신에게는 종교와 같은 존재이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믿고 따랐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이 누구라도 누군가를 믿고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이 이리 저리 흔들리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행되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7-14세 사이 아이들은 에테르체가 탄생해서 자유로워지는 시기이다.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탄생하지 않아서 아스트랄체와 자아는 활동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아스트랄체와 자아의 활동을 누군가는 대신 해주어야 하는데 그 존재가 바로 선생님이다. 아스트랄체는 감정체로 일종의 예술적인 부분이고, 자아의 역할인 사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활동을 교사가 대신 해주는 것이다. 이런 역할을 해주는 존재를 이 시기 아이들이 믿어야 할까, 아니면 믿지 않아도 될까를 생각해 보면 '교사의 권위'가 왜 중요한지를 이해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는 상호교류한다. 이 시기에 아스트랄체 역할을 교사가 해준다면, 추후 탄생하는 아스트랄체가 발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자아의 역할을 교사가 대신 한다는 말은, 즉 교사가 어떻게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지를 아이들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교사가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 진, 선 , 미를 받아들이는 그대로를 아이들이 받아들여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사회적으로 교사에게 강한 도덕성을 요구했던 것이다. 당시 누구라도 아이들 앞에 서면 저절로 무장해제가 되었고, 사회적인 이해 관계도 있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은 많이 희석되어서 교사와 아이들간의 사랑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 교사가 하는 말도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요컨대 현재 교사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런 정신의 발달의 맥도 거의 끊어졌다. 당연히 다음의 발달단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교사의 권위가 존중되었다면, 즉 교사의 말이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질 경우 다음의 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다. 즉 다시금 더 높은 단계에서 아이가 주변 환경과 하나가 되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주변 환경에서 먼저 동물을 가르치고 이어서 식물을 가르친다. 먼저 동물이다. 동물에게는 각각의 특징이 있다. 사자의 위엄, 호랑이의 용맹, 여우의 꾀 등등이 인간에게는 통합적으로 들어있다. 그것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아이들에게 동물의 특징을 가르치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동물의 특징들을 발달시키게 된다. 동물을 배우면서 동물의 지혜, 꾀, 용맹 등등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아이들의 내부에 있는 의지가 발달하게 된다. 요즈음 청소년들의 의지가 박약하다는 것도 이와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은 식물이다. 식물은 반드시 지구와 하나가 되어서 자라는 식물을 관찰하고 공부해야 한다. 땅과 함께 자라는 식물이어야 하지 요즈음 하는 실물교육에서 뿌리채 뽑아오는 식물은 아니다. 식물에게는 지구가 인간의 몸과 같다고 한다. 식물이 땅에, 지구와 하나가 되어서 자라므로, 아이들이 그와 같은 식물을 공부하면서 아이들도 지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식물과 하나가 되면, 나아가 지구와도 하나가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될수 있는 이유는 아이들의 발달단계에서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 주변 환경을 파악하는 단계로 나아가므로, 다시 동물과 식물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동물의 지혜, 식물의 지혜를 얻게 된다. 동물의 지혜, 식물의 지혜는 곧 에테르체의 지혜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에테르체의 발달단계이기 때문이다. 에테르체는 모든 존재의 생명의 원리이다. 생명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고, 그 흐름에 동참하게 되어서, 이는 지구에서의 삶에 자신이 온전하게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가만히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발 뒤꿈치를 땅에 대지도 않고 걷는 사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요컨대 모든 일에 있어서 영혼이 그저 스치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지구에 온전히 들어오지 못하면 인생을 인도해야 할 내적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인생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다. 결과 이리 저리 휩쓸리고 만다. 예컨대 이 말을 들으면 혹하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다.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요즘처럼 인류가 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학교에서도 정신을 배제하는 교육을 받는 경우 자신의 정신을 받달시키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거의 정신이 망가지므로 자신의 재능을 발달시키지 못한다. 일종의 복제인간이나 자동인간이 되어서 사회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없다면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언제나, 어디서나, 발달하거나, 잠을 자거나, 뒤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스스로 깨어서 자신의 정신을 살펴야 한다. 누구를 간섭하지도 말고, 여유가 있다면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신세계에서는 그 상대가 곧 자신이므로 그렇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정신이 뒤로 나아가지 않는다. 요컨대 늘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이 옛 선사들이 늘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