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인터뷰>-소설가 남정현 선생
진정한 우리 시대를 찾아서
박 설 희
“한번 정정당당하게 /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김수영,「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부분)
“붙잡혀간 소설가” 남정현 선생을 쌍문동에서 뵈었다. 「분지」필화사건 당시 30대 초반이던 선생은 평생의 화두를 끌어안은 채 이제 80대가 되었다.
일본시대에 태어나 자라고 분단 이후로는 미국시대를 살아오게 되었고 우리 시대를 살아보고 싶은 소망에 글 쓰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밝히셨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무슨 시대인가요?
-지금은 우리 시대를 찾기 위한 과정이지요. 치열한 싸움의 시대. 내가 어려서 본 8․15, 4․19는 앞으로 오는 사건들은 다 내 거라는 희망, 환희로 대단했지요. 6․15 선언은 전쟁의 공포 불안 등에 시달리던 우리에게 평화적 자주적 통일을 할 수 있겠다는 신심을 준 것이고요. 이 세 사건이 내용적으로 가지고 있는 현란한 민족적 혼의 분출은 하나의 작품이지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요, 좋아서. 시인도 소설가도 그만한 희망과 감격과 감동을 주는 작품을 쓰지 못했어요. 작가로서 그게 부끄러워요. 지금까지 우리가 싸워온 것은 8․15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실현하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세력과의 싸움, 4․19도 자주민주통일을 못하게 방해하는 세력과의 싸움, 6․15도 그것을 능욕하는 세력과의 싸움이지요. 난 이러한 정신들이 우리 현실에서 꽃피우리라는 확신이 있어요. 그걸 방해하는 게 외세라고 생각해요.”
어지럼증이 있다는 걸 이미 들은 터라 인터뷰 전부터 걱정을 했는데 선생은 시종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힘 있는 눈빛이었다.
“미국이 우리 민족에게 해줄 큰 의무가 있어요.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싸워온 우리 시대의 예수들이 만든 가장 위대한 작품인 6․15 정신에 의해 우리가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과정을 협조해야 해요. 그래야 1776년 자주 독립 인권 민주 자유를 절절이 호소했던 독립선언서를 실천하는 계기가 되고, 이제까지 보여준 험상궂은 얼굴을 벗고 존경을 되찾게 될 거에요. 6․15 선언은 통일로 가는 고속도로와 같아요. 미국이 환골탈태해서 6․15 정신을 지지해서 잘 처신해주었으면 합니다. 전쟁이 나면 남북이 없어지는 거에요. 북의 실체를 알아야 해요. 그런데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실체를 모르게 하는 우민정책으로 싸우려 하면 안 되지요.”
‘미군에게 강간당한 후 실성해 숨진 어머니와 주한미군의 현지처로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는 여동생을 둔 홍만수가 미군의 아내를 성적으로 희롱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첨단무기에 포위당한다’는 내용인 「분지」를 1965년에 어떻게 발표할 수 있었는지요?
-『현대문학』에서 동인문학상 6회 수상 후 계속 써달라고 해서 줬는데 내 작품을 보지도 않고 실었어요. 사건이 나니까 조연현 주간이 그 다음호 후기에 앞으로 남정현의 작품은 우리 잡지에 절대 싣지 않겠다고 했는데 오륙년 전에 『현대문학』에 이천년대 비평가들 평과 함께 「분지」가 다시 실렸어요.(웃음)
「분지」, 「부주전상서」 등 작품 곳곳에 오물, 똥, 병균, 박테리아 등 배설물과 균에 관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요?
-오물은 추하고 더러운 것이지요. 나는 약육강식에 기초한 문명을 더럽게 보고 있고 그 우두머리가 미국이에요. 언젠가는 그 문명의 틀에서 벗어난 시간이 도래하겠지요, 인간의 염원이니까. 우리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같은 것은 서양엔 없어요. 인본사상의 극치가 인내천이지요. 약육강식이 아니라 약강이 평화 공존하여 행복을 쌓아가는 사회, 문명의 축이 분명히 옵니다. 인간이 정글의 법칙이나 약육강식이 아닌 다른 세계를 염원해서 사회라는 구조물을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사회 자체가 자연보다 더 극심한 약육강식으로 변하면 안되지요.
「세상의 그 끝에서」에 나오는 새 세상이란 약강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인가요?
- 그렇지요. 거기에서 원고지를 까맣게 지운다는 것은 썩을 대로 썩어서 더 고칠 수 없어 그동안의 문명을 다 지워버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새 태양, 새 질서, 새 가치를 염원하면서 지쳐 잠드는 것이지요. 그런 걸 정공법으로 못 쓰잖아요. 시대의 진실에 접근하고 접근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장애물을 넘어야 하니까 풍자, 해학, 은유, 상징 등의 방법을 썼어요.
「부주전상서」를 재밌게 봤어요. 산아제한의 부조리함, 부작용을 짚으셨는데요. 시대를 내다보는 예지랄까, 선각자적인 면모를 보았어요.
-장준하 선생님이 매우 좋아하신 작품이에요. 나오라고 해서 저녁 사주셨죠. 1964년에『사상계』에 발표했지요. 충분히 먹을 만큼 식량생산을 하면 될 걸 사람을 죽여서 해결하느냐는 얘기지요.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이라는 말이 당시에 유행했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니까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사회가 됐다고. 『사상계』에서 계속 소설을 써달라고 했어요. 「분지」 발표 후 다음에 발표할 작품이 「미스터 존슨」이라는 작품이었어요.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존슨대통령이 할아버지 때부터 큰 농장을 했어요. 우리 이민 일세대로 그곳에 고용된 노동자의 눈으로 본 미국의 모습을 사백 매 정도 쓰려 했는데 「분지」필화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발표를 못 했어요. 뭘 쓰면 죽는 줄 알았어요. 참 어려운 시기였지요. 그때 길에서 「분지」필화사건 때 증언을 서줬던 이어령을 만났어요. 『문학사상』이라는 잡지를 맡았다고 작품을 써달라고 해요. 자기가 책임진다고 해서 「허허선생」을 썼지요. 『문학사상』에 연작으로 쭉 쓸 생각이었는데 두 편인가 쓰고 났는데 1974년에 민청학련사건 때 배후세력으로 지목돼서 잡혀갔어요. 그래서 또 쭉 못 쓰다가, 노태우 때 금지됐던 작품을 발표했고 『창비』, 『실천문학』에 허허선생 연작을 발표하면서 그걸 묶어서 책을 냈어요.
시대와 사회적인 배경 때문에 작품을 못 쓰셨네요.
-민청학련 때 참 어려웠어요. 기소 안 하고 육칠개월씩 잡아두고. 장준하, 백기완 선생 이후에 내가 잡혀 들어갔지요. 감옥에 들어가니까 벽에 ‘십년 징역 받고 백기완 선생 안양으로 떠나셨다’고 써 있더라고요, 못으로. 그리고 긴급조치 해제되는 날 나왔어요.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은 통일과 민주주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고역을 치르는 시대적 대환란이었고, 「분지」필화사건도 선생뿐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많은 작가들이 자기 검열이란 족쇄를 차게 된 셈이었다.
남정현 선생은 “문학은 인간을 사랑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작가는 인간이 놓여 있는 정치경제사회의 메카니즘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 애인이 어떤 환경에 있고 뭐가 부족한가 뭘 요구하는가를 잘 알아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인간이 놓여 있는 현실적인 환경, 구조를 잘 알아야 한다. 외국과의 관계,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성경이나 불경은 예수, 석가의 제자들 중 당대의 문장가들, 대작가 대시인이 쓴 것이니 다 문학의 카테고리에 넣어야 한다고.
구상중인 작품이 있으신지요?
-건강이 허락이 안 돼 그렇긴 한데, 쓰고 싶은 건 있어요. 이번에 대학에 들어간 손자에 대한 얘기. 그렇게 예쁜지 몰랐어요. 상처한 지 18년 됐는데 그 아이가 없었으면 내가 있었을까. 보석이 걸어가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손자에게」 라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세대 간의 갈등, 할아버지와 부모, 손자들이 겪어야 할 일과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
후배작가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작가는 절실한 문제를 써야지요. 그리고 가는 거지. 내 친구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처럼. 누가 뭐라든 자기 세계를 지키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가 놓여 있는 현실, 외세가 관여돼 있는 남북분단문제 등 큰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언제나 위기의 혼란이요, 언어도단의 사건이 계속됩니다.
문학의 생명인 표현의 자유가 훼손되고 있는 어려운 조건 하에서 우리 문학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단체는 작가회의가 유일하다며 초기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좋은 작품들을 기반으로 대사회적으로 발언하고,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라는 격려를 끝으로 돌아서는 노작가. 그 뒷모습에 부서지는 석양이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