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 그동안 편안하셨습니까?
벌써 금년의 반이 지났습니다. 나이 들수록 달력을 보며 지나간 날과 남은 날을 세어보는 보는 일이 많아지네요. 6월 하순부터 장마철인데도 덥기만 하다가, 지난 금요일(7월 1일) 밤에는 폭우가 내렸습니다. 다음 날 오전에 선릉을 산책했는데, 덕분에 오랜만에 숲 사이로 서늘한 바람을 맛 보았습니다.
우리 작은손길에서는 2년 전 부터 매달 1, 3주 수요일마다 회원 몇 분을 모시고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경전을 직접 번역한 전재성 박사가 참여하여 빠알리어 원전에 대한 설명을 함께 들으니 큰 도움이 됩니다. 이번 7월에는 숫타니파타, [제2. 작은 법문의 품]에 있는 <아마간다의 경>을 공부합니다. <아마간다의 경>은 제가 자주 읽는 경전 가운데 하나인데, 읽을수록 뜻이 새롭습니다. 초기경전, 특히 숫타니파타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은 경전 속에 나타나는 부처님의 모습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처님과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법정스님은 일찌기 숫타니파타를 번역하며, 불교 최초의 경전이라고 했습니다.
<아마간다의 경>에는 바라문 띳싸가 부처님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간다'는 '비린내'라는 뜻입니다. 경에 등장하는 바라문 띳싸는 육식을 금하고, 오직 산에서 나는 열매만 먹는 수행자입니다. 그는 절식과 단식 등 고행을 하며 영혼의 해탈을 추구합니다. 경 첫 머리에서 바라문 띳싸는 비린내 나는 음식(새고기)을 먹는 부처님을 비난합니다. 당시 부처님은 출가수행자로서 오직 걸식만 했기 때문에, 채식이나 고기 등 종류에 관계없이 재가자가 주는 대로 음식을 받았습니다.
부처님은 바라문 띳싸에게 비린 것은 음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정을 외면하고, 거짓증언을 하며, 생명에 대한 연민이 없으며, 진리에 대한 의혹을 해소시키지 못하는 단식 등의 고행이 바로 '비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세상의 혼란과 종교계급의 타락에 대한 부처님의 거침없는 비판은 용기있는 지성이 아니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주장입니다.
경전을 읽고 참선하며 다라니를 외우며 정진하는 요즘 불교의 화두가 <아마간다의 경>에서 나오는 부처님의 화두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혼란에 대한 부처님의 타협없는 통찰이 과연 오늘 불자들의 화두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욕망과 고통에 대한 인식이 다르면, 당연히 수행의 이상이 같을 수 없고, 수행의 이상이 다르면 행동의 규범과 형태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괴리된 수행은 현실의 부담을 덜어 줍니다. 그러나 그런 수행은 자기만족에 그칠 뿐, 이웃과 함께 나눌 수는 없습니다. 다음 구절은 당시 바라문들과 수행자들에 대한 부처님의 비판입니다.
생선이나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나, 단식하는 것이나, 벌거벗거나, 삭발하거나, 상투를 틀거나,
먼지를 뒤집어쓰거나, 거친 사슴가죽옷을 걸치는 것도, 불의 신을 섬기는 것도, 또는 불사(不死)를 얻기 위해 행하는 많은 종류의 고행, 진언을 외우거나, 재물을 바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나, 계절에 따라 행하는 수련도 모두 의혹을 여의지 못한 자를 청정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욕망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수호하고, 감관을 제어하며 유행하십시오. 진리에 입각해서 바르고 온화한 것을 즐기고, 집착을 뛰어넘어서 모든 고통을 버려버린 현명한 님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속에서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 <아마간다의 경> 11 - 12번 구절
오랜 세월 단식을 하거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아있는 늙은 수행자를 보면 누구나 경외감을 갖게 됩니다. 장엄한 제사는 미래의 안전에 대한 유혹을 불러 일으킵니다. 부처님은 이 모든 제사나 고행이 진리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오히려 그 속에 숨어있는 위선과 기만을 통찰했습니다. 욕망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잘 지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평범하지만 종교가 무엇을 추구해야하는지 밝혀주는 가장 오래된,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비전입니다.
저는 위 구절을 읽으며, 제사와 금기와 고행의 종교적 권위에서 자유로운 부처님의 투명한 지성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이 구절이야말로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얻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또한 <아마간다의 경>의 다음 구절을 읽으며, 만약 이 시대에 부처님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현실과 만나게 될까 상상해봅니다.
감각적 쾌락을 자제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탐하고, 부정한 것과 어울리며, 허무하다는 견해를 갖고, 바르지 못하고, 교화하기 어려우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 악행을 일삼고, 빚을 갚지 않고, 중상하며, 재판에서 위증을 하고, 정의를 가장하며, 죄를 범하며 비천하게 행하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그들을 해치려 하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잔인하고, 거칠고, 무례하다면, 이것이야말로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이 아닙니다.
- <아마간다의 경> 5, 8, 9번 구절
<아마간다의 경>을 읽으며, 저는 2,500 여 년 전 고따마 부처님이 겪었을 고난의 삶을 생각합니다. 욕망을 성찰하며 그 성찰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밝히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간 부처님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의 수행이 어디에서 시작해야하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여운)
첫댓글 신선한 바람같은 말씀, 항상 고맙습니다_()_
정작 비린것은 음식이 아니라 우리의 언행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네요
선생님 어렵고 제가 잘 이해는 못하겠지만 무엇인가 깊이 새겨지는 말씀같아요~
주옥같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