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87)
금반삭립봉천첩 金盤削立峰千疊
(소반위에 나란이 빚어 놓은 송편은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히 겹쳐 있는것 같다.)
김삿갓은 魂飛魄散하여 마누라를 잡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수안댁은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여보게 정신 차리라구!" 얼굴에 냉수를 끼얹고 인정人定을 비벼주고 하여 한바탕 소란을 떤 뒤에 수안댁은 간신히 숨을 돌렸다.
"여보게! 정신이 좀 드는가? 자네, 별안간 왜 이러는가?"
수안댁은 남편의 얼굴을 얼빠진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한다.
"몸도 불편하신 당신에게 이런 꼴을 보여 미안해요.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요, 잠시 그대로 누워서 안정을 취하구려."
김삿갓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당을 詛呪한 말이 당신 마음에 거슬렸던 모양이지?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테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아요."
사실 이제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누라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줄 말은 안 할 결심이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당신만 빨리 회복해 주세요."
"나만 회복해 가지고 되는가, 자네도 건강해야지."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수안댁은 일어나 앉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연방 외어대고 있었다.
이렇게 卒倒 사건이 있은 날부터 수안댁의 얼굴에는 날마다 愁心이
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밤중이면 제단 앞에
井華水를 떠놓고,
남편의 환생을 비는 축원만은 어느 하루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삿갓은 "제발 그런 짓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누라 昏絕을 겪어 본 바가 있으므로 무슨 오해를 사게 될지 몰라, 숫제 수안댁의 일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김삿갓도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가까운 곳을 다닐 수 있을 만큼 상처가 좋아졌다.
그러나 수안댁의 공포 증세만은 여전히 가실줄을 몰랐다.
그런 마누라의 안색을 눈여겨 본 김삿갓은 마누라의 마음도 추스릴겸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지난 여름은 여러가지로 우울한 계절이었어,
이제 계절도 바뀌었으니 이번 가을에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행복이 찾아 올거야." 마누라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위로의 말이었다.
"고마워요. 그래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은 "고맙다"고 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보면 수안댁은 아직도 정체 불명의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피해망상으로 보기 보다는 "신의 저주를 두려워 하는 공포감"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만 같았다.
김삿갓은 마누라의 정신상태를 바로 잡아 줄 방도를 여러가지로 궁리해 보다가 어느날
"참, 수안 고을에 당신 큰아버지께서 살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 가을에는 우리 둘이 큰아버지를 한번 찾아가 뵙기로 하면 어떨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누라의 얼굴에는 불현듯 싱싱한 기쁨의 빛이 역력하였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우리 둘이 함께 찾아가면 큰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래요, 조만간 수안에 한번 다녀오도록 합시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김삿갓의 상처는 거의 완쾌되어 갔다.
그러나 수안댁은 오밤중만 되면 남편 대신에 자기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을 하루도 빠트리는 날이 없었다.
그런 마음의 고민을 안고 지내는 탓인지 수안댁의 얼굴은 점점 瘦瘠
해갔다.
김삿갓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날그날을 살얼음판을 밟으며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날은 마누라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주려고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추석 명절이 가까워 오니, 우리 송편을 한번 만들어 먹을까?"
송편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누라의 불안한 심리를 다른 일로
相殺시켜 보려는 심산이었다.
마누라는 그 말을 듣더니 과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어머! 송편이 잡수시고 싶으세요?"
"응, 당신이 만들어 주는 송편을 먹고 싶네."
"가만계세요. 당신이 자시고 싶다는데 오늘 당장 만들어 드리지요."
수안댁은 전에 없이 밝은 얼굴로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다가 반죽을 하여 송편을 빚기 시작하는데 그 솜씨는 보기만 해도 신기할 만큼 능숙하였다.
적당히 반죽한 재료를 조금 떼어내 두 손바닥 사이에 넣고 달달 굴리니 새알처럼 동그란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의 네 손가락으로 새알의 한복판을 오목하게 파헤치고 그 속에 고물을 넣은 뒤에 가장자리를 마주 잡아 오므리니 조그만 조가비 같은 송편이 되었다.
이렇게 빚은 것을 쟁반위에 하나씩 나란히 세워 놓으니
얼른 보기에는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늘어서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도 재주 좋은 여인이 어째서 허망한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측은한 생각이 든 김삿갓이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여보게! 자네가 송편을 빚는 모양을 보니, 나는 시흥이 샘 솟네그려. 내가 "송편"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수 읊어 보기로 할까?"
생각조차 못 했던 말을 듣고 수안댁은 어리둥절하는 표정이었다.
"송편을 빚는 모양을 시로 읊어 보신다고요?"
"그래, 시로 읊어 볼 테야."
"그런 시도 지을 수 있어요 ? "
"그럼."
"어디 한 번 써보여 주세요."
수안댁은 김삿갓이 유식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까지 능숙하게 지을 줄은 몰랐는지 흥미로운 눈으로 남편을 바라 보았다.
지필묵을 꺼낸 김삿갓, 그 자리에서 "송편"이라는 제목으로 한시, 한 수를 써갈겼다.
《松餠 송병》
수리회회성조란 手裡廻廻成鳥卵
지두개개합방순 指頭個個合蚌脣
금반삭립봉천첩 金盤削立峰千疊
옥저현등월반륜 玉著懸登月半輪
손바닥으로 달달 굴려 새알을 만들고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조가비처럼 만든다.
금쟁반에 산봉우리처럼 수북이 송편을 빚어 놓고
옥젓가락으로 반달 같은 송편을 집어 먹는다.
물론 그 시는 한문이었기에 수안댁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에요? 나는 한문을 몰라 알아볼 수가 없네요."
"이 시는 자네가 송편을 빚는 모습을 글로 표현한 것이라네. 내가 설명을 할 테니 잘 들어 보라구."
김삿갓은 첫째 줄과 둘째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수리회회성조란手裡廻廻廻成鳥卵이란
쌀 반죽을 손바닥으로 달달 굴리니까 새알처럼 동글하게 된다'는 소리요."
"'지두개개합방순指頭個個合蚌脣은
송편 속에 고물을 넣고 가장자리를 하나하나 조가비처럼 오므린다'는 소리라네."
"어머나. 당신은 어쩌면 솜씨가 이렇게도 오묘하세요.
반죽한 것을 손바닥으로 새알처럼 동글하게 만든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송편의 가장자리를 조가비처럼 오므려 만든다는 말은 기막히게 좋네요."
"그 다음을 마저 설명해줄테니까, 끝까지 들어보라구."
하며 이번에는 셋째 구절과 넷째 구절을 가르키며 설명을 계속 하였다."
"'금반삭립봉천첩 金盤削立峰千疊
빚어 놓은 송편을 쟁반위에 차례로 세워 놓으니까,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이 겹쳐 있는것 같다'는 소리요.
"'옥저현등월반륜(玉著顯登月半輪)은
빚어 놓은 송편을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 드니까
마치 하나 하나의 송편이 반달처럼 보인다'는 말이야.
어때? 이만하면 잘 지었지?"
"나는 시를 모르기는 하지만, 정말 재미있게 지으셨어요.
당신이 글을 잘 아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시를 지으시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수안댁은 모든 시름을 잊은 듯이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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魂飛魄散 혼비백산
魂 넋 혼
飛 날 비
魄 넋 백
散 흩을 산
詛呪 저주
詛 저주할 저
呪 빌 주
愁心 수심
愁 근심 수, 모을 추
心 마음 심
瘦瘠 수척
瘦 여윌 수
瘠 여윌 척
相殺 상쇄
相 서로 상
殺 죽일 살,
빠를 쇄, 맴 도는 모양 설, 윗사람 죽일 시
松餠 송병
松 소나무 송
餠 떡 병
꽃송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