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부는 바람은 몹시 차다. 가뜩이나 탱탱 얼어붙은 귀에 바람이라도 스쳐지나가면 살점이 찢겨나가는 듯 아프다. 밀물 때가 되어서 강물이 검푸른 파랑을 일으키며 기세 사납게 일어서는 아침이다.
그래서인가, 몸을 움추리게 하는 추위에 외투깃을 세우며 겨울 강둑을 오르니 백악의 건물이 하늘을 뒷곁에 두고 늠름하게 가슴을 펴고 서서 내게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어, 오늘은 왠 일이람. 이른 아침부터" "음, 일이 좀 있어서" "세례식이 있는가 보이" 자주 드나들다 보니 내 속내를 다 들여다 보게 무관한 사이가 되었다. 라파엘, 초여름부터 시작했던 교리를 끝내고 오늘 세례식이 있어 나오는 길인 걸 벌써 눈치채다니... 얼른 건물 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조금 더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오늘 세례 받는 영세자 이름도 알아맞힐 정도로 우린 막역하다. 그래, 오랜 기간이었지. 사람이 살다보면 험한 꼴 당하지 않을까보냐.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서울로 실려왔을 때는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내가 처음으로 그의 병실을 찾아 갔을 때는 얼굴만 멀쩡하니 내놓고 온몸을 붕대를 감고 기브스를 한 체 누워있을 때였다. 병실담당 수녀님을 통해 가톨릭을 믿고 싶다고. 그렇게 시작한 교리였다. 환우가 나와 같은 환우 교리봉사자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병원에 계시는 원목신부님한테 세례성사를 받는 경우는 대게 오랫동안 입원을 하는 장기환우이거나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약물치료를 하는 암환우처럼 중증 환우라고 보면 틀림없다. 보다 증세가 가벼운 환우는 가능한 동네 성당에서 정식으로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한다. 대신 입원해 있을 동안 지금처럼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꼭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차근차근 풀어서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자주 들려서 치료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에서 위안이 되게 말벗을 해준다거나 기도를 가르쳐 주는 일이 나와 같은 환우 교리봉사자의 소임이었다. 물론 퇴원 후에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환우가 살고 있는 본당 구역장이나 레지오 단장 한테 연락을 주어서 퇴원 후에도 계속 교회를 잊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네트웍을 짜두는 걸 잊어서는 안되지.
라파엘, 세례받기 전에 그의 이름은 최ㅇㅇ 40대의 건강해뵈는 화물트럭 기사였다. 내가 처음에 한 일이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붕대로 온몸을 동여맨 그에게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당한 불의의 사고를 위로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무척 억울하겠지만 속만 끓이지 말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게 편하다고 타일렀어. 대게 이런 경우를 당하면 사람들은 우선 화부터 나게 되지. 그리고 "왜 내게 이런 일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벌을 받는가?" 앙앙불락 치미는 화를 어쩌지 못해 치료를 받는데 힘에 겨워한다. 다행히 그는 화를 내기 보다는 순순히 자신에게 닦친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고. "어쩌겠습니까. 죽지 않는 것만해도 고마운 일이지요" 내가 보기에도 착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어. 이렇게 사고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하느님 품에 안기는 모습에서 주님의 이끄심을 느끼겠더라니까.
이렇게 우리 교리는 병실에서 시작했어. 그나마 얼굴이 말짱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마른 편이라 좀 날카롭게 보이는데 비해 사람이 참 순했다. 더우기 교리 하느라 방문한 내가 불편해할까 고통을 참는 모습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교리책을 가지고 풀어나가기는 애당초 포기했어. 구수하게 이야기로 교리를 해야하니 나도 쉽지 않았어. 십여 년의 예비자 교리교사의 관록에도 말이야. 부인은 날렵하게 생긴 미인었고 또한 말이 없었어. 내가 병실에 들어가면 의자를 당겨놓고 널려 있던 물건을 정리하며 교리를 시작하기 좋게 정리하고는 말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몇 번인가 함께 교리를 배우자고 권유했지만 그냥 자리를 뜨는 것으로 대답했어.
한번은 아침부터 병실에 들렀어. 그의 치료는 늘상 아침에 드레싱하는 거로 시작했다. 드레싱하고 나서 시작된 통증은 오후 늦게야 겨우 멈춘다네. 그래서 나는 늘 퇴근길에 병실에 들러서 교리를 하곤 했지. 그러다, 생각을 고쳐 먹고 한 번 드레싱 시간에 맞춰서 병실에 들렀어.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민망해 했지만 꼭 보고 싶었어. 주치의가 왼쪽 다리 붕대를 풀고 거즈를 헤치는데 정말 못 볼 것을 봤어. 왼쪽 다리에는 종아리 뼈가 숫제 하나도 없었어. 그냥 고기덩어리에 불과했어. 무엇 때문인지 무릎밑으로 쇠로 만든 봉이 네개가 박혀 있었다. 그는 통증이 시작하면 그걸 잡고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는 손잡이 역활을 했는데 거기에 염증이 생길까봐 매일 염증치료를 하는 걸 드레싱이라 하더군. 그것뿐인가, 그의 상처는 대책이 없어 보였어. 붕대를 풀면 피부조직이 너덜너덜 뭉게지고 불에 탄 듯 그을려 있어 새로이 피부이식 수술을 해야한데. 흡사 화상을 입은 환자처럼 그 상처에 화농이 생길까봐 매일 약을 바르고 치료를 하는데 화끈거리고 쓰리다가 가려울 때면 환장한다네. 뼈가 부러진다던가 팔다리에 큰 골절을 입은 상처와는 달리 피부가 곪으면서 가려워지기 시작할 때면 세상에 어느 아픔도 이만할라고.
제일 먼저 손을 댄 것은 없어진 종아리에 뼈를 이식하는 거라더군. 그래서 뼈를 이식하려고 수술실에 들어간 날, 나는 수술실 앞에서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화살을 쏘았어. 성모님과 요셉성인부터 모든 성인을 불러대고 화살을 쏘느라 의사선생님과 스탭들이 아마 고슴도치가 되었을거야. 그런데 왠걸 이런 날벼락이 다 있는가. 염증을 잡는 데 실패하여 다리를 절단해야 된데. 맙소사, 이런 일이.... 정작 당황하고 어쩔줄 모르는 건 바로 나였어. 물론 시골에 계신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통곡을 하고 난리가 아닌데 이들 내외는 이외로 담담했어. 매일매일 고통에 시달리는 거보다 차라리 짤라버리는 게 좋겠다고 했어. 물론 다리를 짜른다해도 의족을 하면 일상생활에 그리 불편함이 없다는 것은 나도 알지. 친구가 군대에서 지뢰를 밟아서 한쪽 다리를 짜르고 의병 제대를 해왔기에 좀 알어. 본인이야 얼마나 불편하겠나만 걸어가는 걸 보면 의족한 걸 모르겠던걸. 그래도 다리를 짜르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