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희 시집 아침 수건을 망각이라 불러야겠어 132 * 210 * 13 mm 146쪽 어떤 시는 언어를 삶으로부터 찢어 놓고, 어떤 시는 언어를 통해 생활의 몸을 파헤친다. 삶을 벗어난 말들이 자신의 집을 지으려 새로운 몸을 낳는 것을 보았고, 생활에 갇힌 말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 제 몸을 허무는 것을 보았다. 이 역설의 과정이 시의 이유이자 위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언어를 그저 일상의 감상으로 허비하며 어떤 대결도 생산하지 않는 시들이 그럴듯하게 제공하는 위로와 안주를 나는 진통제나 진정제 이상이라 여기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리움’이라는 ‘일상의 감상’이 ‘공들여 식탁을 닦는’ 일에 그칠 때의 일이다. 이어서 시인이 그것을 ‘식욕이라 불러도 좋다’(「식탁의 바탕」)고 말할 때, 시는 순식간에 위안의 자리에서 몸의 자리로 이동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때의 몸은 이전의 몸을 찢고 나온 몸이다. 말하자면 ‘감상’의 자리에서 ‘욕망’의 자리로 옮겨간 몸이며, 정확히는 ‘감상의 대상’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바뀐 몸이다. 이러한 과정이 순간의 위안을 영원의 모색으로 밀고 가는 힘이다. 요컨대 이지희 시인의 많은 시는 ‘순리’를 ‘역설’로 전환시키며 이유와 위의를 얻는다. 그로 인해 우리는 식욕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식탁을 닦는 일도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 속에서, 인생의 “통로를 지나려면/ 혀가 자라야 한다”(「길어진 혀」)라는 시적 선언에 동참함으로써 마침내 새로운 세계의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긴 통로의 ‘일상’을 운행하는 자신의 몸에 합승하는 그리움 앞에서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오늘의 손님은 울 수도 있는 손님”(「대수롭지 않은 손님」)이라고.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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