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 모음
가을걷이 - 문인수
달구지
타고 갈 때
나락단 거두러 갈 때
막바리 그득 싣고 돌아올 때
첨벙첨벙 물로 건너는
건너다가 슬며시 물 마시는
소
기다렸다가 또 한 칸
한 칸
징검다리 건너는
물잠자리
뒤에 뒤에
아버지
가을날 -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여기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때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누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여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가을날 -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날 - 서거정
띳집은 대숲 길로 이어져 있고
가을 햇살 맑고 곱게 빛나네
열매가 익어서 가지는 늘어지고
마지막 남은 덩굴에는 오이도 드무네
여전히 벌은 날개짓 그치지 않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졸고 있네
참으로 몸과 마음 고요하구나
물러나 살자던 꿈 이루어졌네
가을날 - 손동연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ㅡ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주고 있었다
가을 넥타이 - 김현승
볕은
耳順하고
이삭들
바람이 익는다
아침 저녁
살갗에 묻는
요즈막의 향깃한 차거움 ...
四十은 아직도 溫血動物인데
오늘은
먼 하늘빛
넥타이 매어 볼까
가을 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가을 달 - 장옥관
납작 마당에 엎디어 불볕을 견딘 채송화
꽃따지 키 낮은 꽃들
떠밀리고 떠밀려 어스름 속 수제비국을
받아들면 거기,
국물 속에 떠오르는 또 하나 감자알
감자는 자주 목이 메이지. 단칸 셋방 옹기종기 모여앉은 식구들
누군가의 발길질에 끓던 국솥이 뒤집어지고, 생각의 어둠이
대문 안으로 밀려들고, 아이들은 소리치며 골목으로 내달아친다
국은 기름때의 세월은 진 냄비처럼 마당에 굴러 떨어져 이윽고 여름이 지나는 것이다
늙은 어머니는 화단의 봉숭아를 뜯어 달아나려는 열 손가락을
칭칭 붙들어매고, 식은 국물 속 죽은 귀뚜라미를 남몰래 건져 내고,
마루까지 몰려온 어둠을 천천히 쓸어 내린다
.....
아이들이 벗은 무르팍
딱딱한 피딱지를 떼어내면 묵은 상처 속
봉숭아 손톱같은 달은 다시 차오르고
가을 맑은 날 - 나태주
햇빛 맑고 바람 고와서
마음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벼 벤 그루터기 새로 돋아나는
움벼를 보며
들머리밭 김장배추 청무 이파리
길을 따라서
가다가 가다가
단풍의 골짜기
겨우겨우 찾아낸
감나무골
사람들 버리고 떠난 집
담장 너머 꽃을 피운 달리아
더러는 맨드라미
마음아, 너무 오래 떠돌지 말고
날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려문
가을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 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을 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을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 입니다
가을 새벽 - 권태응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어서 밤이 새라고, 닭들 꼬기오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먼 길 손님 타라고, 기차 삐익삑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부지런한 타작꾼 기계 타알탈
가을아침 - 황동규
오래 살던 곳에서 떨어져내려
낮은 곳에 모여 추억 속에 머리 박고 살던 이파리들이
오늘 아침 銀옷들을 입고
저처럼 정신없이 빛나는구나
말라가는 신경의 참응ㄹ 수 없는 바스락거림 잠재우고
시간이 증발한 눈으로 시간석을 내다보자
방금 黃菊의 聲帶에서 굴러 나오는 목소리
저 황금 고리들, 태어나며 곧 사라지는
저 삶의 입술들!
가을 아침에 - 소월
아득한 퍼스레한 하늘 아래서
회색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섶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싸여 오는 모든 기억은
피 흘린 상처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 속이 가비얍던 날
그리운 그 한 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에 - 기형도
잎 진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 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물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가을에 -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에 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ㅡ이마와 가스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ㅡ 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은 또 한번 뒷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가을에 -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을은 /김정숙
솔솔 귓가에
속닥속닥 붉게 푸르게
가슴 헤집는 가을 밭
고향집 감나무엔
푸른 잎마다 붉은 연지 쿡 찍어놓고
뒷산 떡갈나무엔
토닥토닥 꽃집 지어 놀이동산 만들어 놓고
가을 들녘은
조롱조롱 배부른 천국
열정은 하늘로 솟구쳐
파랗게 멍들어 있고
햇살 한 움큼 내리면서
내 몫을 그리움으로 남긴다
가을은
그 그리움을
그 고독을
추억의 책갈피에 넣어
깊이 묻어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