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한 때는 당신의 이름에 가슴이 뛰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독재 정권의 압제에 고통 받을 때, 당신이 있음으로써 우리는 정의가 이 땅에 흘러넘치리라는 희망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해방자로서의 당신이 있음으로써 일제의 노예 상태를 견뎌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폭력의 현장, 압제의 현장에 당신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는 현장에 당신이 있습니다. 피해자들을 조롱하고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광화문 광장에 당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당신을 오해했습니다. 당신의 정의는 당신과 계약을 맺은 부족에게만 적용되는 배타적인 정의였나 봅니다. 당신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부족 신이었습니다. 당신과 계약한 유대부족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힘없는 가자지구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할 수 있는 그런 부족 신말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려거든 우리와 재계약을 맺어야겠습니다. 이 땅의 주권이 무지렁이 시민에게 있는 사회, 정치적 민주화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민주화된 사회, 소수자를 존중하는 공동체, 평화롭게 통일된 한반도, 자유와 인권이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있는 국제사회의 하느님 역할을 하시겠다면 나도 당신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도장을 찍겠습니다.
엊그제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노예에서 해방된 광복절이었습니다. 현재 대통령직에 있는 윤석열씨가 한 가지 옳은 얘기를 하긴 했습니다. 광복 후 79년이 지났지만 해방은 여전히 미완성이랍니다. 맞는 말입니다. 식민지배자 제국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때, 노예로서의 열등감을 극복할 때, 공산주의자들과 화해할 때, 패권국에게 당당해 질 때, 독립운동가들이 꿈꿨던 민주공화국을 완성할 때에야 비로소 광복이 완성되고 당신이 해방자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계약을 처음으로 말씀하신 우리의 선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