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퇴지륜(不退之輪)
즉흥적으로 하면 물러나지 않는 바퀴가 될 수 없다.
빙의흥작위자 수작즉수지 기시불퇴지륜 ?. (憑意興作爲者 隨作則隨止 豈是不退之輪?
종정식해오자 유오즉유미 종비상명지등?. (從情識解悟者 有悟則有迷 終非常明之燈?.
즉흥적으로 하는 일은 시작 하자마자 이내 끝난다.
그러니 어찌 험난한 상황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법륜(法輪)인 불퇴지륜(不退之輪)이 될 수 있겠는가?.
감정과 재치로 얻은 깨달음은 깨닫자마자 이내 헷갈린다.
그러니 어찌 끝내 밝혀 있는 등불인 상명지등(常明之燈)이 될 수 있겠는가?.
불퇴지륜(不退之輪)은 뒤로 물러나지 않는 부처의 가르침을 지칭한다.
불가에서 세상을 받치고 있는 4개의 바퀴인 4륜(四輪) 가운데 하나인 법륜(法輪)을 언급한 것이다.
‘법륜’은 전륜왕의 금륜(金輪)이 산과 바위를 부수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금륜 밑에는 땅 밑에 있으면서 대지를 바치고 있는 물인 수륜(水輪), 그 아래의 바람인 풍륜(風輪)과 맨 밑의 허공인 공륜(空輪)이 있다.
불가에서는 중생의 죄업을 깨뜨리는 불법을 ‘법륜’에 비유하고 있다.
법륜은 바위를 깨 부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까닭에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수레바퀴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과 같다.
뒤로 물러나지 않는다는 뜻의 ‘불퇴지륜’ 용어가 나온 이유다.
유마경(維摩經), 불국품(佛國品)에서 ‘법륜’은 늘 청정(淸靜)하다고 했다.
상명지등(常明之燈)은 지혜의 광명을 뜻한다.
불법(佛法)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사찰에 설치된 장명등(長明燈)과 같은 뜻이다.
불가에서는 하나의 등불로 수천 수백의 등잔에 불을 붙이듯 불법으로 중생을 인도할 수 있다고 본다.
장명등을 무진등(無盡燈)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어떤 일이든 차분히 생각한 뒤 결정해야 오래 간다. 일시적인 기분을 쫓아 일을 시작하면 이내 그만두게 된다.
이는 ‘불퇴지륜’과 거리가 멀다.
깊은 수련을 거쳐 얻은 지혜가 아니면 스치는 감정과 의식으로 손에 넣은 가벼운 깨달음에 불과하다.
이내 다시 어두워진다. 이는 ‘상명지등’과 거리가 멀다.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인물로 남북조시대 남조 송나라 때 글로 명성을 떨친 사령운(謝靈運)을 들 수 있다.
그는 동진의 거기장군(車騎將軍) 사현(謝玄)의 손자로 그의 모친은 왕희지의 외손녀였다.
지금의 하남성 태강인 진군(陳郡) 양하(陽夏)에 태어난 그는 8세 때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강락공(康樂公)에 습봉(襲封)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많이 했으나 품성이 오만했다.
예주(豫州) 자사 유의(劉毅) 밑에서 기실참군(記室參軍,기록관)으로 있다가 송나라 건국 후 산기상시를 거쳐지금의 절강성 온주인 영가군(永嘉郡) 태수가 되었다.
부임 1년이 못 되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인 지금의 절강성 상우인 회계 시녕서(始寧墅)로 돌아왔다.
송나라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은 고명대신들을 주살한 뒤 사령운을 불러 비서감에 임명했다.
사령운은 송 문제로부터 궁중의 장서들을 정리해 ‘진서(晉書)’를 편찬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후 시중(侍中)으로 발탁되어 유의륭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유의륭이 총애하는 사람은 왕화(王華), 유담(劉湛), 왕담수(王曇首), 은경인(殷景仁) 등 4명이었다.
이들을 사현(四賢)이라고 했다.
사령운은 이들 4현과 똑같은 시중이었지만 조정의 비밀 회의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그는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화가 난 유의륭은 사령운의 명성을 고려해 자진 사퇴를 권했다. 사직서를 내고 고향인 회계로 돌아온 이유다.
이후 그는 친구들과 더불어 유람을 다니며 술을 마시고 놀았다. 등산을 좋아한 그는 길이 없는 곳을 택해 정상에 오르는 것을 즐겼다.
한 번은 하인들을 시켜 무성한 수풀을 베어내며 시녕의 남산부터 임해군 경계까지 갔다.
산 위에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자 그 지역 백성들이 산적의 출현으로 알고 회계 태수에게 고했다.
평소 사령운과 앙숙이었던 회계 태수가 이를 역모로 꾸며 조정에 고발했다.
사령운의 상주서를 통해 내막을 알게 된 송 문제가 이를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이내 지금의 강서성 무주인 임천내사(臨川內史)로 임명했다.
다시 벼슬길에 오른 사령운은 여전히 정무에 관여하지 않고 등산만 다녔다. 감찰어사가 그를 탄핵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관리를 결박한 사령운은 ‘임천피수(臨川被收)’ 라는 시 한수를 짓고 달아났다.
조정이 급히 군사를 보내 그를 체포했다.
유의륭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사형을 면하게 해주고 광주로 유배를 보냈다.
원가(元嘉) 10년(433) 진군부장 종제수가 지금의 강소성 도허촌에서 차림새가 단정하지 못하고 행실이 의심스러운 무리를 발견했다.
즉시 이들을 체포해 신문했다. 조흠(趙欽)이란 자로부터 이런 자백이 나왔다.
“나의 동향 출신인 설도쌍(薛道雙)은 전에 사령운과 일한 적이 있습니다.
작년 9월 초 설도쌍이 나에게 사람을 보내와 ‘사령운이 죄를 지어 광주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활과 화살, 창과 방패 등의 무기가 필요하다. 삼강구에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한다. 일이 성공하면 반드시 후한 보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늦게 도착해 사령운을 구해내지 못하고, 여비마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강도짓을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유의룡이 대노해 곧바로 사령운을 참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당시 그의 나이 49세였다.
남조 양나라의 종영(鐘巆)은 시품(詩品)에서 사령운을 두고 ‘원가지웅(元嘉之雄)’으로 평했다. 원가 연간에 활약한 문인의 으뜸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정치에 큰 관심을 가졌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내 실의에 빠진 나머지 산수 속에 노니는 유산완수(遊山玩水)로 마음을 달랬다.
현실을 반영한 시보다 자연 속에 파묻혀 사는 인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를 산수시(山水詩)의 효시로 부르는 이유다.
이는 그가 글은 물론 시와 그림에도 능하고, 불교와 노장사상에 정통했던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가 문학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산천에서 영적인 감흥을 얻은 데서 비롯되었다.
환상적이고도 내용이 풍부했던 그의 시는 당시의 시풍을 선도했다.
드는 자신의 문재(文才)를 두고 이같이 자찬한 바 있다.
‘천하의 문재(文才)가 10말이라면 조자건(曹子建)이 홀로 8말을 갖고 있고 나는 1말을 갖고 있다.
나머지 1말은 천하의 여러 재사들이 나눠 갖고 있다.”
조자건은 삼국시대 조조의 다섯째 아들 조식(曺植)을 말한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비슷한 시기의 동향인인 도연명(陶淵明)의 목가적인 ’전원시‘ 보다 그의 ’산수시‘를 높이 평가했다.
문선 (文選)에 그의 시가 다른 사람의 시보다 많이 실려 있는 게 그 증거다.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사령운이 조정에 중용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꾀한 것은 일시적인 울분을참지 못한 경망스러운 행동이었다.
그가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 이었다.
= 옮겨온 글 =
漢陽 Ju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