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대대(峨冠大帶)
고관에 대한 존경은 자리를 존경하는 것이다.
아귀이인봉지 봉차아관대대야 아천이인모지 모차포의초리야 (我貴而人奉之 奉此峨冠大帶也 娥賤而人侮之 侮此布衣草履也)
연즉원비봉아 아호위희 원비모아 아호위노?. (然則原非奉我 我胡爲喜 原批侮我 我胡爲怒?)
내가 존귀해졌을때 남들이 나를 받드는 것은 나를 받드는게 아니라 높은 관과 넓은 띠인 사대부의 아관박대(峨冠博帶)를 받드는 것이다.
내가 비천해졌을때 남이 나를 업신여기는것은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베옷과 짚신인 포의초리(布衣草履)를 업신 여기는 것이다.
본래 나를 받드는 게 아니니 내가어찌 기뻐할 필요가 있고, 본래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니 내가 어찌 화낼 필요가 있겠는가?.
아관대대(峨冠大帶)는 사대부들이 착용하는 높은 관모와 넓은 소매의 관복을 뜻한다. 높은 신분을 상징한다.
아관박대(峨冠博帶)와 뜻이 같다.
포의초리(布衣草履)는 벼슬하지 못한 선비나 서민들이 착용하는 베옷과 짚신을 말한다.
비천한 신분을 상징한다.
존귀해졌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비천한 신분에 처해 있다고 낙담할 것도 없다는 취지이다.
원나라 초 지원 연간에 활약한 왕면(王冕)은 중국의 역대 화가를 통틀어 묵매(墨梅)의 1인자 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매수(梅叟), 매옹(梅翁) 등의 호(號)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금의 절강성 제기현(諸曁縣)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어머니의 권고로 절에 들어가 독서 했다. 통유(通儒)로 일컬어질 정도로 명성을 떨쳤으나 과거 시험에 떨어진 뒤 전국을 유람하며 울분을 달랬다.
만년에는 병란을 피하여 구리산(九里山 )에 숨어 들어 농사를 지었다.
모옥(茅屋) 3칸을 지어 매화를 둘러 심고 매화옥주(梅花屋主)를 칭했으나 이내 병으로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타계했다.
그의 ‘묵매’는 묵의 농담(濃淡)을 변화시켜 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어 있는 매화를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매화꽃이 피어 있는 천화만예(千花萬蘂)의 매화 등이 그렇다.
그림을 그린 뒤 시를 짓고 낙관을 찍어 중국 화풍의 독특한 풍격(風格)을 만들어 냈다는 평을 받는다.
풍격(風格) = 글이나 그림에서 나타나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모나 모습.
청전석(靑田石)을 사용한 각인으로 문인 전각의 시조가 된 배경이다.
죽제시집(竹齊詩集)이 있다. 그는 묵매(墨梅)에서 이같이 표현했다.
우리 집 벼루 씻는 연못가 나무들 아가세연지두수(我家洗硯池頭樹)
모두 꽃 피어 엷은 묵의 흔적이네. 개개화개발묵흔(個個花開潑墨痕)
사람들아 좋은 색깔을 자랑 마라. 불요인과호안색(不要人誇好顔色)
오직 맑은 향기 천지에 가득할 뿐 지유청기만건곤(只留淸氣滿乾坤)
왕면의 ‘묵매’는 북송대의 소동파가 묵죽(墨竹)으로 유명한 것과 대비 된다.
“묵죽‘과 ’묵매‘에 이어 북송의 사대부 화가들의 사랑을 받은 것은 묵란(墨蘭)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원대의 사대부 화가 조 맹부(趙孟頫)를 들 수 있다.
그는 난초의 잎을 세 번 돌려 표현하는 삼전법(三轉法)을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최초의 묵란 화가는 북송대의 미불(米芾)이다.
조선조 말기에 독창적인 묵란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대원군 이 하응(李昰應)과 민 영익(閔泳翊)이다.
이 하응의 묵란은 동적인 구도 위에 많은 수의난엽(蘭葉)이 등장하고 난엽마다 심한비수(肥瘦두터움과 얇음)를 보이는 것 등이 특징이다.
이와 정반대로 민 영익의 묵란은 뭉툭하고 난엽에 비수가 없다.
’묵매‘와 ’묵죽‘ 및 ’묵란‘에 이어 묵국(墨菊)도 크게 유행했다.
남송 말기의 정사초(鄭思肖)가 대표적이다.
그는 남송이 패망한 후 이름을 ’사초‘로 지었다.
초(肖)는 송나라 황실의 성(姓)인 조(趙)자의 일부다.
원나라가 들어선 후 은거하며 본혈세사(本穴世思)라는 실호(室號)를 지었다.
길을 가거나 앉아 있거나 누울 때 ’본혈‘인 송나라를 사모하며 남쪽을 향했다고 한다.
= 옮겨온 글 =
漢陽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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