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1cLHGduM6RY?si=tJa9l0Ugl88Yj8E6
온전한 달음질 빌립보서 3장 12절
감사합니다. 지난 7개월 동안 귀한 안식년을 허락해 주시고 동녘 공동체를 위해 애쓰고 수고해주신 전도사님 이하 모든 교우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잘 쉬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쉬었습니다. 제가 맡아 일하고 있는 연구소가 2개 있는데 그 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들을 내려놓고 여행을 하면서 때로는 밭에서 일하면서 때로는 청소를 하면서 때로는 단식을 하면서 그냥 쉬었습니다. 6-7월은 교회와 연구소, 그리고 14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쌓아두기만 했지 청소한번 하지 못했던 집안을 대대적으로 리셋했습니다. 어릴 때 서울에 사시던 이모님이 가끔식 오시면 종합선물 세트를 사오셨는데 그 안에 보면 별의 별 과자가 다 있습니다. 그러면 그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 숨겨놓고 틈틈이 하나씩 꺼내서 먹고 했었는데 그렇게 소중한 것을 하나씩 꺼내 아껴 먹듯 하루하루 고마운 마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잘 지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이탈리아 다녀오면서 경험한 몇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절제하는 삶 : 제가 미국에 살면서 우리 교통문화와 무척 다르게 느낀 것 중의 하나가 STOP 싸인입니다. 미국에는 조금 큰 도로를 제외하고는 차가 다니는 모든 작은 골목들에 거의 STOP 싸인이 있습니다. 일단 차가 멈추었다가 그 싸인 앞에 도착한 순서대로 다시 출발하는 겁니다. 차가 속도를 낼 수가 없고 상호 조심스럽게 도로 상황을 살펴야하니 큰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길마다 일일이 다 신호등을 세우지 않아서 좋고 차들을 속도를 줄여 상호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운영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리를 갔더니 이런 게 있더라고요. ZTL. 교통에 제한을 두는 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중세 도시나 문화재, 지역민들 혹은 원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으로 이태리 전 지역에 다 있습니다. 상인들이나 허가를 받은 지역민들 차 외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24시간 통제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낮에는 안되고 밤에만 된다든지, 특정한 요일은 적용되고 나머지는 안된다든지 그렇습니다. 반드시 그런 구역은 입구에 이런 표시가 있고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카메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있는 곳 주변으로 공영주차장이 반드시 있습니다. 여기다 차를 놓고 걸어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딱지를 떼면 80-100유로를 내기 때문에 렌트카를 이용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도 차를 렌트할까하다가 한번 해보고는 포기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눈에 안들어오고 그러다보니 제가 그 존에 들어가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여행객들이나 도심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에게도 좋고 차들이 많지 않으니 매우 쾌적하고 안전합니다. 오래된 지역, 문화재, 환경을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해 이탈리아 만들어낸 정책입니다. 고양시 외곽에 주차장이 있고, 고양시에는 차를 못가지고 들어오게 하는 거죠. 대부분의 모든 도로를 자전거나 도보 거리로 만들어버리고 자연과 녹지 거리로 만드는 거죠. 그러면 시민들의 건강도 삶의 질도 많이 좋아질 겁니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위해 사회와 공동체가 무제약적인 욕망과 욕구를 통제하고 제한하는 삶의 방식들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인도네시아 파푸아 지역 원주민들은 “사시 구역”를 지킵니다. 대부분 원주민들이 캐톨릭 신자인 그들은 바닷속의 산호초와 해양생물을 지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사시 구역을 선포합니다. 성직자가 십자가 형태의 나무를 만들어 사시 구역을 선포하면 몇개월 동안 그곳은 자연보호구역입니다. 해제될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그 구역에서 해양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발리 힌두인들은 침묵과 명상의 날을 정해서 일 년에 하루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공항도 폐쇄하고 등도 안켜고 일도 안하고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일도안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저 집에 갇혀서 하루를 삽니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욕망을 제한하면서 지키고 보호하고 살려내야할 것들을 살려내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함께하는 삶 : 두 번째는 밀라노에 있는 친구목사와 함께 방문한 장애인 공동체입니다. 시에서 땅을 무료로 빌려주었고 적지 않은 평수의 대지에 일부는 상점을 일부는 카페를, 일부는 동물을 키우고 농사를 짓고 생태 공원을 만들고 성인이 된 장애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자유롭게 집을 오가기도 하고 이곳에 숙식을 하기도 하고 장애인 비장애인들이 함께 농사도 짓고 동물도 키우고 그러면서 만들어낸 채소, 치즈, 과일, 야채 등을 판매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이탈리아 다녀오면서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이탈리아는 1978년에 정신과 의사 프랑코 바자리아의 이름을 따서 바자리아법이 통과되고 “자유가 바로 치료다”라는 기치아래 단계적으로 환자들을 병원에서 가정와 지역사회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공동체안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하면서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협동조합이 만들어집니다. 그 사회안에 살아가는 구성원이 어떤 환경에 처지에 놓여있든지 노동과 관계와 상호존중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협력하고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지역과 사회와 국가가 국민들의 처지와 환경을 살피면서 모든 이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협력하고 애쓰는 모습,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주체적인 삶 : 여기는 밀라노 시내 외곽에 있는 농사공동체입니다. 지도의 중심부가 밀라노 시내입니다. 도시는 현대화되어 있지만 곳곳에 중세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오래된 도시입니다. 그 외곽으로 도너츠처럼 퍼져있는게 농지입니다. 밀라노 남부 농업지대입니다. 1990년에 농부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켜서 법령으로 지켜낸 도시입니다. 약 65개의 농사공동체가 다양한 농사를 짓습니다. 현대적 개념의 대형마트들은 구 도심지에 만들어질 수가 없어서 이 농지 외곽에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농사 면적이 총 4700헥타르라고 합니다. 평수로 환산하면 약 1천 4백 만평(여의도에 약 6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여기에서 쌀, 밀, 고기, 치즈, 우유, 야채, 계란 등을 생산해서 도시에 공급을 합니다. 이들은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생산자가 가격을 결정하고 도시의 마켓에 납품을 합니다. 중개상인들이 가격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직접 지은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가격을 결정하고 유통을 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식료품 가격이 무척이나 저렴합니다. 저희가 한 도시에 머물면서 3박 4일 정도 있었는데 30-40유로 장을 보면 한 도시에서의 저녁을 다 해결합니다. 동네 슈퍼마켓을 가면 장보는데 부담이 훨씬 덜한 겁니다. 식당이나 공산품 등은 가격이 매우 비쌉니다. 그런데 최소한 시민들이 돈이 없어도 기본적인 먹고 사는 것만큼은 문제가 없는 겁니다.
제가 감동을 받은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먹고 일하고 사랑하는 일인데 이런 것들을 자본가의 장난질에 농락당하지 않고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땀흘려 일한 노동으로 질좋은 먹거리를 만들어내 주민들을 먹여살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노동의 가치, 우리가 먹고 사는 음식들의 질 이런것들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고 그런 것 안에서 삶의 자부심을 느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무렵에 본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 중세의 천재적인 조각가 미켈란젤로, 우리에게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안에 그려져 있는 천지창조의 그림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예술가죠. 그가 만든 유명한 작품들이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 상이고요. 당시 권력에 맞짱뜨는 다비드 상의 조각가로 많이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면 피에타에서 시작해서 피에타에서 끝납니다. 그의 첫작품이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이 피에타 작품이고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작품은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이 작품은 밀라노의 스포르차 성안에 있습니다. 그는 생애 마지막 10여년동안 이 작품에 마음을 쏟았고 죽기 전날에도 이 작품을 조각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피에타는 성모가 아들을 껴안고 있는 건데, 그래서 이 작품도 엄마가 뒤에서 아들을 껴안고 있는 듯 시작했다고 하는데 마치 예수님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팔은 안어울리게 한쪽에 생뚱맞게 떨어져 있고 그런데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미켈란젤로가의 고뇌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10여년 동안 이 작품에 집중하면서 최초에 구상했던 뭔가의 구상에서 조각을 하다가 작가의 생각이 바뀌고 그래서 받쳐주는 듯 하다가 엎고 있는 듯 하다가 뭔가 내면의 생각들이 계속해서 변화되고 바뀌고 있는 걸 느낍니다. 이건 순전히 저만의 생각인데 미완성으로 끝난 작품이지만 어쩌면 미켈란젤로는 그의 평생의 화두였던 피에타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시도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했던 그 과정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삶이라는 게 어떤 완성체로써의 모습이 아니라 그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으로써의 삶이 곧 온전한 완성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완결점을 어떤 상태적 개념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더 이상 차별이 없고 평등하고 모두가 존중하는 어떤 도화지 속에 담은 풍경처럼 그런 완전한 상태의 어떤 세상을 이미지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보지만 삶이라는 것은 그런 상태적이지 않습니다. 아침의 저의 마음과 점심의 저의 생각과 저녁의 저의 마음이 끊임없이 변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뭐라도 다 할 수 있었던 마음이 오늘 아침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찌지리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자라고 변화하고 생동합니다. 어제까지도 좋았던 관계가 어느날 아침 깨지기도 하고 도저히 서로 용서할 수 없는 관계라 여겨졌던 사람들은 어느날 극적인 화해를 하면서 언제그랬냐는 듯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 살아있는 생명, 관계안에 상태적 개념은 머리 속에만 있는 생각속에만 있는 관념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작품에서 미켈란젤로가 저에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주제의 이야기가 오늘 바울 선생님의 말씀 안에서도 느껴졌습니다. 온전한 상태라는 것은 관념입니다. 온전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은 관념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에게 있어서 한 시점에서의 상태는 있을 수 있을지 모르나 생명은 늘 움직이고 생동하고 변화합니다. 어제까지 그 아름답고 고왔던 화분들을 보십시오 딱 그대로 놔두고 싶은데 생명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상태를 지나 계속해서 자라고 가장 아름다운 정적은 한때의 기억으로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분은 늘 가꾸어 주어야 합니다. 때로 너무 자랐다 싶으면 가지를 쳐주고 솎아주고 다듬어 주어야 합니다. 여기있는 베고니야를 보십시오. 싹 쳐냈더니 다시 새순이 나오고 무성해서 지저분했던 아이가 다시 최고의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 선생님은 어느 완성된 상태로써의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완성과 온전을 향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다시 그 방향으로 틀고 바라보고 다시 일어서고 심장을 던지는 그 과정, 그 지극하고도 온전한 마음을 담은 그 과정을 그리스챤으로써의 온전한 삶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탈리아의 색다른 문화도 좀 더 나은 삶을 향한, 공존하고 지속가능하고 주체적이면서도 자신들의 삶에서 보람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모두를 살아가게 하는 삶을 향한 공동체와 사회의 부단한 노력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앞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시간은 제한된 시간뿐이다) 더 많이 용서하고(우리는 인간이기에 갖는 한계 속에서 매일매일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이기도합니다) 더 많이 사과하고(남이 나에게 잘못한 것 말고 그런 일들은 때때로 오해일 수도 있기에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한 일들이 있다면 이것만은 최소한 나만이 아는 진실이기에) 더 많이 서로의 아픔과 고통들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보다 온전한 삶을 향해 나갈 수 있다면 / (사람인지라)오늘 또다시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늘 온전한 삶을 향한 달음질을 멈추지 않는다면 날개짓하는 새는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보다 자유롭고 온전하게 비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상태에 이르지 못한 서로를 자책하지 말고 바울의 고백처럼 어쩌면 미켈란젤로가 마지막까지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처럼 늘 여기에서의 충만한 삶을 향한 애씀과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그 온전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