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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아라한 나무아미타불
꿈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는
행복과 불행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과 불행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능히 불행을 제어할 수 있고,
늘 복되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작은 행복에도 크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과 불행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미혹한 중생이
행복과 깨달음을 얻으려면 그에 합당한 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곧 힘들고 불행한 현실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인욕행의 실천이 꼭 필요합니다.
하여, 우리 불자들이 생활 속에서 수행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인욕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평생을 살다 보면
나의 뜻에 맞지 않는 역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얼굴을 보기조차 싫은 미운 사람과도 만나야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많이 생기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거역할 때도 자주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원통한 일도 생깁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분노를 느끼고 슬픔과 배신감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때로는 시기심과 질투심을 느끼기도 하고, 증오가 커지면 살심을 품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때가 고비입니다. 욕됨을 참는 인욕으로잘 넘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라.
부처님께서 욕하신다면
배울 일이요 깨우쳐 볼 일이다
님게서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도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을 배웠노라.
이 두가지 육바라밀의 인욕송을 새기면서라도 욕됨을 참아야 합니다.
[선가귀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해롭게 하거든
마땅히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라
한번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온갖 장애의 문이 한꺼번에 열리나니
有人來害 (유인래해)
當自攝心 (당자섭심)
勿生瞋恨 (물생진한)
一念瞋心起 (일념진심기)
百萬障門開 (백만장문개)
삼독 중의 하나인 진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독기입니다.
사람이 짜증을 내거나 성을 내게 되면 속에서 독기가 일어나고,
그 독기가 온몸의 내장으로 퍼지게 됩니다.
심하면 손발과 얼굴과 온몸이 붓는 경우도 있고 종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결국 그 독기에 누가 상하고 누가 죽게 됩니까?
실로 우리가 성을 내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칼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튀어나와
남을 찌르고 나 자신도 찌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칼산지옥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번 성내는 마음(진심:瞋心)을 일으킬 때 온갖 장애의 문이 한꺼번에 열린다’고
하신 까닭은,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오를 때 온갖 재앙이
순식간에 덮쳐오게 된다는 것을 알고, 부디 마음 단속을 잘하라는 뜻입니다.
또 옛 말씀에 “애써 닦고 기른 공덕림(功德林)을 진심의 불이 다 태운다”고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애써 쌓은 공덕을 한 순간에 다 태워 없애 버리는 것은 진심입니다.
백일기도. 천일 기도 등을 통하여 아무리 열심히 닦고 기른 공덕일지라도,
분노의 불길을 끄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없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찾아와 나의 자존심과 감정을 건드리는
욕된 일들을 잘 받아 들이고 소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인욕을 잘 하면 잘 할수록 삶이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별별 일들을 다 겪게 됩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나에게 찾아드는 것은 까닭 없이 찾아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게끔 되어 있고, 찾아 오게끔 되어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그 일이 나에게 찾아드는 것이요, 내가 당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의 법칙입니다. 이 인연의 법칙을 잘 새겨,
감정이 솟구쳐 오르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에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설 줄 알아야 합니다.
참고 넘어서면 감정이 식은 다음에 후회 없는 평온이 찾아들고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이런 까닭으로 불교에서는 마음을 물과 같이 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감로수를 불러 일으켜 성냄의 불을 잠재우고
나아가 만물을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이 행복을 얻는 길이요 불자의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참을 줄 모르면 만행 중 어떠한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만행, 곧 행복과 해탈을 얻는 방법은 만 가지도 더 되지만,
참을 줄 모르면 그 중 어느 하나도 이룰 수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을 바라고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인욕행을 익혀야 합니다.
인욕은 능히 우리를 보호하는 갑옷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인욕의 갑옷을 입고 행복의 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갑시다.
인욕할 줄 아는 자는 시련이 두렵지 않습니다.
참을줄 알면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참을줄 아는 자만이 해탈의 고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몽창국사(1225~1351)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인욕을 되돌아 봅시다.
어느날 몽창국사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탔을 때,
잔뜩 술에 취한 사무라이 한 명이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승객들에게 난폭하게 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비척거릴 때마다 배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으므로,
사공을 비롯한 승객 모두가 크게 불안해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겁에 질려 어느 누구도 말리러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몽창국사가 사무라이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여보시오, 잠시만 앉아 있으시구려. 배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다오.”
국사께서 점잖게 타일렀으나 사무라이는 벌컥 화를 내었습니다. “뭐야, 이 중놈은!”
그는 가지고 있던 쇠 부채로 몽창국사의 이마를 내리쳤고,
국사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국사를 시봉하던 두 승려는
사무라이를 처단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두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습니다.
두 승려는 무사 출신으로, 검술이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기에
그 사무라이 정도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몽창국사는 두 승려를 말리며 말했습니다.
“이런 일로 너희의 마음이 움직인단 말이냐? 우리는 불도를 닦는 불제자이다.
그렇다면 뭔가 일반사람과는 다른 면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마음이 움직이면 곧 그르게 되느니라.
때리고 맞고 하는 이 모든 일이 한 바탕의 꿈을 꾸는 것뿐이니..”
이 일로 두 제자는 인욕행이 무엇인지를 깊이있게 새기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국사의 이마에 상처까지 남겼던 사무라이는 술에서 깨어난 다음
잘못을 빌고 국사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면서,
‘과연 내가 몽창국사와 같은 경우를 당하였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아가 지금의 내 마음이 어떤 일에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뒤돌아 보고,
어떻게 인욕을 해야 하는지를 정립해 보기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인욕을 잘 할수 있는가?
인욕행을 잘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심할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불자들을 대할 때마다 늘 하심하는 자세를 먼저 강조합니다.
나를 낮추는 하심은 스스로를 비워 스스로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뿐 아니라
남들도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요, 부처님께서 가신 길을 한 걸음씩 좇아가는
요긴한 수행법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상이 없으면 부처요, 상이 있으면 중생이다.”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늘 상에 얽매입니다. 특히 ‘나라는 상인 아상(我相)’에 얽매입니다.
그야말로 아상이 강하기 때문에 하심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아상이 강하면 남을 돌아볼 줄 모릅니다. 아상이 강하면 나 중심으로 살 뿐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화를 내기에 앞서 내가 남을 무시하는 일은 없는지를 늘 점검하고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아상을 꺾는 하심을 지켜가야 합니다. 요즘 정치판이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뒤에서나 면전에서나 ‘이놈. 저놈’하며 함부로 험담을 퍼붓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왜 남을 무시하고 험담을 퍼붓는 것일까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 보다는 내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언어폭력을 쓰는 이와 같은 현상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에,
“도가 높은 자는 마음을 더욱 겸손하게 쓰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항상 뜻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복이란 두 손을 모아 비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깔아뭉갤수록 아상은 점점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아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잘났다. 나는 많이 안다.
나는 부자이다. 나는 높은 지위에 있다. 나는 너보다 낫다’고 하는
일상의 생각들이 바로 아상입니다. 곧 너에 대한 나의 상대적인 우월감이 아상입니다.
따라서 아상의 산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나의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저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요.”이렇게 하면
아상은 무너집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수행법인 참회의 절을 통하여
아상의 산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단 일배를 하더라도 정성으로 하는 절은
그만큼 가치있는 절이 됩니다. 살아 계시는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면 진짜 절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정성과 공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게 되면 아상의 산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절을 하다 보면 이 세상에 존귀하지 않은 자가 없고 버릴 자도 없으며,
고맙지 않은 대상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마음을 담아 어떤 자세로 하느냐’에 따라,
단 한번의 절이 일만배의 절보다 더 가치 있는 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보다 우월하다는 거만한 생각과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에서는 자비가 싹틀수 없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모든 인류와 우주 만물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절은
그대로 수행의 절이 됩니다. 절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하심(下心)의 표현입니다.
재가 불자들이라면 물론 절에 계신 스님들처럼 용맹정진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매일 108배 등의 참회를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날 문득 향상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마침내는 일체 만물을 평등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대자비심을 증득할 수 있게 됩니다.
중국 오대산은 무순보살님의 상주도량 입니다. 이 오대산에 있는
대부영추사라는 절에서는 매년 춘3월에 ‘만발공양 무차대회(萬鉢共養 無遮大會)’를 열었습니다.
승려나 속인, 남자 여자, 귀함과 천함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음식을 주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곧 먹는데 평등하여야 법에도 평등하다는 뜻에서
법회의 이름도 ‘만발공양 무차대회’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무차대회에 한 거지여인이
두 아들과 개 한마리를 데리고 찾아 왔으나 문을 들어 설 수가 없었습니다.
행색이 초라한 데다 개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원주스님을 청하여 물었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만발공양 무차대회 법회가 있는 날입니다.”
“아, 이 거룩한 법회에 나도 공양을 올려야 할텐데...하지만 가진 것이 없으니,
저의 머리카락이라도 부처님께 올리겠습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잘라 원주스님의 들고 있는 쟁반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대중들은 거지여인을 ‘보살’이라 칭송하며 절 안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절 안에 들어온 개가 도량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볼일’을 보자,
대중들이 불쾌해 하며 개를 두드려 패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여인은 “볼 일 안보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며 오히려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공양할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원주스님께 요구했습니다.
“나는 급한 볼 일이 있어 곧 가야 합니다. 먼저 밥을 주십시요.”
원주스님의 법회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여인과 두아들의 공양상 셋을 내어 왔습니다.
“개도 먹어야 하니 한상 더 주십시오.” 할수없이 한 상을 더 차려주었더니
여인은 또 요구했습니다. “뱃속에 아기가 있으니 한 상 더 주셔야겠습니다.”
감정이 폭발한 원주스님의 벌컥 화를 내었습니다.
“배 안의 것이 무슨 밥을 먹는다는 말인가? 그렇게 탐욕이 많으니 거지가 되었지.”
당돌한 여인의 돌출 행동을 보다 못한 대중들이
“냄새나는 머리카락보다 밥값이 더 들겠다.”며 소리치자, 여인은 “
그럼 밥 안 먹고 머리카락을 다시 가져가겠다”며
아들을 시켜 머리카락이 담긴 쟁반을 가져오라 하였습니다.
아들이 머리카락을 가져와 여인의 머리에 대자, 머리카락은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자르기 전의 모습대로 똑같이 붙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때 거지여인이 말했습니다.
“이 개를 패고 싶다고 하였는데, 남이 내 개를 패는것은 원치 않는다.
내가 직접 땅에다 팽개칠 터이니 잘 보아라.”
그리고는 개를 땅바닥에 내리 꽂자 개는 청사자로 변하였고,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습니다. 또 거지여인은 문수보살로, 두 아들은
하늘동자로 변신하여 청사자 등에 올라 타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노래했습니다.
중생들이 평등을 배운다지만
경계따라 마음이 물결친다네
마침내는 온 몸을 버려서까지
미워하고 사랑하니 어찌하리오
대중들은 떠나가는 문수보살님을 향해 깊이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쟁반 위에 몇 올 남아 있던 머리카락을 정성껏 모아 탑을 조성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절이름을 발탑사(髮塔寺)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머리카락 자르기 전에는 ‘거지 여자’였다가 자르고 나니 바로
‘보살’로 부르는 그 마음은 무엇인가? 문수보살께서는 만발공양을 통하여
밥과 떡과 과일만 잘 올렸지, 진실로 중요한 마음 한자락은 어디에도 없음을 꼬집어
무차대회의 참뜻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바깥의 경계를 좇아서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일으킨 다음,
그 생각에 집착하여 온 몸을 버릴때까지 매달리며 살아가는 ‘중생의 마음’을
이제는 내려 놓아야 합니다. 하심을 해야 합니다.
인욕! 우리는 참을 수 있는 것만 참아서는 안 됩니다.
인욕이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도 참는 것입니다.
인욕의 갑옷을 입고 어떠한 역경도 모욕도 능히 참아내어야 합니다.
어떠한 욕됨 속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을만큼 넓은 마음으로 인욕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일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참회의 절을 통하여 마음을 비우고 하심을 하여야만 진정한 인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아상이 무너지고 하심이 잘 되면 모든 존재가 차츰 부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
하심만 잘 되면 인욕을 넘어서서 저절로 자비로워지고 저절로 행복이 찾아들게 됩니다.
부디 하심과인욕을 통하여 자비를 실천하는 행복한 불자님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출처 : 법공양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