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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반석 위에 선 교회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6장)
빌립보 가이사랴 (13절)
갈릴리 호수에서 32Km 북쪽에 자리한 이 도시는 원래 바알(Baal) 신앙의 중심지였다가, 그리스 점령 시대에는 여러 동굴과 샘에서 Pan(목자의 신)에게 제사하면서 ‘파네아스(Paneas)’라 알려졌고, 헤롯 대왕은 여기에 로마 황제(가이사)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습니다. 헤롯에 이어 이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된 아들 빌립(필립피)은 이곳을 도시로 확장하고 자신과 로마 황제(가이사-캐사리아)의 칭호를 따서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지명을 바꾸었습니다. 유대 전쟁(66-70년) 중에는 로마군의 본진이 이곳에 머물렀고, 예루살렘 함락 후 다시 이곳에 돌아온 로마군(티투스 장군)은 유대인 포로들을 야생 동물들에게 던지면서 전승(戰勝)을 기념했다 합니다. 이후 이곳은 로마 황제에게 속한 휴양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예수께서 물으시는 장소로 ‘빌립보 가이사랴’가 지정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황제가 지배적인 신으로 추앙받는 이곳에서 “메시아(그리스도)”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 등을 운운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합니다. 유대 전쟁 이후 가이사랴 빌립보에 자행된 잔인한 유대인 학살을 복음서 공동체가 알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최초 그리스도인 중 다수가 그리스도를 고백하다가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지요. 성전이나 교회 등, 신앙에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고백하는 믿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에 대해 낯설어하는 자리나 혐오하는 시대에, 우리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가요?
“사람들(men)이 인자(Son of man)를 누구라 하느냐?”(13절)
첫 질문은 “사람들의 견해”가 무언지 묻습니다. 그 사람들은 외부인이며 보통의 사람(man, a;nqrwpoj)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인자(사람의 아들, son of man, ui`o,j tou/ avnqrw,pou)입니다. 묵시문학에서 “인자”는 종말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칭호이지만(24:30; 35:31), 일반적으로는 인간 예수를 3인칭으로 부르는 용어입니다. ‘사람들과 인자’는, ‘나와 너’가 아니라, 삼자와 삼자로 설정합니다. 따라서 이 물음의 답변은 남에 대한 남의 생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가 (다시 살아난) 세례요한이다”라는 주장은 헤롯 안티파스의 판단이었고(14:2), “엘리야”는 많은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과 관련되며, “예레미야”는 유독 마태복음의 관심을 받는 선지자입니다(2:17; 27:9).
이 모든 견해엔 일리(一利)가 있습니다. 때로 정답이거나 사실일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이 남의 것이라면,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객관성의 영역이지만, 진실은 사실 이상입니다. 사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 무관할 수 있지만, 진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아는 것을 설명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깨달은 것을 실토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알게 된 그리스도 지식은 제아무리 옳고 타당하다 해도 나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지식과 대답에 자기 자신이 얽혀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you)는 나(I)를 누구라 하느냐?” (1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에 두 번째 질문에서는, 묻는 이와 대답하는 이가 ‘나’와 ‘너’로 얽힙니다. 예수께서는 “너희”의 생각을 물으시고, 질문을 받는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나”로 지칭됩니다. 묻는 이와 답하는 이는 “우리”라는 관계로 이어져 있고, 답하는 사람이 자신의 답변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쉽게 답할 수 있었던 첫 질문과는 달리, 답하는 자의 진실을 요구하는 두 번째 물음은 고백은 결코 가벼이 발설될 수 없어 바위보다 무겁습니다. 이 물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라, 내가 연루된 고백을 요구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은 세상을 향해 던져지지 않고, 신앙공동체 전체에게로 향합니다. 이 질문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한번 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집니다. 대답하는 베드로는 한 개인이 아니라 제자들과 교회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의 대답을 통해 오늘 우리가 대답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고백은 나(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6절)
다른 복음서들에 따르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막8:29),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눅9:20)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점이 베드로 고백의 핵심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마태복음에서만 덧붙여집니다. 서슬 시퍼런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는 장소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언급함 자체가 내포한 의미가 있습니다. “신(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용사 헤라클레스를 제우스(하늘의 신)의 아들이라고 명명한 예에서 보듯이, 신화적 세계인 고대 세계에서 용인되는 표현이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가 신의 아들로 불리곤 했습니다. 앞서, 풍랑 이는 바다를 밟고 걸어오신 예수를 가리켜,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경배한 적이 있었지요(14:33).
하지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은 여기가 처음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문자적 뜻을 지닌 “그리스도(메시아)”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 말은 ‘보내신 분’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고, ‘보내신 분의 대리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예수와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를 설명한다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는 물론, 예수와 세상과의 관계, 목적과 사명 등의 의미를 고루 담아냅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 이전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칭하는 표현은 여섯 번에 걸쳐 마태복음에 등장합니다(1:1, 16, 17, 18; 2:4; 11:2).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1:1),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1:18) 등과 같이, 구체적인 인물의 입에서 나온 고백적 언사가 아니라, 복음서 기록자의 설명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인정한 실질적 고백은 베드로가 처음이며 그래서 남다른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 내 아버지시다” (17절)
그러나 정확한 대답이 곧 참된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신앙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요. 대제사장(26;53)과 서기관들과 장로들(26:68), 심지어는 빌라도(27:17, 22)도 예수를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 오늘날의 모든 이단과 적그리스도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무신론자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남으로부터 들은 정보 차원에서 거론되는 지식입니다. 그것이 고백은 될 수는 없습니다.
고백이란 ‘나와 너’ 관계에서 존재합니다. 진실은 깨닫게 되는 것이고, 깨달음은 계시를 기반으로 합니다.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깨달음은 ‘나에게 사랑을 알게 해준 이가 다름 아닌 “당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고백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깨달음 역시 계시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을 알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17절). 하나님이 알려 주셨다는 점에서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참인 것은, 베드로가 정답을 찾아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로부터 온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공동체의 그리스도 고백과 세상의 그리스도 지식 간의 근본적 차이는 답변 자체에 있지 않고 그 답변의 원천이 어디인가에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18절)
베드로(원래 이름은 시몬)는 반석(페트로스)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새로운 하나님 공동체의 초석이 되는 인물들(아브라함, 야곱)이 새 이름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라는 새 이름은 ‘교회의 초석’이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반석(pe,tra)는 움직일 수 있는 돌(li,qoj)과는 달리(27:60), 흔들 수 없는 거대한 바위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권세(하데스의 문)가 흔들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한 인간으로서의 베드로는 쉴 새 없이 흔들립니다. 이미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려다가 빠졌던 적이 있고(14:28:32), 이후로도 예수님을 가로막아 서다가 사탄이라는 꾸지람을 듣습니다(마16:21-28). 예수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겠다고 장담하지만(26:31-35), 막상 위험이 닥치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26:69-75). 이렇듯 변덕스러운 베드로에게 ‘반석’라는 이름이 어울리기나 한 것일까요?
여기서 반석이란 흔들림 없는 인간 베드로를 지칭한다기보다는, 고백하는 인간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한 갈대이지만, 고백하는 순간만큼은 태산 같은 반석입니다. 제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잘못을 고백하며 뉘우치는 순간은 성스럽습니다. 고백은 완전한 혈육의 지식과 의지를 표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계시를 표현하는 통로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은,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교회의 토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은 특수한 동질성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 동질성이란, 베드로가 했던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삼는다는 점에서의 동질성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네게 준다 (19절)
열쇠는 잠그기도 하고 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받은 열쇠가 “천국 열쇠”인 것은, 그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땅에서 매거나 푸는 대로 하늘에서도 그대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매거나 푼다는 의미는 여러 사례로 사용되었습니다. 18:18에도 같은 말이 반복되는데, 거기서는 죄를 범하고도 돌이키지 않는 형제(신도)를 어찌할 것인지에 대한 교회의 결정과 관련됩니다(18:15-18). 요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수여하시면서 죄를 사하는 권세와 관련하여 비슷한 말씀이 선언하십니다(20:23). 이사야서에도 “내가 또 다윗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22:22)는 신탁이 있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이 말씀이 ‘가르치는 권위’를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너희는 옛사람에게서 … 라고 들었으나, … 나는 이렇게 말한다”(마5:21, 27, 33, 38, 43)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 열쇠를 행사하시는 예입니다. 새로운 시대와 낯선 환경에서, 겪어본 적 없는 상황에 부딪히고 배운 적 없는 논쟁에 휘말리는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여 잠그기도 하고 풀기도 하며 앞으로 갑니다. 그 열쇠는, 한 뛰어난 개인에게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에 주어진 열쇠입니다.
죽음의 힘이 요동치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풍랑 위의 배처럼 흔들리기도 하고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약속은, 죽음의 힘이 교회를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18절). 배가 파선된다고 해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배가 아니라, 고백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사랑을 이길 수 없듯, 진정한 고백은 언제나 죽음을 넘어섭니다. 그 고백은 우리가 알아내고 찾아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일러주고 가르쳐줄 무엇이 아니라, 주님이 깨닫게 하신 고백입니다. 그 주님은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건져주시는 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