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주재(杷柄主宰)
한가할 때 마음의 바탕, 바쁠 때 마음의 주체를 찾아라.
망리 요투한 수선향한시토개파병 (忙裡 要偸閒 須先向閒時討個杷柄)
요중 요취정 수선종정처립개주재 (鬧中 要取靜 須先從靜處立個主宰)
불연 미유불인경이천 수사이미자 (不然 未有不因境而遷 隨事而靡者)
바쁜 가운데 한가함을 얻으려면 모름지기 먼저 한가할 때 마음을 조절하는 손잡이를 확보해 두어야 한다.
떠들썩한 가운데 고요함을 얻으려면 모름지기 먼저 소요한 때 마음의 주재자(主宰者)를 세워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사안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토개파병(討個杷柄)의 토(討)는 제압한다는 의미이다.
파병(杷柄)은 손잡이나 자루를 뜻한다.
주재(主宰)는 어떤 일을 중심이 되어 맡아 처리한다는 뜻으로 주관(主管)과 같다.
인경이천(因境而遷)은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것을 말한다.
수사이미(隨事而靡)는 사안에 따라 흔들리는 것을 뜻한다.
바쁘게 되면 차분히 생각할 여유를 갖기 어렵다.
높은 자리에 오를 수록 한가로운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다.
이는 단순히 쉰다는 차원이 아니라 상황과 사안을 보다 면밀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자루를 잡는다는 것은 곧 마음가짐의 기본바탕을 마련한다는 취지이고, 마음의 주재자를 세운다는 것은 곧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터를 확보하라는 주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때와 장소에 따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정부분 흔들리기 마련이다.
문제는 중심을 잃지 않는데 있다. 평소의 훈련이 필요하다.
한가 하고 고요할 때 이런 훈련을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서성(書聖) 왕 희지는 지금의 산동성 낭야 출신으로 자는 일소이다.
우군(右軍) 장군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왕우군(王右軍)으로도 불렀다.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의 조카이자 왕광의 아들이다.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인물이 왕 희지의 일곱 번째 아들 왕 헌지(王獻之)이다.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고 한다.
왕 희지는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우군장군(右軍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 등을 거쳤다.
그는 나름 경세의 재략이 있어 장수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재상 사안(謝安)에게 민정을 논한 글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던 까닭에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내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후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 간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도사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採藥)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영화 9년(353) 3월 3일, 회계내사로 있던 왕 희지가 아들 7명을 포함해 41명의 명사와 함께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 난정(蘭亭)에 모여 대규모 연회를 가졌다.
당시 이런 연회는 사족(士族)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삼월 삼짓날 계사(契事)의 형식을 빌린 이날 모이믄 술잔을 물에 떠내려 보내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술 3말을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 형식이었다.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왕 희지를 비롯해 사안과 손작 등 26명은 시를 지었고, 나머지 15명은 시를 짓지 못해 벌주를 마셨다.
이날 지은 시를 모아 철을 한 뒤 왕 희지가 서문(序文)을 썼다.
참여 인사 가운데 가장 문명(文名)이 높았던 손작이 집회를 마무리하는 후서(後序)를 썼다.
왕 희지가 쓴 서문이 바로 그 유명한 "난정서(蘭亭序)"이다.
당나라 때 하연지(何延之)가 기술한 "난정기 蘭亭記"에 따르면 당시 왕 희지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잠견지(蠶絹紙)에 서수필(鼠鬚筆)로 총 28행, 324자를 써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갈 ‘지(之)’ 자가 가장 많이 24자가 들어갔으니 자획에 변화가 일어 한 글자도 똑같이 쓴 글자가 없었다.
왕 희지도 술이 깬 후 수 십번을 다시 써도 이에 미치지 못해 스스로도 ‘신의 도움을 받았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 옮겨온 글 =
漢陽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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