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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현미경보다 미세한 시인의 눈 [Zoom In] 허만하 시인 |
제2의 현실, 뮤즈가 선사한 ‘느린 걸음’
허만하 시인은 새벽 2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네 살배기 손주 녀석조차 조용한 시간이다. 그 고요함 속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의과대학생이었던 시절부터 몸에 밴 버릇이다. 저녁에는 항상 10시쯤 잠자리에 든다. 아침 식사는 7시 30분에 하고, 조금 쉬었다가 며느리가 맡겨 놓는 손주와 놀기도 한다. 오전 9시 뉴스를 보고, 여기저기에 전화도 건다. 또 저녁이 오면 그 저녁을 이어가는 라이프 사이클을 그리고 있다.
1992년에 발병한 불수不隨의 몸은 그에게 느린 걸음을 선사했다. “감성이 아니고 사물 뒤에 있는 내면의 구조를 얻어내고 싶다”는, “언어로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싶다, 제2의 현실을 만들고 싶다”는 허 시인에게 뮤즈는 그에 합당한 걸음의 속도를 선사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7월 11일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던 날, 부산 해운대에 있는 조선비치 호텔에 들어섰을 때 허 시인은 커피숍에서 체크인 프론트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악력은 30년 연하인 기자가 무색할 정도였고, 무엇보다 참 따뜻했다. 동행한 김종해 시인은 커피를 주문했고, 허 시인은 흑맥주를 주문했다. 취잿길의 언제나 변함없는 벗이며, 어느덧 전문 카메라맨의 눈빛을 닮아가는 김요일 시인도 흑맥주를 주문했다.
▶이창동 문화장관이 취임 직후 직원들에게 권했던 책이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였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셨습니까?
“옛날 작가들, 가령 소설 중에는 좋은 게 많지요. 이청준의 「이어도」 같은 소설 말이죠. 시집을 골랐으니 우선 반가운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그 선정에 내것이 들어갔다고 해서 그 어른이 잘못 본 게 아니냐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좋은 시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하학적 이미지의 ‘수직’은 실존과 도전의 의미
▶선생님의 시 「신현의 쑥」을 보면 “폭포처럼 수직으로 선 알몸의 시”가 되길 자청하기도 하고, 「한 시인의 데드마스크」를 보면 “나의 목소리를 땅에 눕히지 말라/ 죽음은 땅에 쉴 수 없다// 눈부신/ 벼랑의 높이에서 떨어지던/ 수직의 목소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 「장미의 가시 · 언어의 가시」를 보면 “시인의 언어는 기대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수직으로 선다/ 중천에 얼어 있는 눈부신 햇살”이라는 대목도 나옵니다. 왜 자꾸 ‘수직적’ 솟구침을 외치십니까? 몸을 낮추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편안하게 가지라는 권고가 더 그럴 듯하게 들리는 시대에, 선생님의 ‘수직’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습니까?
“가급적 작위적 언어보다는 자연발생적 말을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이미지를 의과대학 때 읽은 오든의 시에서 빌려 썼습니다. 오든의 시에 ‘버티칼 맨’이란 시어가 나옵니다. 수평적 인간 말고 수직적 인간이 되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수평적으로 땅에 기어다니던 시절에서 벗어나 손을 놓고 일어섰을 때 비로소 손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고, 손의 자유와 함께 자각적 자유의 실존성을 깨달아 가는 것이지요. 메를로 퐁티의 책을 읽고, 그가 수직성을 강조했으며 수직은 실존의 표현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수직은 안일이 아니고, 수직은 현실 안주가 아닙니다. 수직은 실존의 자각입니다. 도전적 이미지가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서도 수직은 높은 곳을 지향합니다. 저 자신이 깊이 생각해보지는 못했으나, 수직이라는 말에 깃든 뒷배경은 그렇습니다. 기하학적 이미지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시의 소재와 서술과 상징과 은유가 시간적·공간적 한계를 부인하고 저항한다는 점에서 평론가들은 ‘우주적 생명력에로 정박 없는 항해’라는 말로 선생님의 시를 해석해내고 있습니다. 무한대의 폭과 깊이를 가진다는 의미로 시가 팽창하다 보면, 그것이 품어내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구체적 진실을 붙들어 매는 구심력 또한 강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선생님의 시가 우주적 팽창에 시적 리듬을 갖다 대고 있다면, 그것을 안으로 세우는 구심력은 무엇입니까?
“저 자신이 일단 깊은 생각을 해봐야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자각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잘 모른다고 말해야 좋은 단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느낌으로는 약간 귀향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 자신이 근래에 읽은 횔덜린의 시에도 그런 것이 나왔습니다. 어디로 가느냐 하는 질문 앞에 결국은 귀향이라는 화두를 들고 있게 됩니다. 자신의 얼굴이나 생물학적 설명 말고, 원심력에 버금가는 구심력을 설정한다는 것이, 사실상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일 뿐입니다. 귀향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것을 하고 싶다는 지향일 뿐입니다.”
발병 후부터 걷고 싶다는 열망
▶선생님의 고흐에 대한 탐구는 인상적입니다. 가령 「한 켤레의 구두- 고흐의 눈 4」를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절망을 찾아 다시 떠나야겠다. 고추잠자리는 아침 태양 최초의 빛으로 날개를 편다. 최후의 전신轉身을 위하여 나는 다시 길 위에 서련다.” 고흐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제값에 팔아본 적이 없는 화가입니다. 고독과 병고 속에서 목숨을 내거는 실존적 모험에 시달렸던 화가입니다. 선생님 자신의 운명을 고흐의 그것에 대입하시는 욕망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고흐가 그야말로 자신의 예술을 위한 열망을 태우는 데 저는 존경과 그리움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발병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걷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원초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걷는다는 보행의 문제인 것이지요. 고흐의 구두에 대한 저의 착상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산 스페인제 구두가 있었는데, 그걸 신고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그 구두를 생각해서 많이 흐느꼈습니다. 물론 ‘길’ 위에 선다는 상징성을 새로 깨달았습니다. 고흐가 탄광촌에 가서 목사로서 실패하는 대목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형편없는 가난뱅이가 거룩한 일을 하는 것에 감동을 받은 것이지요. 고흐의 그림을 보고 네덜란드에 가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테오와의 우의도 존경할 만합니다.”
▶선생님도 그런 형제분이 있으신지요?
“아우가 있었는데 죽었습니다. 5살 터울의 아우로 오래 됐습니다.”
▶선생님의 산문 평전 『청마 풍경』을 보면 유치환이 우주의 무한, 우주의 영원성, 신의 무한성에 절망했다는 관찰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무한 앞에서 유한하기 이를 데 없는 극미한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목도하게 됐을 때, 자신의 실존이 엄습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는 매우 숭고한 절망이 되는 것이겠습니다. 청마 유치환은 시 「광야에 와서」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 이 절망감이 도대체 시인과, 그가 지어내는 시를 읽는 독자 사이에 공유가 가능하겠습니까?
“요즘 독자들의 문제에 시단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옛날하고 다릅니다. 주어진 것을 수용하는 것보다 감성과 사유의 깊이가 접선으로 이어지게 하고, 유한 존재를 철학적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절망’이라고 할 때 고유성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절망에도 질이 있는 것입니다. 공통된, 보편적인 것보다, 각자가 저마다의 절망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절망을 추상명사로서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고유한 절망과 만났을 때 생기는 게 아닌가 합니다.”
30년간 시에 대한 냉담·휴지기는 시적 전신을 위한 준비기간
(동석했던 김종해 시인이 말을 잇는다.)
(김종해) “허 시인이 시에 냉담하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냉담 기간이 너무 길지 않았나 하는 얘기죠. 그 긴 시간 동안 시를 쓰기 위해 뜸을 들이고 내용을 곰삭게 하는 기간이 포함돼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증명이 됩니다. 허만하라는 시인의 시가 후반 들어 절제된 시로 빛나 보일 때 뜸을 들인 기간으로 소요됐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평생 쓴 시가 시집 두세 권이라면 너무 과작이 아닌지요.”
(허만하) “폴 발레리도 미분 적분을 20년 공부했습니다. 물리학과 과학을 공부하다가 『해변의 묘지』가 나온 것입니다. 30년이란 휴지기는 저의 게으름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 보건대 그렇게 해서 성과물이 있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김종해) “30년이란 오랜 세월입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 나중에 쓰려고 해도 좋은 시를 잘 못 쓰게 됩니다. 허만하 시인에게는 시를 향한 구심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30년을 삭혔어도 좋은 시가 없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한 냉담은 시인의 의도적인 중단입니까?”
(허만하) “타율적인 것입니다. 과작이란 좋은 말은 아닙니다. 게으름은 제가 병리학에 집중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고요.”
(김종해) “시가 꼴보기 싫었던 것은 아닙니까?”
(허만하) “아닙니다. 시에 관심을 계속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로고스와 파토스가 제 안에서 지하수처럼 통해 있었던 것입니다.”
(김종해) “허 시인께서 특히 여행을 하면서 시가 날카롭고 좋아졌습니다. 과학자에서 나아가 시인의 눈으로 보고 들어간 결과가 독자의 눈에 색달라 보인 것이지요. 단순한 여행시가 아니었습니다.”
(허만하) “그 무렵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옛날 동기창(董其昌, 명나라 화가)이 그랬습니다. ‘행만리로 독만권서行萬里路 讀萬券書’라고요. 내 큰 꿈이었습니다. 요즘은 정년 퇴직해서 세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풍경이나 믿음을 통한 것입니다.”
(김종해) “의학자 생활을 끝냈으니 이제 시 생각만 하십니까?”
(허만하) “시에 대한 부채감과 갈등은 항상 있었습니다.”
(김종해) “그러한 갈등이 시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하지 않았군요.”
(허만하) “지방에서는 조금씩 쓰고 있었습니다. 게으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김종해) “시에 대한 태만이 아닐까요?”
(허만하) “모리스 블랑쇼가 그랬어요. 시를 쓴다는 것은 안 쓴다는 것과의 싸움이다.”
(김종해) “괴롭지 않았습니까?”
(허만하) “실제로 괴로웠습니다. 내가 시인인가 봅니다. 허영심인 상태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빠져나가자 시인으로서의 느낌이 괴로움이 됐습니다.”
(김종해) “태양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서울……”이라고 읊은 김경린 시인이 있었습니다. “비가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날카롭게 해야 했기 때문입니까?”
(허만하) “나는 너무 좋습니다. 김경린 시인의 시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김종해) “수직, 죽는다, 이 두 마디가 매우 강렬했습니다.”
(허만하) “비는 그저 은빛으로 내린다.”
(김종해) “우리 시사詩史에서도 역동적인 표현을 끌어낸 것은…….”
(허만하) “나는 무심코 나온 말인데…….”
(김종해) “허만하 시인은 고희를 지나 어느덧 원로시인이 되셨는데 시만큼은 감각적으로 첨예해지고 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시사가 요구하는 언어의 긴장감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를 쓰지 않고 지냈던 중년의 그 냉담기간 동안에도 익을 수 있는 것을 삭히고, 그것에서 뽑아내는 원숙함이 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허만하) “나는 굉장히 젊고 싶습니다. 새로운 것과 사귀어야 젊어질 수 있습니다. 외국 것에도 마음을 열고 있으면 항상 젊어집니다. 사랑을 갖고요. 낯선 것에 방어적인 자세보다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김종해) “외국 시 가운데 누구 시가 오래 인상에 남습니까?”
(허만하) “초기 영향은 오든에게서 받았습니다. 우리 나라 시들이 너무 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성도 있으면서 동시에 낭만적 감성도 있어야 독자를 끌어갈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 젊은 시에도 좋은 게 많습니다. 프랑스의 젊은 지성들에게서 배울 게 많을 듯합니다. 독일시는 너무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프랑스 시는 지적으로 번뜩이는 게 있습니다. 고기 비늘 같습니다.”
▶1999년 가을,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가 출간됐을 때, 한 평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문단은 그야말로 먹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린 대못 같은 시편들에 폐부가 찔린 형국이었다. 문학의 위기니, 시의 죽음이니 하는 낭설들이 길바닥의 은행잎처럼 나뒹굴던 시절이었으니 오죽했으랴. 게다가 칠순의 노시인이 30년만에 발간한 두번째 시집이라는 사실이 그 충격을 배가시켰다. 문단에서 거의 지워졌던 이름이 그야말로 유령처럼 홀연히 돋을새김했던 것이다. 문명의 역사와 우주의 질서를 한눈에 꿰뚫어보는 혜안과 사물들의 내밀한 역학관계를 헤아리는 감식안,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어조 속에 깃든 자유로운 정신 등 허만하 시인의 시는 수평적인 속도감에 도취돼 있던 20세기 막바지 한국문학의 심금을 뒤집고도 남을 정도였다.” 또 어떤 평자는 “허만하의 시는 지난 천년의 막바지에 마치 스톤헨지의 유적처럼 발굴되었다”고도 말했습니다. 30년의 세월은 왜 그토록 필요했습니까? 견디는 시절이었습까? 삭히고 익히는 기간이었습니까?
“너무 많은 칭찬은 정말 욕입니다.(웃음) 지난 30년 동안은 상당부분 병리학자로서의 기간이었습니다. 동시에 시인으로서 전신轉身을 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과학에 집중한 것도 결국은 시적인 전신을 위한 기간이었다는 뜻입니다.”
청마 유치환 시인에게 결혼 주례 부탁
▶1969년 첫시집 '해조'와 1999년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사이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을 세 가지만 말씀하신다면요.
“……”
▶청마에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례사 가운데 오늘 이 자리에서 기억나는 대목이 있습니까? 부인까지도 청마의 애독자이자 청마의 제자가 된 이유는요?
“정치가나 시장이나 국회의원 같은 주례가 싫었습니다. 나는 시인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 무렵 청마 시인이 가까이 있었던 게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거절하시더군요. 자격이 없다면서요. 아마도 자기에게는 아들이 없다는 이유였겠지요.”
▶강우방 교수는 허만하 시인에 대해 “절대시를 추구하는 세계적인 현대시인, 시화동원(시와 그림은 근원이 같다)이란 고전적 명제를, 본다는 점에서 현대적 시각으로 치열하게 탐구해왔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미적 통찰의 한 방편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겉입니까, 속입니까? 움직임입니까, 멈춤입니까? 아니면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어떤 의미입니까, 형태입니까?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인은 보는 사람입니다. 총체적인 것을 보고 나서 아주 미세한 것을 봅니다. 또 그것을 재조립해서 전부로 봅니다. 풍경을 볼 때 그렇습니다. 저는 남들이 버리는 것, 그리고 묻혀져 있는 가치를 재발견할 때 좋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재발견하는 것, 의미 없는 것의 의미를 찾아내 재조립하는 것, 그것이 본다는 것의 절차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전자현미경을 보아 왔는데, 그것이 굉장히 미세한 것을 보도록 영향을 주었습니다.”
▶“허만하는 풍경의 시인이다”라는 말도 참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풍경이나 저마다의 정신의 자화상 같은 것이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말라르메가 ‘세계는 책이다’라고 말한 것을 빌려서 표현해봐도 풍경이란 굉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책입니다. 책이 읽혀지기를 기다려야 책 속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처럼, 아름다움이 보여지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풍경이 있는 것입니다. ‘길 위에 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말은 메타포로 쓰기도 하지만, 실제로 풍경을 만나러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더 공부하고 더 쓰고 싶습니다.”
시인과 의학자의 동행
▶해부학 의사로서 죽은 사람의 심장을 꺼내는 일과, 시인으로서 산 사람의 심장을 만지는 일은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릅니까?
“시인은 심장을 꺼내는 게 아니고……”
(김종해) “없었던 심장을 만들어서 달아주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라는 글에서 선생님은 “자연과학적 원리와 시는 내 안에서 동행했다. 두 길의 만남은 교차가 아니라 한 방향을 향하는 겹침으로 나타났고, 이 길 위에서 보편적인 진리가 아닌 구체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보는 또 하나의 현미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시를 전적으로 지향하기 위해서 다른 쪽을 버려야 한다는, 혹은 버릴 수도 있다는 번민은 진정 한번도 없으셨습니까?
“처음엔 의학을 버리느냐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시의 길을 위해 결국 의학을 버리느냐 갈림길에 서 있는데, 참, 욕심이랄까, 양립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괴테가 자연과학자이면서 『파우스트』를 쓴 시인이 됐듯이 말입니다. 양자를 가질 수 있으면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느냐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최근 시인 박태일 경남대 교수가 「세상을 녹이는 납물의 언어」라는 글에서 “허만하 시인은 실재를 그리는 현상론자가 아니라 납물의 언어로 세상을 녹이는 언어 연금술사라고 규정하면서, 그의 시는 실재의 풍경이 아니라 그에 투사된 시인의 관념을 언어적 양감에 치중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어떤 답변을 주시겠습니까?
“납물의 언어라는 말을 제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니 대답을 못 하겠습니다.”
▶김춘수 시인이 한국현대시 100년을 50여 편을 통해 정리한 『김춘수 사색사화집』이란 책을 냈습니다. 황동규 시인을 ‘당대 일급의 스타일리스트’라고 말하고, 허만하 시인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관념시’라고 말했습니다. 김춘수 시인에게는 어떤 답변을 주시겠습니까?
“저 자신의 체질을 살려 깊은 사유로 파고들어가겠습니다. 아직 젊으니까(김춘수 시인에 비해서?) 그 길로 나가겠습니다. 저 자신의 문체를 완성하기 위해, 사유의 층이 깊이 겹쳐진 질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법적 다양성을 살리고, 인식의 복안성(잠자리눈을 닮은)을 발전시키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미지는 하나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선조적 인식이나 교조적 인식은 원치 않습니다. 시인이 되는 것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못 하면 시인으로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제가 박태일 씨의 비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문체론적인 문제로 시인을 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상당부분 의도적입니다. 세상은 은유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은유로 사귑니다. 아직은 헤매고 있는 단계입니다. 실제 생각하고 있는 게 잘 안 됩니다.”
1997년에 병리학 교수직을 은퇴한 허 시인은 1999년 두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에 이어 2002년 세번째 시집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를 펴냈다. 그 사이 산문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2000), 『청마 풍경』(2001), 『길과 풍경과 시』(2002)를 펴냈으며, 지금은 오로지 시만 쓰고 시만 생각하고 있다. 문단 사람들은 허 시인이 있어 부산 시단詩壇이 더욱 풍요로워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가 《부산일보》에 후배와 번갈아가며 쓰고 있는 문학편지 「아침숲길」도 인기 절정이다.
딸 둘(경혜 마흔 살, 경원 서른아홉 살)과 아들 하나(서구 서른세 살)를 두었는데, 모두 의학자로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큰딸은 ucla 약리학 박사이고, 둘째는 콜로라도 대학 미생물학 박사이며, 막내는 진단방사선과 전문의이다.
허 시인은 얼마쯤 후 시선집 그리고 네번째 시집을 낼 계획을 갖고 있다. 청마의 「깃발」이란 시를 볼 때마다 “우선 먼저 깃발과 수평선이 십자가처럼 교차하는 구도가 기하학적으로 보인다”는 허 시인은 아직도 감성에 묶이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일지도 모른다.
*기사제공 계간 시인세계 - (글 / 조선일보 = 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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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허만하
"언어를 지도삼아 낯선 풍경을 순례"
1. 길의 겹침
다도해는 아름다웠다. 섬 사이로 모습의 일부를 드러내는 바다는 잔잔하였다. 고함을 지르면 목소리가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떠있는 섬은 바다에 그늘을 담그고 조용히 자기 그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에 붙어 있는 조개같이 섬 자락에 집들이 발을 붙이고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만나는 일이 공연히 반가운 길이었다.
처음으로 찾아갔던 섬 내나로도(內羅老島) 끝은 벼랑이었다. 이 벼랑 위에 귀양살이 왔던 이건명이 사사의 형을 받아(경종 2년) 독배를 들었던 자리가 있었다. 이 나지막한 벼랑 위에서 내려다 본 넓은 갯벌은 신선한 초록색이었다. 마침 썰물로 물이 빠지고 파래로 덮여 있는 넓은 해변이 거리낌 없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언덕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풍경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싱싱한 초록색 파래 밭 끝에 자리한 조그마한 야산(물이 들면 섬이 될지 모른다)의 붉은 흙빛 위로 우리가 건너 왔던 제1 나로교가 멀리 2월의 하늘에 나지막하게 떠 있는 경관이었다. 선연한 홍색을 머금고 있던 그 흙빛을 나는 한동안 응시했다.
먼 옛날 시의 길에서 만난 적이 있는 남도의 그 빛깔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사람들은 다시 길을 만든다. 나는 당연한 것처럼 제2 나로교를 건넜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윤동주). 별을 바라보며 한 젊은이는 운명처럼 시의 길 위에 섰던 것이다. 해방 후 길거리 고물가게에서 샀던 학생용 현미경을 사들고 집으로 뛰었던 골목길. 운동장 가장자리에 솔밭이 있고 그 안에 고인돌이 있던 교정에서 젊은 물리선생 손가락 끝을 따라 여름하늘 별자리를 가슴에 담고 돌아가던 중2의 밤길. 포충망을 들고 황악산 직지사를 다녀오던 가을의 길.
서너 명 친구들과 만든 프린트판 ‘팔공과학’ 창간호를 들고 흥분했던 화학 실험실의 복도. 화약냄새 자욱하던 전선의 참호 안에서 떠오르던 이런 길이 시의 길을 만나는 것을 보았던 것은 6ㆍ25 한국전쟁(고 3때)의 폐허를 휩쓸던 소용돌이 속에서였다. 나는 맑은 물 냄새를 찾는 한 마리 은어처럼 정신의 가치를 찾아 헤매면서 목마름처럼 책을 읽었다.
두 길의 만남은 교차가 아니라 한 방향을 향하는 겹침으로 나타났다. 이 길 위에서 보편적인 진리가 아닌 구체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보는 또 하나의 현미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연과학적 원리와 시는 내 안에서 동행했다. 이질적인 두 가치를 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조정하면서 나는 내 정신의 반경이 자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길 위에서 시가 가지는 다양성의 지평이 중요하다는 각성 아래 현대 영미 시와 다른 언어권의 시의 세계에 관심을 베풀면서 우리시의 체질을 비추어 보기도 했다. 나는 세계에 대한 나의 접근을‘복안(複眼)의 인식’이라 생각했다. 풍경이란 형이상학적 사유로 읽어야 할 한 권의 시집이라 생각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나는 벌써 내 미래의 길 위에서 가슴 설레고 있다.
2. 꽃이 피는 이유
야생의 복수초 군락은 외(外)나로도에 들어서서 길이 S자로 굽이치는 마지막 고갯마루 가까운 산비탈에 숨어 있었다. 우리가 머루 덩굴이 늘어져 있는 숲 속의 쌓인 가랑잎 틈새에서 샛노란 꽃잎을 한껏 펼치고 있는 복수초를 찾아내고 사진에 담을 때 셔터를 누르려는 손처럼 이곳을 안내하던 친절한 노인 목소리도 가늘게 떠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반가움 때문인 것 같았다. 각설탕같이 버적거리는 얼음을 비집고 피어 있던 복수초 꽃잎의 맑은 힘을 우리가 처음 보았던 것은 만 일년 전 제주도의 한라수목원에서였다. 그 꽃을 고흥반도 끝 외진 섬에서 다시 만나 보는 일은 지긋한 감동이었다.
“장미가 피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핀다.”라고 그의 시의 한 구절에서 말했던 것은 독일의 종교시인 질레지우스다. 창조에는 이유가 없다. 시는 꽃처럼 피는 창조다. 창조는 이유 또는 목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시는 작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비탈진 숲 속에 피어있던 야생의 복수초 군락은 아름다웠다. 한겨울에 피는 꽃이라 얼음새꽃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복수초.
3. 연두빛 목숨의 향기
올해 들어 가장 추웠던 날(1월4일) 찾아 보았던 물금의 낙동강 유역 풍경은 광활했다. 이 충적평야 언저리 둑길에서 푸른 미나리꽝과 쇄빙기 톱을 본 것은 뜻밖이었다. 논둑에 피워 둔 화톳불로 추위와 싸우며 농부들은 톱으로 두꺼운 얼음장을 자르고 거의 허벅지 중간까지 차 오른 물 속에서 겨울 미나리를 한 줄기씩 챙기며 다발로 엮고 있었다.
여물 쓸 듯 듬성듬성 썰린 초록색 미나리 토막을 고인 물에 마구 뿌리면 조각뿐인 몸 토막에서 실 뿌리가 나고 계절을 가려 메밀꽃보다 작은 흰 꽃을 피우며 향긋한 향기를 온 몸으로 만들어낸다고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시를 생각했다. 시는 논리가 아닌 향기다. 언어로 만들어내는 향기다. 미나리는 잘린 몸으로 시시각각 시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죽음을 거부하는 생명의 힘이다. 내가 나로도 갯벌에서 보았던 파래는 뿌리도 줄기도 없는 눈 먼 엽상채의 목숨이었다. 그 싱싱한 초록색은 어떤 향기를 머금고 있었을까. 릴케는 생명과 죽음을 같은 차원에서 수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섬세한 시인이 생명의 지평을 극한까지 확대하기 위한 수사라는 사실을 근년에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위대한 시인이다. 시의 영토에는 한계가 없다.
언젠가 한번 소개한 이야기지만 추사는 아끼는 그의 글씨와 그림을 한 자 남짓한 길이로 자른 대나무통 안에 말아 넣고 밀초로 굳게 봉한 것을 배에 싣고 멀리 나아가 바다에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펄럭이는 그의 옷소매에서 시를 읽었다.
그것은 자기 작품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자기가 창조한 서체에 대한 높은 긍지가 낳은 외로운 행위라고 나는 해석한다. 당대의 몰이해에 직면한 그는 미지의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감성을 신뢰했던 것이다. 그런 가열한 한때를 추사가 가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외로움은 추사만의 것이 아니라 시의 속성이기도 하다.
4. 새로운 현실 만들기
섬진강 어귀에서 물길을 따라 구례에 이르는 길은 아직 때묻지 않는 정갈함을 지니고 있다. 철따라 변하는 강물 물빛을 조용히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이 길은 만들어 준다. 나는 지리산 시암재를 거쳐 정령치를 지날 때면 괴나리 괴나리 봇짐을 매고 어른 뒤를 따르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을 그려보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어린 아이 때부터 아버지(명창 송우룡)를 따라 명산대천을 찾아 노래 공부를 하던 어린 송만갑의 모습이다. 송만갑은 구례에서 태어났다. 나는 송만갑이 걸었던 길에 시인의 길을 비추어 본 것이다. 열세 살 무렵 이미 명창이란 명성을 얻었던 그는 집안에 내려오는 소리의 법통을 깨고 혼자서 만들어 낸 새로운 노래를 고집했기 때문에 동편제의 시조 송흥록의 후손인 아버지는 송씨 가문 노래의 전통을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려 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두 길의 갈등은 심했다.
새로운 소리를 얻기 위하여 집을 버린 송만갑의 길은 그 개인의 길이 아니라 모든 독창적인 예술가의 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길은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추사의 대나무 대롱과는 또 다른 상징이다. 이 두 상징은 서로 다르지만 영광의 고독이란 지하수 물길에서 서로 손을 잡고 있다.
지리산 둘레 길은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지리산 북동 자락을 가로지르는 운봉길은 언제나 조용한 고원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나는 이 길에서 우리 겨레의 상징과 만나는 또 하나의 상징을 볼 수 있었다. 마른 풀잎을 물고 날개를 젓고 있는 한 마리 산새를 보았을 때 떠오른 먼 나라의 상징이다. 그 상징은 그 자리에서 우리의 상징과 동심원을 이루며 하나로 겹치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말한다.“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모든 길은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개성을 찾아내고 그 개성에 깊이를 만들어 주는 것도 시의 힘이다.
사람이 없는 겨울 바다 모래사장에 내려섰던 것은 내나로도 덕흥리에서였다. 유난히 돌담이 많던 비탈진 마을을 지나 솔밭을 벗어나자 물결 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솔바람 소리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모래 쓸림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구에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의 바다를 생각했다.
시의 탄생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그것이 번득이는 일순의 계시인지 풀잎에 맺히는 이슬 같은 증류작용의 결과인지는 알 길 없으나 시는 말을 재료로 하는 끊임없는 새로운 현실 만들기다. 그 영구운동은 한번도 본적 없는 지평선 너머 세계에 대한 꿈을 동력으로 삼는다고 결의처럼 생각했던 것은 귀로에 우회했던 순천만 갈밭에서 살아 남아 있는 원시 앞에 섰을 때였다.
(한국일보 2003 2.26)
연보
▲ 1932년 대구 출생
▲ 1957년 경북대 의대 졸업
시 ‘果實(과실)’ 등으로 월간 ‘문학예술’추천 완료 등단
▲ 1962년~현재 ‘현대시’ 동인
▲ 1997년 부산 고신대 의대 교수 정년퇴임
▲ 시집‘해조’‘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일본어 시집 ‘銅店驛(동점역)’
산문집 ‘청마풍경’ ‘낙타는 십리 밖 물냄새를 맡는다’
‘길과 풍경과 시’ 등
▲ 박용래문학상(1999) 한국시인협회상(2000) 등 수상
고흐의 풍경/허만하
숨을 거둘 때까지
꿈을 비웃으라.
피가 흐르는
나의 배경에서는
까마귀가 날고 있다.
유황처럼 끓고 있는
보리밭 위를
검은 덩어리들이
낮게 낮게 날고 있다.
한 마리의 새가
날기 위해서도
하늘은 바다처럼
일렁이어야 하고
언어는 피 흘리며
보리밭처럼 끓지 않으면
안된다.
허만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中에서
첫댓글 허만하 시인을 소개해 주신 신선생님께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