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_문학보다 더 문학적인 비문학 도서로의 항해.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 라고 내게 묻는다면 확실하게 말 할 수는 없지만 아마 문학을 통해서 좀 더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물론 문학이 없이도 우리의 인생은 한권의 드라마틱한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어서 너무 지나치게 많은 인간적인 모습에 진저리쳐질 때가 많다. 그러나 가끔은 나의 인생이 아닌, 멀뚱한 방관자의 입장에서 문학을 통해 각가지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책의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훑어보는 것은 확실히 특별한 재미이다. 가끔은 좋은 책을 만나면 방관자라는 자신의 신분도 잊어버리고 책 속의 인물들 사이에 끼어들어 작가가 허락하지 않은 또 다른 작중인물이 되어 작품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랄 때다 있다. 이때는 이미 나는 작품 속에 너무 몰입되어 있었는데 책을 덥고 일상이라는 현실로 빠져나왔을 때에도 얼마 전까지 그 작품 속에서의 세계가 너무도 리얼하여 한동안 멍해질 때가 있다. 그런 책들이 소위 말하는 감동을 주는 좋은 문학 도서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문학에 관한 책읽기는 마치 갈증이 날 때 소다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읽으면 읽을수록 도대체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오리무중의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한때는 문학에 관한 책을 멀리 하고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러한 비문학 관련 도서들 중에서 내가 지금껏 문학을 통해서 얻었던 인간에 대한 이해보다도 더 폭이 넓은 인간적인 진실을 발견하고 흥분할 때가 있다. 어떤 책은 문학보다 더 인간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문장 또한 문학적 문장보다 더 빼어나고 아름답다. 아래의 문장을 보자.
그리고 사람들이 떠오르는 태양보다 지는 태양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여명은 사람들에게 온도계나 기압계, 그리고-개화가 덜 된 사람들에 있어서는 -달의 모습이나 새들의 비상, 조류의 간만이 이미 가르쳐준 것에 좀 보탬이 되는 지시를 제공해 줄 뿐이다. 그러나 일몰은 그 신비스런 모습 속에 바람, 추위, 그리고 더위나 비의 변화-그 속에서 인간의 육체적 존재가 흔들리는 -를 키우고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 솜털 같은 성좌 속에서는 양심의 유희 또한 읽어지는 것이다. 하늘이 석양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때면 농부는 밭갈기를 멈추고, 어부는 배를 붙잡아매며 , 미개인은 빛이 사그라져 가는 불가에 앉아 눈을 깜박이는 것이다. 지나간 일을 회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커다란 즐거움이지만, 그 기억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 회상을 해보는 것을 좋아하더라도, 그 고된 일들과 고된 일들을 다시 겪어 보고자 하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추억은 인생 그 자체이기는 하나, 인생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것이다. 그러기에 짧은 환각 속에서, 사람들이 불투명한 힘인 안개와 번개-하루 온종일 마음속에서 막연하게 그 모호한 갈등을 파악하였던-가 드러남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태양이 천국에 사는 어느 수전노의 작은 동전처럼, 고요한 물의 반짝이는 표면을 향해 내려올 때나, 또는 그 태양의 둥근 표면이 딱딱하고 톱날처럼 생긴 나뭇잎 같은 산봉우리의 윤곽을 두드러지게 할 때인 것이다.
작가는 배 위에서 석양이 삐죽 솟아오른 섬들에 걸려 사라져가는 여명을 보면서 이러한 상념에 빠진다. 석양이 고요한 물의 반짝이는 표면을 향해 내려올 때, 그리고 순간 톱날처럼 생긴 나뭇잎 같은 산봉우리의 윤곽을 두드러지게 할 때 우리 인생의 고뇌 또한 한낮에 몰아쳤던 안개와 번개 같은 것이며 인생이란 ‘짧은 환각’과 같은 것이라는 우리 인생의 덧없음을 환기시킨다. 마치 수상록의 한 부분이나 소설의 한 장면 묘사를 연상시키는 윗글은 현대 구조주의 사상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의 한 대목이다.
내가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학교 가는 길에 동네 곳곳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로 시작하는 새마을 운동 노래가 하루 종일 들리고 도심 한복판에 ‘백억불 수출. 천불 소득’이라는 슬로건에 익숙해진 중고등 학창 시절을 거쳐서 대학에 들어와 서서히 머리가 깨어나던 시기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책을 읽은 후 발전이 곧 미덕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간 국토개발이란 미명하에 자행된 수많은 환경파괴로 사라져버린 우리의 강이나 숲, 늪지대 등이, 사라져버린 아마존의 밀림과 흔들리며 오버랩 되었다. 내가 살았던 서울이라는 괴물 같은 도시만 해도 그렇다.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서울은 비교적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때는 공휴일이면 막대 그물을 가지고 송사리며 미꾸라지를 잡으러 양재동 말죽거리로 자주 놀러갔었다. 양동이에 미꾸라지를 제법 잡아오면 할머니는 “실하고 오지다.”며 미꾸라지를 소쿠리에 넣고 소금을 뿌리고 박박 문지른 후 추어탕을 끊였는데 나는 비리다고 잘 안 먹었지만 할머니의 역정에 못 이겨 억지로 한술 떴을 때 싸한 방아 잎의 향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나는 것만 같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가끔 끝없이 펼쳐진 대방동 미나리 밭을 지나 걸어서 학교에 가곤 했다. 차비를 아낀 돈으로 집으로 돌아올 때 서울의 농부 아저씨들로부터 한 아름의 미나리를 사 들고 와 할머니를 기쁘게 했었다. 그러나…… 불과 십여년 후에 가보니 그곳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무슨 말로 표현하랴. 그러나 그 황당함이 조상 대대로 수천년을 사냥과 채집경제에 의존했던 아마존의 원주민이 개발의 후유증으로 사냥터를 졸지에 잃고 생계를 위해 도시로 나와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품을 관광객에게 파는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을 때의 황당함에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이 책은 몇 달전 타운의 한 도서관에서 도서 세일을 했을 때 구입한 것이다.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반가움은 마치 잊혀진 옛 친구를 수만리 먼 이국의 도심 한 복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에 결코 덜하지 않았다. 나는 소중한 옛 추억을 더듬듯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누런 종이 위에 세로쓰기로 깨알같이 인쇄된 활자들을 따라서 오랜 시간의 역사를 거꾸로 더듬고 올라갔다. 잔잔한 감동이 가슴에 일렁거렸고 순간 그러한 감동을 붙잡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독후감을 쓰고 싶어진 것이다. 더불어 한때 나를 열광시켰던 문학 외의 인문 사회과학 도서들을 다시 한 번 읽어봄으로서 느슨해져가는 사고에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한편으론 한때 짝사랑했었던 여인을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고 너무 변해버린 모습에 충격을 받듯이 이런 정도의 책에 그때 왜 열광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마음에 때가 낀 것이든 더욱 성숙된 것이든 변화된 나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도 꽤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것이다.
지난번 한국의 모 유명 교수의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강의를 통해 일년에 기백권이 넘는 책을 읽는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주눅이 든 적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진정한 독서란 그처럼 양적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단 한 달에 한두 권의 책을 읽더라도 제대로 읽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요즘 비로소 독서의 즐거움에 눈이 새롭게 뜨이는 것 같다. <슬픈 열대>를 붙들고 마치 아끼는 과자를 조금씩 깨물어 먹듯이 조금 읽고 사색에 빠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난해한 몇 장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 보기도 한다. 가끔은 기막힌 표현을 발견하고 밑줄을 긋고 나중에 글 쓸 때 써먹어 볼 요량을 하기도 한다. 이 모두가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한 즐거움은 책을 읽음과 동시에 이처럼 독후감을 직접 써 보는 일이다. 내가 느낀 감동을 남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은 항상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가장 좋은 일은 직접 책을 읽는 일이다. 그러나 독자들에게는 작품을 잘 이해하고 해설한 독후감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내가 지난 강의에서 “현대비평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꿈(TEXT)보다 해몽이다.”라고 했는데 독후감 또한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원작을 잘 소화하여 원작을 읽지 않고도 읽은 것 같은 효용을 주는 한편 도저히 원작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독서에의 강력한 유혹이 함께 어우러질 때 그 독후감은 좋은 글쓰기가 되리라.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자!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 60여 년전의 세월로 돌아가 레비-스트로스가 그랬듯이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증기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로 긴 항해를 떠나는 것이다. 항구에는 예나 지금이나 이별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고 여행을 재촉하는 뱃고동 소리가 뚜우 하고 길게 울린다. 바다와 공명을 이루어 긴 여운을 만드는 이 묘한 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타고난 역마살이 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이처럼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끊임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역마살 탓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비문학 도서들 중에서 좋은 책들을 골라서 한 번 독후감을 써보려고 오래전부터 벼루어 왔는데 막상 해보니 작업이 쉽지가 않군요. 소설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얼마 안 가서 때려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니코스님!
때려치다니요. 성질부리지 마시고 참으소서.
우리의 지적성장을 자극하는 님이 있어 힘을 받는거 모르시나요
문학이 성숙해 지기 위해서 비문학적인 독서도 필수라는 생각이 들지요.
국화리 선생님! 한양일랑 잘 다녀오셨는지요?
항상 느끼지만 텍스트를 놓고 쓰는 글들은 쉽지가 않아요. 적당히 얼버무려 나갈 수도 없고...무엇보다도 제가 받은 감동을 전달하는 것이 쉽지 않군요.
문학을 해 보겠다고 덤빈 이후로, 비문학.. 인문학의 부실은 제겐 커다란 장벽처럼 가로 막고 있어요. 제대로 독서를 해 본 적이 없걸랑요. 하긴 아이 키우며, 살림을 하며 픽션 몇 권 읽는 일도 버겁다고 잊고 살았으니..
이제라도 읽어보려구요. 혼자서 읽어내기 어려우니, 곁에 스승을, 동지를 두고 같이 읽어보려구요. 그니, 독후감은 꾸준히 올려주셔요.^^
'슬픈 열대', 이 기막힌 제목만으로도 마음에 주황빛이 퍼져왔는데, 책 표지가 정말로 오렌지색으로 가득 차 있네요.
니코스님이 인용해 준 구절 만으로도 구미가 확 당깁니다요, 정말 아름답다는.. 저도 읽고 시포요. 내 곧 사서 읽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