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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의 편지는 신학생의 가슴을 흔들었다. 하나하나의 사연마다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있었다. 형기는 한때 자신의 믿음과 지향하는 길을 ‘스님의 딸’인 설자가 싫어할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형기의 생각을 존중했기에 침묵에 들어갔고,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이해했기에 다시 마음 문을 연 것이다. 특히 “더욱 학업에 정진하도록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형기의 시선을 붙들어 매었다. ‘기도하겠습니다’란 말은 신앙인이 아니고는 쓰지 않는 인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답신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었다. 그는 9월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8시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부산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부산 동부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가 가까웠다. 형기는 설자가 일하는 가야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교환은 한참 후에 설자를 바꿔주었다.
“백형깁니다.······.”
그는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어머! 형기 씨, 어디예요?”
설자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형기의 음성에 깜짝 놀랐다.
“부산입니다. 편지 받고 답장을 배달하러 왔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미리 연락을 주시지 않고······. 근무 중인 간호사에겐 면회 시간이 따로 없습니다. 다행히 오후 3시면 퇴근입니다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여기는 동부터미널입니다. 조금 전 고속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그럼 우리 병원으로 오셔서 잠시 기다려야겠습니다.”
백형기는 병원 휴게실에서 3시 30분이 가까웠을 때 설자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길에서 지나치면 몰라보겠습니다.”
백형기는 옷을 갈아입은 설자가 다가오자 낯선 숙녀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릴 적 볼살은 빠지고 마치 영화 <산 파블로>에 나오는 미모의 캔디스 버겐을 닮았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형기 씨는 벌써 목사님 티가 나는 것 같습니다. 호호호.”
두 사람은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퇴근이 오후 3시면, 간호사들은 일찍 퇴근하는가 봐요?”
“그렇지 않습니다. 밤 11시에 퇴근하는 사람도 있고, 아침 7시에 퇴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간근무자는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3시에 퇴근하지요.”
“그렇군요. 간호사들의 3교대 근무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내가 야간반이면 지금부터 밤 11시까지 일해야 합니다. 한 주일씩 돌아가며 근무시간이 바뀝니다.”
“자칫했으면 오늘 만나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미리 연락하면 필요한 때 시간을 낼 수도 있습니다. 동료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시간이 어중간한데, 식사는 하셨어요?”
“설자 씨는요?”
“오늘은 무척 바빴습니다. 수술실에 있었기 때문에 점심 먹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어디 가서 식사부터 해야겠습니다.”
설자는 오랜만에 만난 형기를 해운대 달맞이 고개 디에이블 레스토랑으로 인도했다. 그곳은 설자가 간호학교를 졸업하던 날 외삼촌 내외가 그녀를 데리고 갔던 전망 좋고 품격 있는 음식점이었다. 둘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으로 해운대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고 동백섬 쪽으로 저녁 해가 기울고 있었다.
“동백섬 뒤쪽으로는 광안리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건너편 멀리 마주 보이는 해안은 이기대 해변공원입니다. 바다와 나란히 산책하기 좋은 곳이지요.”
설자는 눈앞에 전개되는 경치를 하나씩 설명했다.
“외삼촌 병원은 어디 있습니까?”
“해운대 우동에 있습니다. 그 옆 좌동 일대에는 앞으로 인구 12만 명, 3만3천 가구를 수용하는 신도시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연말쯤에는 나도 외삼촌 병원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편지에서 보았습니다. 톱니바퀴 같은 삶에서 여유를 찾고 싶다는······.”
“큰 병원의 간호사는 매일매일이 전쟁입니다. 사명감이 필요한 일이지요.”
“어떻게 간호사의 길을 택했습니까?”
백형기는 설자가 걸어온 길이 궁금했다.
“특별한 목적은 없었어요. 외삼촌의 일을 거들어 드리면서 옆에서 보는 간호사들의 모습이 참으로 밝고 아름다웠습니다. ‘백의의 천사’라는 말을 막연히 동경했는데 알고 보니 그 천사들이 걷는 길은 광야 같은 거친 길이었습니다. 규모가 작은 병원은 그렇지 않지만······, 형기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회사원 생활을 몇 년 했더군요.”
“출판사 근무를 3년이나 했습니다. 하는 일이 재미있고 동료들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나는 형기 씨가 회사원이 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는 믿음의 열정이 좀 식어졌습니다.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취향에 맞기도 해서 보람을 느끼고 있었는데 잇달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떤 문제가요?”
“입사해서 3년째를 맞았을 때였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동료 두 사람과 함께 통영으로 낚시를 갔다가 욕지도 앞바다에서 낚싯배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해경의 구조가 늦어지는 바람에 낚시꾼 15명 중 6명이 사망한 대형 사고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또 사고를 당했습니다. 내가 등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근교 등산을 해왔습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백두대간이나 지리산 종주의 꿈을 갖고 있지요. 그해 회사원 7명이 봉고차를 타고 3박 4일, 3·1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오후에 출발해서 노고단에서 1박, 벽소령에서 1박, 장터목산장에서 또 1박을 하고 새벽 4시 천왕봉을 향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일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청군 대원사 쪽으로 하산하는 종주를 마치고 바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강행군이었지요. 처음에는 팀장이 운전하다가 졸린다면서 나와 교대를 했는데 나도 눈이 감겼습니다. 남해고속도로 함안 터널을 지나서 우리가 탄 봉고차가 중앙분리대에 부딪혀 한 바퀴 굴렀습니다. 일행 7명 중 안전띠를 매지 않은 한 사람은 현장에서 숨졌습니다. 부산의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른 동료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나란히 누워있었습니다. 봉고차는 다 망가졌지만 나는 별로 다친 데가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보고 모두 기적 같은 일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형기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는 식사하면서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그때 나를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고 지난날의 뜨거웠던 믿음을 떠올렸습니다. 후유증으로 인해 한 달을 쉬고 나서 직장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부흥집회에 참석했는데, 그날의 설교 제목이 「자는 자여 어찜이뇨」 였습니다. 그 말은 니느웨로 가서 구원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던 요나에게 선장을 통해 들려준 말씀입니다. 그날 이후 ‘자는 자여 어찜이뇨?’라는 그 설교 말씀이 계속 귓전에 맴돌아 밤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았지요! 그해 8월 하순 휴가 때 기도원에 올라가 회개를 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단했습니다.”
백형기는 ‘마지막 일기장’ 생각이 떠올라 설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꿈틀거렸다.
“늦게 시작한 신학교 생활이 힘들지 않습니까?”
긴장하며 이야기를 듣던 설자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설자 씨의 말대로 마침내 내가 서야 할 자리에 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처음에는 신학생들 가운데 내 나이가 가장 많을 줄 생각했는데 나보다 10년이나 연상인 사람도 있고 모두가 다양한 경험자들이었습니다. 설자 씨는 간호사 생활이 어떻습니까?”
“공부하고 견학할 때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장 박사님의 말씀이나 그분의 일화들은 학생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으로부터 배웠던 것은 큰 은혜인 것 같습니다. 식사 시간도 거르며 일할 때는 힘 들기도 하지만 아픈 사람을 낫게 하는 데 내가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참으로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환자들은 간호사들의 살뜰한 마음을 생각하기보다는 불만과 짜증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까지 잘 들어주는 것이 간호사의 길이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돌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목회 현장에서도 그와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기도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요. 믿는 자들의 최고의 무기는 기도입니다. 나는 설자 씨의 편지에서 ‘기도하겠습니다’란 마무리 인사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건 내가 날마다 형기 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그들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최고의 사랑’입니다. 신앙은 언제부터 갖게 되었습니까? 설자 씨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일 텐데······.”
“외삼촌이 신앙인은 아니지만 성경을 가까이 두고 읽는 분입니다. 젊었던 시절 우연히 목회자의 딸과 사귀게 되었는데 끝내 여자분 부모님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헤어진 일이 있었어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이방인(불신자)과 결혼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형기 씨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랬군요. 외삼촌이 서울에 오셨을 때 내게도 그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갈등이 많았어요. 지난날의 설자가 나를 놓아주지 않아 참으로 괴로웠는데, 여전히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호호호.”
“나도 마찬가지예요. 신학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갈등과 염려는 있기 마련입니다. 달라지려고, 변하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신학교는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나요?”
“아닙니다. 경기도 일원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만 입사할 수 있습니다. 한 방에 네 사람이 생활합니다. 간호학교는 어때요?”
“우리도 비슷합니다. 어쩌면 수용소 생활 같다고 할까요. 나는 외삼촌 집에서 통학했습니다. 참, 깜박 잊었네요. 퇴근해서 일찍 들어가지 못하면 전화를 드려야 하는데······.”
설자는 일어서서 공중전화부스로 갔다. 형기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저녁 8시가 가까웠다. 오랜만에 둘이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백형기는 밤차로 상경해야 내일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잠시 후, 설자는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외삼촌께 인사를 드려야 할 텐데······.”
“그저 친구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인사는 다음에 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밤 10시 차를 타려면 지금 서둘러 부산역으로 가야 합니다. 설자 씨도 시간을 내어 서울에 한 번 다녀가세요.”
“그럴 기회가 오면 좋겠네요!”
설자는 십 년 만에 만난 고향 친구를 밤중에 홀로 떠나보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설자는 초행길인 형기를 부산역까지 바래다주려고 따라나섰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할 텐데, 여기서 인사합시다.” 형기가 극구 사양하며 버스에 오르자 차는 곧 출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