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탑에서 강동까지(수녀님을 뵈오려)
아침에 둘째가 바쁘다면서 빵을 드시는 것이 어떠냐고 묻는다. 물을 때는 내가 무엇을 먹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딸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월요일 아침이라 무척 바쁜 모양이다. 아이 둘을 혼자 손으로 키우며 또 직장에다니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니 오죽할까?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다. 나는 잡식성이라 무엇이나 다 기쁜 마음으로 잘 먹는다. 무엇이 몸에 좋다며 여기저기 TV에서 경쟁적으로 방송을 하더라도 나의 지론인 여러 음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기쁜 마음으로 잘 씹어 먹으면 그것이 보약이라 믿는 식습관을 가진 나이기에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아빠는 아무것이나 잘 먹잖아”하면서 동의를 했다.
전날 저녁을 먹으면서 내일은 강동성심 병원으로 마산 양덕 성당에서 젊을 때 영성적으로 이끌어주셨던 수녀님과 헤어 진지 후 30여 년 만에 만나 뵈올 약속을 했으니 가는 길을 좀 적어 달라 했다.
(엄마가 아빠 월요일에 수녀님을 뵈옵는다는 얘기를 한 모양이다. 딸애는 벌써 알고 있었다.)
딸이 인터넷을 검색하여 적어준 길은 야탑 → 수서(3) 오금방향 → 오금(5) 방화 방향 → 강동에서 하차 2번 출구를 라고 적은 쪽지를 받아 남방 위 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다시 꺼내 보면서 식탁에서 딸과 손자 손녀와 같이 아침을 먹어다. 사위는 아침도 먹지 않고 늦었다며 인사를 하고 출근하였다. 후식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오늘은 참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한다. 딸이 초등학교 시절의 수녀님께서 귀여워하셨던 옛 기억이 아마 되살아났던 모양이다. 조심해서 다녀오시라 하면서 먼저 아이를 대리고 집을 나갔다. 조금은 흐트러진 집을 정리를 하고 그래도 시간은 많이 남았다. TV를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본다. 지상파도 별 볼만한 프로가 없고 종편은 몇 사람이 마주 앉아 시답잖은 얘기를 하면서 말 따먹기를 하고 있다.
(이북 인민군 1개 소대가 흰 기발을 들고 풀숲을 헤치며 내려오는 가슴 한복판을 확 뚫리는 그런 기막힌 일이 일어나야 특종인데 매일 특종 기사이니 보고 듣는 것도 신물이 난다. 나는 멀지 않은 장래 그러한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TV를 끄고 집에 있자니 딱히 할 일도 없고 운동 겸해서 셋 강을 걸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집을 나섰다. 내 걸음으로 야탑역까지는 대충 25여 길이다. 셋 강에는 물은 많지 않아 내려가는 흉내만 내는 것 같다. 물소리에 귀를 가져간다. 소리는 들리지 않고 가끔 새소리가 약간은 더운 개울 길을 그나마 상쾌하게 해준다. 걸어가면서 생각은 나래가 되어 30년 전으로 뒷걸음이다.
검은 수녀 복에 이마에서부터 머리까지 검은 수건을 써신 적당한 키 약간은 둥글며 조금은 갸름하신 항상 해맑은 미소를 머금으신 30대(代) 중반의 수도자로서 익숙하신 임마꿀랏따 수녀님의 모습이 기억의 저편에 필름(film)이 되어 30년 전으로 훌쩍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 변하셨을까?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 그 세월의 흔적은 수녀님께는 비켜갔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일에 연연하지 않으시며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시며 기도와 봉사로 또는 희생으로 사시니 만큼 비켜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뵈면 무슨 말씀부터 드릴까? 어린아이 소풍 가는 마음으로 지하철에서 읽으려고 들고 다니는 시와 수필의 만남, 책장을 넘기면서 보는 것은 건성이고 수녀님 생각으로 가득했다. 들고 간 9권 첫 장에 시를 읽어본다.

5월11일 붉은 장미가 만발한 날에
하느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며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으며
이 세상을 잘 살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납니다만
죽음 이후 사후세계(死後世界)는 이 세상 삶의 결과에 따라
가려지느니만큼 모두가 자기 책임이며 삶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잘 살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나온 세월 위 시와 같이 잘 살아왔던가? 혹 수녀님이 하문하신다면 예하고 대답드릴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혹 수녀님은 그저 세월의 뒷길에서 본당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희미한 기억 속 한 사람으로 아니 기억마저도 온전히 간직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와 수녀님과의 전화 통화나 아내와 통화에서 오는 여러 가지 말들 중에 과거 일들을 기억하시는 것을 보면 나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가졌다. 두 번의 환승 후 강동역에 내려 강동성심병원 찾았다. 2번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니 높다란 성심병원의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왼편에 음료수나 커피를 마시며 쉬어 갈 수 있는 쉼터 같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볼 수 있도록 놓아둔 의자에 앉아 사무실에 전화를 드렸다. 오늘은 비번 이시어 나오시지 않으셨다며 핸드폰 번호를 가리켜 주시기에 바로 전화를 드렸다. 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옛날 음성 그대로 이시다. 세월은 흘러도 지문같이 음성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바로 내려오시겠다며 전화를 끊으신다. 잠깐 앉아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갔다. 저만치 앞에 넓은 흰 모자에 여름 흰 수녀 복을 입으신 한 분이 병원으로 들어오신다. 단번에 수녀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은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지만 역시 하느님과 사시는 수녀님이시기에 아마 세월도 더디 가도록 하신 모양이신가 보다. 얼굴에 역시 웃음 띠신 수녀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며 아이코! 수녀님이란 이 말 한마디가 인사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처음 무슨 말씀을 어떻게 올렸는지 모르겠다. 짧은 시간 동안 한 참에 여러 가지를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뒤죽박죽이 되지 않았을까? 걸어가면서 우선 점심시간이라 식사를 하시지요. 하면서 건사한 집으로 가시자며 어디가 좋을까? 말씀드리니 근처에 괜찮은 순두부 집이 있다 하시며 그곳에 가자하신다. 30년 만의 해후(邂逅)에서 겨우 순두부집(먹고 난 후 보니 좋은 식단이며 맛이 있었습니다) 하며 좀 더 근사 한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수녀님께서 굳이 원하시니 순두부 집에 자리를 잡았다. 마주 앉아 다시금 수녀님을 뵈오니 역시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수녀님을 만나 뵈 오려 오면서 생각한 모습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으며 지난날 그 양덕 성당에서 맑게 웃음 띠신 그 모습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수도자를 볼 때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도 옳은 봬 옴이 아니라서 지나가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느낀 바는 단지 몇 올 엷은 주름과 자국만이 지난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역시 하느님은 수도자들에게는 세월이란 지게에 올려놓은 짐도 무게도 들어드리는가 봅니다.
두어 시간 수녀님과의 식사는 후딱 지나갔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말을 한 적 없었습니다. 달변이 아닌 나이지만 이날은 줄줄 흐르는 물과 같이 마구 뛰어나왔습니다. 부산에서 마산을 거처 옛 지명인 삼천포에서 일 등 그리고 대구 서울서의 일이며 경기도 여주를 돌아 다시 대구까지 지난날을 보고하듯 한 것 같았습니다. 세월의 구비구비 마다 생긴 한 고비고비를 하소연하듯 말씀드렸습니다. 즐거웠든 일은 물론 어려웠든 일까지도 가끔은 수녀님이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아내와 나눈 이야기까지도 아마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드리듯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수녀님께서도 페루며 로마로 국내 여러 곳에서 수도자의 삶을 드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월 가운데 가끔은 우리 가족들을 기억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싱그러웠든 그 젊은 날 넓고 푸른 마음으로 살며 나름대로 신앙인의 삶을 살려하다 조금은 엇길로 발을 들어 놓으려면 조용히 신앙생활의 바른 길이 무엇이며 그 길 가도록 가르쳐주셨든 수녀님! 아름다운 그때 그 시절 수녀님과의 만남이 즐거움이었고 행운이었다 말씀드리며 30년 만의 만남의 소회를 따뜻한 가슴으로 적어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남은 세월인지 알지 못하지만 가끔은 뵈올 수 있는 기회 만들 것을 약속드리면서 짧은 만남이었지만 참으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내내 휘 바람 불며 5월의 푸른 보리밭 논길을 달려고 싶은 들뜬 마음이었습니다.
2015년 5월 11일 붉은 장미가 만발한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