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일 해날
[다르게 새롭게 깊게]를 꿈꾸는 천일기도 124일째
검은 리본의 유래를 정확히 따지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어디에서나 죽은 자를 향해 고개 숙이는 자의 의식은 있으며, 오늘날 검은 리본은 그 시간에 동참하는 산 자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사물이다.
검은 리본을 단 이는 침묵이 아니라 묵상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이 외적 상황에 대한 수동적 태도라면 묵상은 상황에 대한 내적 성찰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죽음, 때로는 죽음을 둘러싼 어처구니없는 세계의 푹력성에 대한 능동적인 반성이기도 하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산 자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참여한다. 말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산 자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말에 붙어 있는 온갖 관념 자체가 산 자들의 세계를 지탱하는 요소다. 그러한 관념 중에는 근거 없는 선입견과 이데올로기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죽음 앞에서 산 자들은 묵상해야 한다. 애도는 산 자들의 논리를 발설하지 않고 따지지 않으며 제 안으로 삼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리본은 왼쪽 가슴에 단다. 심장이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심장은 마음 심心 자를 쓴다. ‘검은 리본’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리본은 삼각형 모양으로 가운데 안쪽이 비스듬히 잘려 있는데, 한자 문화권 사람에게 그것은 사람 인 자로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검은 리본은 죽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검은 리본은 검은 나비의 형상이기도 하다. 검은 나비에는 영혼의 부활과 삶의 재생을 기도하는 의미가 서려 있다. 어떤 사회적 참사를 마주하여 사람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노란 리본을 달기도 하지만, 이 소망은 색 이전에 리본 형상 자체에 깃든 기도인 셈이다. 리본은 이미 사람이고 나비이며, 그 안에는 사람이 나비처럼 부활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깃들어 있다.
검은 리본을 달고 묵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죽은 자와 예를 갖추고 만난다는 뜻이다. 죽은 자를 마주할 때에는 산 자의 사회적 “얼굴을 벗”고, 허위의 말을 삼키며, “심장을 꺼내놓”아야만 한다(이영광,⌜유령3⌟. 당신이 산 자들의 세계에서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는 하계下界에서 무의미하다. 오직 사람 그 자체로만 만나야 한다. 그때만이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다. <사물의 철학/함돈균, 검은 리본 black ribbon:심장에 깃든 사람 인人>
사랑이신 한님.
느슨하게, 책을 펼쳤어요. 오랜만에 좋았습니다.
행여 '말에 붙어 있는 온갖 관념'속에서만 허덕이고 있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