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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일
아들을 학교에 태워다 주고 노동자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잠실운동장으로 가서 탄천과 양재천을 돌아오는 하프코스에 참가했다. 아침기온이 20도가 넘고 거기에 탄천의 악취까지 10시에 출발했는데 오늘도 쉽지 않은 레이스였다. 마라톤을 마치고 병원으로 가서 어머니를 뵙고 집으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중간고사 기간인 아들은 오늘 국어를 포함하여 시험을 보았고 내일은 마지막 날이다.
2일 내일부터는 연휴이기 때문에 아침에 운동을 하고 여러가지 일처리를 했고 낮 시간이 되면서는 5월 초순답지 않게 기온이 올라 여름이 온 것처럼 날이 더웠다. 신설동에 갔다가 근처에 있는 자동차공업사에서 타고 간 세피아 가스점검을 받는데 아들이 시험 중에 친구들과 손가락으로 장난을 한 것이 부정행위가 되었다고 아내의 문자가 온다. 아침에 시험을 마치면 축구한다고 공까지 들고 정신이 다른 곳에 있어 야단을 하고 싶었는데 후회되었다. 곧바로 학교에 들어가 지도부장을 찾아가니 누구라도 실수를 할 수가 있고 징계위원회에서 판단할 것이니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지도하자고 한다. 집으로 오니 아들은 누워 있고 아내는 대성통곡을 하며 울부짖는다. 아들에 대한 실망스러움과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3일 아들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찌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아들한테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나니 폭력에 의한 강요가 있어 즉석에서 부장선생과 통화를 하여 폭력과 부실감독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적대감을 표출했다. 식사도 거르고 북한산에 올라 마음을 다스리고 돌아오니 아내는 여동생과 아파트 건너편 갈비집에서 외식을 하고 있다. 커피나 마실 일이지 어제는 통곡하더니 오늘은 밥맛이나 있을까. 집에 있는 아들에게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으니 기죽지 말고 학교생활 하라고 위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불을 끄고 누웠다.
4일 어제 가려고 했던 청주를 오늘 출발한다. 정황으로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5월8일 어버이 날도 다가오고 아들을 포함하여 기분전환이라도 될까해서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고속도로가 막힘이 없어 이천휴게소에 1시간만에 들어가 아침식사로 나는 라면, 아들은 쌀밥정식, 딸은 비빔밥을 시켰다. 아내는 배가 부르다고 주문하지 않더니 수저를 가져와 우리들 식사를 대부분 먹는다. 청주에 도착하여 곧바로 장인, 장모님과 대청댐 입구 청남대 구경을 나섰다. 매표소 앞에서 20여분을 기다려 입장권을 받고 거동이 불편하신 장인어른을 휠체어에 모시고 아름다운 경내를 구경했다. 대통령의 휴양지다운 모습이었지만 국민들의 세금을 생각하니 편하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가족들이 누룽지백숙 식사를 했다.
5일 밤새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니 아침이 되면서 햇살이 밝게 비친다. 아침식사로 전라도 영광에서 왔다는 굴비가 식탁에 올랐는데 처가에서 생선찌개를 먹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서울대병원에 진단하러 가신다는 장모님까지 모시고 서울로 출발하면서 장인어른께 용돈을 드리니 오히려 어제 청남대에서 휠체어를 밀면서 고생했다고 기름값 5만원을 주신다. 서울에 도착하여 남대문시장에 가신다는 장모님을 내려드리고 집으로 왔다가 시험사건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아 바로 북한산으로 갔다. 평창동에서 올라 형제봉을 거쳐 대성문에 도착하니 1시간 30분이 지났고 다시 능선을 걸어 보국문과 칼바위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은 영화구경, 장모님과 아내는 처제와 함께 하이서울 구경한다고 서울시청 근처에 있다. 등산복 차림으로 시내로 나가 아름다운 청계천을 함께 걷고 거리음식점에서 홍어안주와 막걸리를 마셨다.
6일 연휴를 마치고 새로 시작하는 화요일, 딸은 학교에 가고 아들은 임시휴일이라 집에 있다.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는 중에 신설동 1층에서 옷을 담은 박스가 많이 젖었다고 손해배상 이야기를 하며 전화가 온다. 어려운 일은 몰려서 온다더니 설상가상의 고민거리다. 오후에 방문하기로 하고 집으로 와서 이번 시험에 문제가 있었던 아들과 친구 4명을 논술학원으로 불러서 상황이야기를 자세히 듣고 자장면으로 함께 점심을 했다. 오후에 대신고등학교에 들어가 강선생과 아들 일처리를 상의하고 신설동으로 가서 1층 사장에게 옷이 젖은 경위를 들었다. 수도업자를 불러 점검을 시키고 어머니 병원에 도착하니 여동생과 작은형수가 낼 모레 어버이 날이라고 빨간 장미가 담긴 꽃바구니를 들고 왔다. 평소에 꽃을 좋아하시어 서울에서 인조 꽃바구니를 사다가 고향집 거실에 아예 걸어두고 생활하셨는데 오늘도 얼굴이 환해지신다. 병원을 나와 경기학원에 가서 일을 보고 근처에 있는 서울대병원에서 진단을 마친 장모님을 모시고 집에 도착했다. 밤에는 시험에 관련된 학부모들을 논술교실로 불러 학교상황을 이야기하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7일 눈을 뜨니 새벽 3시가 되었다. 컴퓨터 앞에서 선생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글을 작성하고 안산을 올랐다가 집에 8시에 왔다. 식사도 거르고 9시 수업시작 전에 인창중학교에 가서 지도부장과 만나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 격하게 이야기를 하고 아침에 작성한 글을 전했다. 결국 운동장까지 따라 나와서 자신도 잘못이 있고 반성도 하겠다고 사정을 하더니 아들도 살아가면서 좋은 교훈이 될테니 너무 상심마시라고 위로를 한다. 착잡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를 나와 부장한테 내 심정을 다시 문자로 보냈더니 죄송하다고 답장이 왔다. 누수공사를 시작하려고 곧바로 신설동으로 가서 어제 부탁한 수도업자를 만나보니 원인을 모르겠다고 하고 나도 이 방면 지식이 없으니 난감하기만 했다.
8일 어버이 날이다. 아버지로서 나는 자격이 있는가 식탁 위에 아들과 딸이 만든 꽃과 편지가 놓여 있다. 고맙지만 부모가 바라는 것은 건강하고 성실하게 학교생활 잘하는 것이다. 병원에 계시는 어머님도 당신을 위하는 것보다 내가 건강하고 잘 사는 것을 바라고 그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집을 나서 신설동에 가서 1층 누수공사에 대하여 알아보니 배관이 벽 속에 있어 확실히는 모르고 아마 화장실 부근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만 한다. 점심을 먹고 어머니를 뵈러 가니 어버이 날이라고 병원에서는 영양제 1병씩을 투여한다. 특별한 선물이지만 침상에 계시는 모든 요양원 환자분들이 동시에 영양제를 맞는 모습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놓아 의아하기도 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면서 자식의 부모님 봉양은 어버이 날 오늘뿐 아니라 평생을 다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9일 아들에 대한 고민이 가시지 않고 신설동 임차인은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누수는 탐지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데 내일부터는 연휴라니 걱정이 많다. 김성우를 만나 술이라도 마실까해서 약수동 사무실에 들어가니 생활이 어려워 당장 대리운전을 나선다는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연휴 동안에 아들이나 딸을 데리고 가까운 남산이라도 가고 얼마 전에 약속한 핸드폰 구입도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것같다. 저녁을 먹으면서 내부순환도로를 바라보니 역시 이동하는 차가 많아 정체가 심하다.
10일 연휴라고 해도 계획을 잡을 수가 없고 신설동에 오전에 다녀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딸과 아내의 핸드폰을 사 주려고 종류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다는 용산 전자상가에 갔다. 여러 곳을 구경하고 아내가 사용할 핸드폰을 구입하고 딸에게는 무료폰을 사 주었다. 바쁘고 어려움이 많은 시간속에서 모두 흡족해 하니 나도 순간적이나마 즐거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늦은 오후 신설동 2층 새로운 임차인이 오늘 계약을 하자고 연락이 와서 지하철로 이동하여 서류를 작성하니 내부공사도 다시 하고 음식도 새로운 메뉴를 선택하여 차별화 하겠다며 벌써부터 의욕을 부린다.
11일 화창한 일요일에 산에 갈까 하다가 청주에서 큰 처남이 온다고 해서 멀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침에 아들과 딸을 차에 태우고 서울역 건너편 남산에 올라 동국대 근처와 국립극장까지 걸었다. 남산길은 구불구불 하지만 완만하여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었고 극장 반대쪽으로 내려오니 2시간이 지났다. 차를 몰고 을지로에 있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춘 중국집으로 가서 우동, 자장, 짬뽕을 각각 먹었다. 식사 후 바로 병원으로 가니 청주에서 큰 처남 부부가 와 있고 어머니께서 사돈댁 큰아들이라고 오히려 나에게 설명을 하신다. 병원을 나와 처남댁을 환송하고 퇴계원 이모집에 가겠다는 아들과 딸을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12일 초파일 월요일, 오늘은 석가탄신일이다. 나를 포함하여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부처의 자비가 있기를 기원했다. 아들과 딸이 퇴계원 이모집에 있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내와 산사를 찾아 북한산에 오른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산행도 하며 마음의 안정도 찾기 위함이다. 김치와 라면, 김밥과 청하 1병을 사 가지고 정릉으로 가서 영취사 옆을 통과하여 대성문에 올랐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계단보다는 흙길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하여 선택한 코스다. 대성문에서 서쪽으로 한 고개를 넘어서니 대남문이 자리하고 바로 아래 문수사 경내로 들어서니 석탄일 연꽃 등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불타는 연등 아래 서 있으니 속세에서 번뇌하는 중생이 극락정토에 온 것처럼 마음의 편안했다. 마침 노모를 모시고 불공에 참여한 성욱이네 가족을 만났는데 주인이 나그네를 환대하듯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다. 경내를 나와 문수봉 725미터 정상에 오르고 반대편 바위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니 오후 3시가 되었고 다시 왔던 길로 서둘러 내려왔다.
13일 멀리 여행도 못하고 어제까지 남산과 북한산을 다니며 3일을 보냈다. 비가 내리는 아침 오늘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다. 아들을 태우고 학교에 가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더 발전하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고 돌아와 운동을 하고 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신설동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1층 가게에 들어가니 물로 인하여 옷이 많이 젖었다고 배상을 요구하여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는 대안을 제시하고 그렇게 안 되면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고 말했다. 무슨일이든 마음이 편하고 머리가 맑아야 명쾌한 대책이나 답이 나오는데 여러가지 걱정거리가 있으니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어려운 일은 겹쳐서 생긴다는 말이 충분이 이해가 가는 시점으로 하나의 일이 어렵기 때문에 다음 일처리에 정신의 집중이 안 된다는 것이다.
14일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달리기를 할까 하다가 안산에 올랐다. 싱그러운 5월의 녹음과 흐드러진 아카시아 향내가 온 산을 감싸고 있다. 약수터를 지나 대운동장에서 기구운동도 하고 집으로 오니 11시가 넘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오늘 오후에 학교에 가서 징계위원회에 제출할 서류를 작성했다. 아들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피하지 않겠지만 감독소홀이나 학생들에게 폭력을 가한 선생은 교육청에 통보해서라도 퇴출시키겠다는 내용이다. 비장한 심정으로 있는데 논술교실에 간 아내는 처남에게 1억원을 빌려 줄 수 있느냐고 전화가 온다. 지금의 내 심정이나 상황을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야속하기만 했다. 오후 3시에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학교에 들어서니 교감을 위원장으로 6명의 선생들이 자리를 했고 어머니 4명과 아버지인 나까지 학부모 5명이 앞쪽으로 앉았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기분이었고 불이익을 두려워 하는 어머니들은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다. 선생들도 어색하게 허공만 응시하고 아버지로 참석한 나도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오전에 작성한 용지를 돌리며 잘못된 학교와 선생들도 책임을 지라고 소리를 높였다. 교감이 일어서더니 자녀의 미래를 위해 선도하고 지도하는 과정이니 이해를 바란다며 또한 대학이라도 들어가면 중학교의 기록은 의미가 없으니 확대하여 생각하지 마시라고 한다. 나아가 부실감독이나 폭력에 대하여 선생들을 대신하여 깊이 사과하고 다음부터는 책임있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아들을 퇴학시켜도 좋고 이런 중학교에 미련을 갖지 않을 것이니 마음대로 처리하라 외치고 밖으로 나왔다.
15일 아침 일찍 도봉산 최정상 자운봉에 올랐다가 바로 아래 포대능선 소나무 아래에서 시간을 보냈다. 계속 어긋나는 강의나 사업, 중학교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오늘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화려한 과거에 비하여 초라한 지금의 내 모습 등 살아가는 현실에 울컥하는 심정이었다. 멀리 도봉산의 모습이 백운대와 인수봉까지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아래로는 포대능선 절벽이 생과 사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서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보이지 않는 어려움과 외로움이 있었는데 아들에게 같은 인생을 되돌려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나의 발을 붙든다. 산바람이 추울 만큼 불어오는 도봉산 능선, 아침에 스승의 날이라서 학교에 가지 않는 아들에게 동행을 요구하니 10시부터 축구를 한다고 해서 혼자 온 것이다. 그런가하면 집에서 김치를 담갔는데 밍밍하고 오징어찌개도 익지 않아 아침식사를 거르고 나온 오늘이다. 도봉산 포대능선 소나무 아래에 눈물을 남기고 송추계곡으로 내려와 사패터널을 통과하여 외곽도로를 타고 어머니 병원으로 들어갔다. 어제 외삼촌과 숙모께서 다녀가셨다면서 아직까지도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시다. 어머니는 혈육이라고 남동생인 외삼촌뿐이라 예전부터 우애가 넘치는 남매의 모습을 보이곤 했었는데 어제의 만남이 과거의 시간을 돌이키기에 부족하지 않은 듯싶다. 밤에 아내와 딸이 말없이 거실에 앉아 있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돌아온 나도 정신을 놓고 있었다.
16일 금년 들어 담배를 피우지 않다가 요즘 다시 했는데 오늘부터는 금연을 해야겠다. 새벽 3시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6시가 되었고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시간을 보내는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니 정신이 맑아와 역시 잡념이 있을 때는 땀을 흘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EM학원에 다녀와서 식사를 하고 4시에 경기학원으로 가니 본관과 별관이 통합한다고 알린다. 별관의 임대료가 높고 계약기간도 다 되어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다. 교재와 비품을 옮기기 위해 정리하며 장원장과 학원의 운영상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왔다. 5월 하순으로 접어드는 초저녁에 안산자락에서 밀려오는 아카시아 향내를 맡으며 아들과 딸을 앞에 두고 삼겹살과 김치까지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었다.
17일 어제와 달리 일찍 잠이 들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인생의 고비에서 잡념과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희망과 꿈이 사라지는 것같아 허무하기만 하다. 가족도 소중한 존재지만 때로는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무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요즘의 삶이다. 그래도 학교에 가는 아들에게는 자신있게 살아가라 했고 훗날 멋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북한산에 가려고 구기동에서 연화사를 오르는데 나의 하루가 걱정이 되는지 거의 30년을 한결같이 지내는 대학친구 정식이가 전화를 하여 힘을 내라고 응원을 한다. 비봉을 향하여 정상으로 가다가 힘이 들어 중턱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바위에 누워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5월의 푸른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학교에서 일찍 온 아들이 생각나고 함께 불광동으로 가서 식사를 하려고 서둘러 집으로 오니 흔적이 없다. 저녁을 먹고 9시가 지나자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놀고 있고 10시경 들어온다는 문자가 왔다.
18일 일요일 아침 비가 내린다. 인천에 사는 고종4촌 아들 결혼식이 있어서 식사를 마치고 9시에 아들과 지하철로 출발했다. 도서관에 간다는 아들의 시간을 빼앗아 미안하지만 이 기회에 친척도 만나보고 여행하듯이 오가면서 대화도 나누면 의미있는 하루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종로 3가에서 환승하여 인천으로 가는데 사람이 많고 지하철 시간도 오래 걸려 대화도 못하고 힘들기만 했다. 10분이나 늦게 예식장에 들어서니 인철이, 정환이, 재령이 4촌들과 부순, 부이고모, 그리고 반포형수님도 와 계신다. 광선형은 연락을 못 받았는지 참석을 하지 않아 축의금 봉투를 대신 만들어 전달했다. 식사를 하고 아들을 먼저 서울로 보낸 뒤 친척들과 주안역 잔칫집으로 이동하여 술을 마시고 3시경 나오니 비가 많이 내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언제 왔는지 일삼이 형이 우산을 받쳐주고 택시를 잡아 나를 주안역으로 보내준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고모집에서 생활을 했는데 진해에서 군생활을 한 형이 휴가를 나오면 국군 중에서 해군이 최고 용감하다고 자랑을 하며 해군가를 부르고 그러다가 저녁에 술에 취해 들어와 고모한테 야단을 맞던 그러면서도 대꾸한마디 없었던 착한 형님이었다.
19일 생각해 보니 어제가 5,18이었다. 내가 20살 때는 5월 중순에 비가 장마철같이 내렸고 광주항쟁으로 계엄령이 내려져 살벌한 하루하루였다. 일찍 일어나 새벽에 안산을 걷고 내려와서 식사하고 을지로 저축은행에 가서 김성만 대출금을 확인하니 생각보다 금액이 많이 나온다. 서초역 법무사에 11시에 가서 상담하고 신설동으로 이동하여 3층 사장을 만나 임대료를 지금이라도 주든지 아니면 당장 사무실을 비우라고 하니 또 사정을 하여 조만간 법정에서 보자고 했다. 점심을 먹고 충정로 동아일보 커피숍으로 가니 주택에 살고 있는 세입자들 서류만 정리하면 바로 대출금이 나온다면서 김성만은 금액까지 보여준다. 걸어서 역사박물관 앞으로 이동하여 버스를 타고 어머니를 뵈러 병원에 갔다. 엊그제 휴가를 갔던 간병아주머니가 돌아와 있고 부산에 간 영식이는 선박에 문제가 생겼다고 전화가 온다.
20일 일찍 자고 눈을 뜨니 새벽 3시다. 컴퓨터를 하고 신문을 보고 날이 밝아 오면서 다시 1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눈꺼풀이 무겁다. 식사 후 아들을 태우고 학교 정문에 내려주면서 머리를 쓰다듬고 용기를 잃지 마라고 격려를 했다. 곧장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EM학원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에 신설동에 가서 임대료와 공과금 등 금전처리를 현금으로 했는데 보증금으로 준 1만원권 지폐를 한 뭉큼 들고 다니다 보니 불편했고 앞으로는 인터넷이나 텔레뱅킹으로 정산을 했으면 좋겠다. 건물을 매입할 때부터 옥상에 오래된 폐기물이 있어 미관상 좋지도 않고 특히 장마철에 배수에 문제가 있어 이번 기회에 50만원을 주고 청소업자와 계약을 했고 집에 와서 받아온 임대료 270만원을 생활비라고 전달하니 마음의 위안도 되었다.
21일 일찍 자고 일어나 신문을 보고 6시에 안산을 오르니 벌써 운동을 마치고 하산하는 사람들이 있다. 산을 돌고 중턱에서 기구운동을 하노라니 안산 산악회원 30여명이 줄을 서서 단체로 체조를 한다. 나이가 든 남녀들이지만 일사불란하여 보기가 좋았고 산악회 단합의 정도를 알만도 했다. 산에서 내려오니 비가 오고 아들을 태우고 학교로 출발하여 내려주면서는 용돈을 1만원 주었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고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절대로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집에 와서 계란국으로 식사를 하고 TV를 시청하는데 부부의 날이라고 가수 양희은이 신곡을 불러 마음을 짠하게 한다. 체육관 운동을 하고 EM학원에 갔다가 점심쯤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약수동에 가서 김성우를 만나니 공사대금을 못 받아 함께 일한 인부들 일당도 못주고 세금은 물론 생활비나 공과금도 못 낸다며 고민과 불만에 쌓여 있다. 그 동안 내가 도움을 많이 주었지만 현재는 나도 생활비 걱정으로 살아가는 형세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 성우를 데리고 가서 식사와 술을 사 주고 힘을 주었지만 오비삼척 내 코가 석 자인 저녁이었다.
22일 아들 시계를 고치고 줄까지 교환하여 주었더니 내가 차고 다니는 시계가 더 좋다고 해서 넘겨주었다. 아들을 위해서는 시계가 아니라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일이고 이것은 비단 나만이 아닌 모든 아버지의 마음일 것이다. 7시에 일어나 아들을 학교에 내려 주고 정릉으로 이동하여 북한산 칼바위 중턱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사람도 없는 길을 다시 터벅터벅 내려왔다. 병원으로 가니 점심식사를 하신 어머니께서 앉아 계시어 요양원 옆 채소가 자라는 텃밭 근처로 나와 시간을 보냈다. 대체적으로 과거 고향에서의 일이나 사건은 잘 기억하시는데 어제나 최근의 일은 쉽게 인지를 못하시는 치매 초기단계로 접어들었다. 오후에 일찍 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쉬는데 딸과 아들이 좋은 일이라도 생겼는지 밝은 표정으로 현관에 들어선다.
23일 비는 내리지 않는데 날씨가 우중충하다. 거실에 나오니 허리가 아프다는 아내는 허리받침대까지 두르고 거의 기어다니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있었다. 식사 후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가고 나는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EM학원 갔다가 2시에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오전에 누워서 보내다가 오후에 논술수업 간다는 아내를 차에 태워주겠다고 하니 아침보다 많이 좋아졌다며 걸어서 나간다. 김성만은 제2금융권 대출이 거의 완료되었고 여러 기준과 결제 과정이 있기 때문에 실제 현금을 받기까지는 1주일은 걸린다고 보고하듯이 전화를 한다. 자신도 고마움을 알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양심적이고 깨끗한 사람임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기세다. 병원으로 가서 어머니 뵙고 집에 7시경 들어오니 어느 학부모가 사 주었다는 아름다운 화분 2개가 거실에 나란히 놓여 있다.
24일 허리가 아픈 아내는 딸과 자고 나는 새벽 3시에 눈을 떠 거실에서 서성거렸다. 아침에 식사를 조금하고 북한산에 가려고 704번 시내버스를 기다리는데 잠실체육관 풋살구장에 간다는 아들이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건너편 아파트에서 나오고 있다.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이니 츄리링이라도 걸치고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잔소리가 될까봐 손만 흔들었다. 8시30분 북한산성 입구에서 가파른 산길을 2시간 걸어 백운대를 오르니 땀이 비 오듯이 흐르고 정상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1시간을 걸어 대동문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대성문 대남문을 지나 하산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북동쪽으로 올라가 남서쪽으로 이동한 6시간 산행이었다. 구기동으로 하산하여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방배동으로 가니 정식이와 영식이가 낙지연포탕을 시켜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힘든 삶의 여정이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들이 있어 그나마 순간순간 즐거움도 없지가 않다.
25일 화창한 일요일이다. 어제 6시간을 걸었고 집에도 늦게 와서 몸이 나른하다. 아침에 식사를 하는데 아들은 오전에 책을 보고 오후에 축구경기를 하고 저녁에는 과외를 한다고 말한다. 신설동 옥상 청소가 궁금하여 오전에 가보니 눈을 의심할 만큼 깨끗하게 치워져 있어 마음까지 시원했다. 2층 호프집은 계약 유효기간이 15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실내공사를 하고 있어 언제 장사를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집으로 오면서 광화문 근처에 도착하니 광우병으로 미국산 한우 수입금지 시위로 도심이 막혀 있다. 먼 거리를 돌아 가까스로 집에 들어와 아들, 딸과 삼겹살로 식사하고 과일도 먹었다.
26일 날이 흐리다. 비가 온다는 예보도 없는데 안개까지 자욱하다. 오늘 낮 기온은 27도까지 오른다니 성큼 여름이 오는가 싶다.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가고 집을 나서 EM학원에 갔다가 돌아와 서대문 세무서에 소득세 신고를 하려고 들어가니 사람이 많아 내일이나 모레 방문할 생각으로 그냥 나왔다. 점심을 먹은 후 반바지 차림으로 안산에 올라가 빠르게 걷고 오후 4시에 내려오니 컴퓨터를 하고 있는 아들이 도서관에 간다며 일어선다. 오후에 신설동 2층 세입자를 만나 언제 오픈 할거냐고 물으니 인테리어 업자가 계약된 금액보다 비용추가를 더 요구하여 현재 공사가 중단되어 있다고 억울해 한다. 대다수 인테리어나 건설업자들이 처음에는 적당한 금액으로 견적을 내어 공사를 잡고 중간에 비용이 추가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전형적인 수법에 세입자가 말려들었다. 이런 경우 공사를 중단할 수도 없고 미룰 수도 없어 누구라도 마음 고생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부산에 간 영식이가 온다기에 서울역으로 나가 만나니 사업에 의욕을 보이며 하루라도 빨리 투자를 하라고 권유한다. 현재는 현금이 없고 조만간 김성만 차용액이 해결될 것 같으니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식사하고 집으로 왔다. 공부하러 갔다는 아들을 태우러 서대문 도서관에 갔는데 자리에 없고 새벽 1시가 되어 집에 들어온다. 이 늦은 시간까지 PC방에 있었을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궁금하고 걱정이 많았다
27일 자기만의 행동을 하려는 아들을 사사건건 간섭할 수는 없다. 아들도 나름대로 일이 있고 거기에 따르는 호기심이나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뒤척이다가 새벽 3시에 잠이 들고 6시에 눈을 뜨니 머리가 멍하고 기분도 나지 않아 아침을 억지로 먹었다. 늦게 학교에 가는 아들을 보내고 서대문 세무서에 가서 토지세와 재산세 그리고 소득세까지 신고를 했는데 갑자기 세금액이 억울하다고 생각되어 일반 세무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니 별반 차이가 없어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때 컴퓨터를 배우는 아내가 들어오더니 논술 수강생이 30여명으로 줄었다고 걱정을 하기에 순리대로 하라고 말하고 산에 올라가 2시간을 보내고 내려왔다. 오후에 경기학원 수학선생이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페르마학원 강의를 부탁하여 원장과 통화하고 일단 내일 점심을 하기로 했다.
28일 어제 약속된 페르마학원에 12시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충무로에서 4호선으로 안산 중앙역으로 출발했다. 지하철 타는 시간만 1시간 30분이 걸리고 처음으로 가는 생소한 곳이라 방향조차 가늠이 안 된다. 원장을 만나니 이 곳에 있는 안산 동산고등학교가 전국에서 알아주는 실력있는 학교이고 서울대 지원자가 많다며 토요일 저녁 3시간 수준이 있는 수업을 부탁한다. 점심을 함께 먹고 지하철로 이수역까지 와서 7호선으로 환승, 상봉동 어머니 병원에 도착했다.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니 병원에서 나를 자주 본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찬을 하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젊은 날에 남편을 그리고 인생의 후반에는 당신의 큰아들까지 떠나보낸 어머님의 한스러움을 남아 있는 자식으로서 함께하는 최소한의 시간일 뿐인 것이다. 김성만 전화가 와서 이자포함 전체 1억5천만원을 내일 금융은행에서 처리하겠다며 만나자고 한다. 8개월 동안 이자와 설정한 담보 문제로 갈등이 있었지만 내일은 최종 정산이 된다니 후련하다.
29일 오늘은 홀가분한 일이 생길까. 김성만이가 차용한 금액을 변제한다기에 오전에 약속 장소인 구의동 강변역근처 저축은행으로 지하철로 도착하니 부부가 함께 기다리고 있다. 금융회사에 들어가 설정을 풀어주고 전체 1억5천만원중 사전에 입금한 5백만원을 제외하고 1억4천5백만원을 받았다. 원금이 1억3천이니 8개월 동안의 이자가 생긴 것이고 1억원의 주인인 영식이에게 원금과 이자를 정산하게 되면 내가 얻은 수익은 1천만원 정도이다. 김성만이가 경매로 넘어가는 노량진 다세대주택을 지키기 위해 급전이 필요했고 상황을 알고 있는 영식이가 1억원을 나에게 주어 책임있게 돈을 굴리고 이자를 50%씩 나누는 수순이었다. 결과적으로 김성만은 높은 이자를 지불했지만 어려운 고비에서 집을 잃지 않게 되어 가장 수혜자가 된 셈이다. 약수동으로 바로 달려가 김성우 맛있는 점심을 사 주고 집으로 와서 가벼운 마음으로 안산을 돌고 내려왔다. 저녁에는 용산에서 영식이를 만나 원금과 이자 등 금전문제를 완전히 처리하고 집으로 왔다.
30일 영식이 사업에 광선형과 내가 공동으로 5천만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하여 형은 3천만, 나는 2천만원을 합하여 입금했다. 운반선이 부산에 입항할 때마다 4백만원씩 받기로 약정을 했으니 형에게 수익금을 배분하여 보내면 어머님을 모시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오전에 개봉동 사무실에 나가니 설비나 전기 그리고 유리창호 소규모 사장들이 자신들의 급하고 어려운 입장을 이야기하며 모두가 한숨만 쉬고 있다. 완공된 건물이 분양이 제대로 안 되니 자재비나 공사대금을 못 받고 그러다보니 연쇄적으로 말단 인부까지 금전적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이다. 어머니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가는데 오늘도 광화문 일대는 광우병 촛불시위로 교통이 마비되어 있다.
31일 김성만 건도 해결되고 영식이 운반선 투자 타임도 제대로 맞아 모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오늘 경기도 안산에 가서 고3 강의를 하는 날이라 일찍 일어나 자료준비를 하고 식사를 했다. 아들은 학교에서 특별활동으로 축구를 한다고 의기양양 나가고 딸은 한양상가에서 내가 시킨 문제집 복사 심부름을 하고 학교에 갔다. 오전에 책을 보며 보내는데 점심쯤 아내와 딸이 함께 청주에 간다고 나선다. 2시에 안산에 올랐다가 내려와 5시에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7시에 경기도 학원에 도착했다. 수업은 8시에 시작하여 연속 강의로 11시에 마쳤고 4호선을 타고 금정역에서 막차 1호선으로 갈아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결국 택시로 새벽 1시경 집에 왔지만 장거리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피곤했고 무엇을 하고 왔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밤이 가고 아침이 오면 장미꽃이 만발한 6월은 또 다른 모습의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