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의 영토에서, 1부
푸른바다/ 정건철
비가 오지 않아서
마른 먼지 푸석거리는 땅의 풀들은
독기 품은 칼날처럼
공중을 산산조각 내며 날을 휘두르게 되지
생명은 주문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고
저들의 굶주린 속성엔 때로
우주의 질서마저 비웃고 있으리라
늘 죽음을 내놓고 사는 풀들의 결기 끝엔
목숨을 초개같이 터는 결의는 돋아나고
정의로운 바람들은 보이지 않는 저 슬픔마저
자유 앞으로 와서 목 놓아 울게 한다
남모르는 속앓이를 하고 있구나.
고통의 각혈이 시작된 어디쯤에서
우리들은 서로서로 얼싸안고 살아 있을까
속절없는 생각에 해는 기울고
서편, 붉게 물든 하늘 끝엔
지쳐 흔들리는 풀잎들을 향한 핏빛 언어
생명의 허구를 쓰다듬고 있을 때
우리들은 벌써 밤을 찾아내고 있었다
검은 휘장을 내려야지, 온통
묻어둬야 할 이유 있는 것들에게서 다시는
새날의 눈부심을 오염시키지도 말아야지
풀의 생명은 오늘도
죽음의 가사를 시퍼렇게 끌어올리며
뿌리를 옮기고, 그들에게서 새로운 영토는
피 끓는 투쟁으로 얼룩지며 또 푸르러 갈 것이다
* 풀의 영토에서, 2부
황폐한 곳의 기근을 먹고 사는 풀들을 보아라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곳에 촉수를 대고 사는
저 목마른 걸음의 생애들
스스로 제 목숨 움켜쥐고 나아가는 건
절망으로 무장한 희망의 봉기 아니랴
오, 그 강단있는 품새 싱그러워라
푸른 물결 같은 감동으로 피어나
온 대지를 푸르게 물들이는 풀들의 영토
각박한 세상에서도 간혹,
감명을 주는 인정의 꽃은 피어나듯이
푸른 핏톨 같은 혈관 넓혀가며
메마른 세파를 폭소하듯 피어나는구나
자신의 뿌리를 말려가며 길을 내놓고
비옥한 토분의 몸으로 쓰러지며
또 다른 생명에의 찬미를 소리 없이 외쳐대다니
마치 의롭게 죽어가는 장렬함이
푸른 하늘 끝에 닿아 하늘 더욱 푸르네
몸소, 선구자적 순명을 지키며 살아왔느니
소리 없이 무너지며 고결한 임종의 뜻을 펄럭여도
눈먼 자의 너와 내가 몰랐던 것
그 소외의 땅으로부터
꽉 막힌 세상들을 우리는 보아왔지
오직 죽을 만큼의 고독한 자들만이
도저한 침묵의 저 수신호를 해독할 뿐
그러나 이제야 깨닫는다
추락하는 이름 앞으로 몰려드는 한낮
이름 없는 잡초들의 무성한 반란을
어찌하여 저 황막한 산야를 끝도 없이 기어오르며
인해전술처럼 겁 없이 버린 목숨 위로
푸른 생명을 잔혹하게 키워내고 있는 줄을
담대하구나
저 슬프고도 아름다운 피의 유전과
용감무쌍한 혈기, 그 유언의 행렬들
* 풀의 영토에서, 3부
드세찬 바람결엔 칼날이 있나 보다
초록들이 겁에 질린 양
속수무책 바닥에 부복한다
잡초들에게 무슨 이상 있어 고개 치켜들겠냐만
그들도 푸른 야성 그대로
죽어가기를 즐겨 배우며 지탱하던 목숨
위에 엎드린다는 것은 다 복종이 아니다
잔바람 결에도 바르르 떠는
저 항명의 옹골진 기척을 보아라
그러니 아직,
굽혀지고 있는 것들은 다 비굴이 아니다
진실한 눈물로써만 씻기워 질 생애의 대질
그래 흔들리자!
가슴 청량해지기 위해 비워가는 것 아니라도 좋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나가야 할 까닭을 찾아 나서야 하느니
고개 내젓지 마라
그저 섬세하게 나부끼자
생명 있는 것들은 다
천태만상 한 번뇌로서 목숨을 담보한
생애의 전쟁을 즐겨야 하느니….
2011, 8월에~
詩作 노트
*풀의 영토 3부작을 쓰기까지 내 인생의 전면적인 삶을 뒤돌아 보며 많은
생각을 이끌어 냈다. 애달픈 삶의 편린들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항상 음습한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인간이 겪는 고통들은 나만이 겪는 것이 아니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거의 대동소이 하다는 걸 나이 들수록 더욱 생생하게 포착 할 수 있었다.
모두가 바라는 삶의 목표지점은 인생을 잘 살고 싶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처럼
작용하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오직 나만이 더 많은 고통을 수반하고 있다는 착각도 하게 된다.
모든 인생의 열쇠는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그것을 극복해 감으로써 자기 성취가 이루어지는 실상에 바탕하고 있다.
그것만이 보편적인 민중의 삶이기도 했으며 정설이기도 했다.
모든 민초들의 삶을 질기디 질긴 풀의 속성에 비유하며 내 자신 속심에서 들끓는 욕망의 화기를 보듬고
풀들이 살아가는 영토에서 풀잎처럼 나부끼어 보았다.
김수영시인의 ‘풀‘이라는 시에서 풍기는 일면의 의식도 나에게 충분히 감지되었다.
’풀’ 이라는 시를 해설하고 있는 문태준시인의 글을 차용하여 여기에 몇줄 옮겨도 손색이 업을 듯하여
중요한 골자를 옮겨보도록 한다.
풀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흔하다. 풀은 자꾸자꾸 돋는다.
비를 만나면 비를 받고 눈보라가 치면 눈보라를 받는다. 한 계절에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한 계절에는 늙고 병든 어머니처럼 야위어서 마른 빛깔 일색이다.
그러나 곤란 속에서도 풀은 비명이 없다. 풀은 바깥에서 오는 것들을 긍정한다.
풀은 낮은 곳에서 유독 겸손하다. 풀은 둥글게 휘고 둥글게 일어선다.
꺾임이 없는 ‘둥근 곡선’ 의 자세가 풀의 미덕이다.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풀은 솔직한 육필이다. 풀은 ‘발밑까지’ 누워도
발밑에서 일어선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으므로 풀은 이제 벼랑을 모른다.
우리는 날마다 새날을 받는다. 새날을 받고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제에
있다. 어제의 슬품과 이별과 어제의 질병과 어제의 두려움 속에 있다.
그러나 어제의 곤란은 어제의 곤란으로 끝나야 한다. 열등은 어제의 열등으로
끝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심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은 만 명의 적이 와도 무서움이 없으며 물러섬이 없을 것이다.
자존(自尊)과 자립(自立)의 에너지가 우리의 자성(自性)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 일어서고 있다는 믿음, 넓고 큰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 일어서고 있다는 믿음, 넓고 큰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는 믿음......,
우리는 이 짐작과 다짐으로 새날을 살아야 한다. (이하 생략)
*거대한 의식의 아우라가 지금 내안에 푸른 풀잎처럼 생성되는 느낌이 참좋다
2021, 08, 14, 새벽에
첫댓글 질긴 풀의 속성에서 우린 굴하지 않고 일어서는 의지도 배우지요
요즘처럼 힘든 시기 잡초처럼 끈기가 필요합니다
풀의 영토에서 3부까지 또 읽어 보며 감상합니다^^
한결같은 글 길에서 표표한 의식의 일면을 읽습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 성의를 다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요.
흥겨움을 선사하고 의욕을 고취시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새날들에
힘찬 희망의 부표를 띄워 놓습니다. 한줄의 글에서라도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일...
여기, 이 한순간에 찰라적 아름다운 생을 포착케 할수도 있습니다.
한줄의 글 속에서도 생명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덧 없이 찾아오는 이 하루에서 나른한 하루의 피로가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읽어냅니다. 비로소 하루의 의미마저 사시사철 청푸른 솔입같습니다.
늘 좋은 날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