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아이들한테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진짜 인생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하는 관용구입니다(인간에 대한 앎에서 나오는 교육과 수업, 2024, 131)."
위 문장을 읽으면서 필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 옛날 시절이 생각났다. 사회적인 분위기는 먹고 사는 어려움에서 조금 놓여났고, 당시 정부의 산아 계획으로 아이들도 한 가정에 통상 2명 정도였다. 자신은 여러 형제 속에서 살다가, 또 먹고사는 걱정에서도 놓여나니 1-2명의 자신의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짐작은 되지만 이 불똥이 급기야는 학교로 튄 것이 문제이다.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자신의 귀하고 사랑스런 아이가 어려움을 견디는 것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모든 방향은 돈이 되는 곳으로 향한다. 당시 유명한 분이 언론에 나와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교육은 해서는 안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사회적인 분위기는 서서히 학부모들의 입맛에 맞추어서 굴러갔다. 짐작하기에 돈이 되는 학부모들의 마음을 읽고 언론(사회)에서 앞서 나간 것이다. 여담으로 열린 교육을 비롯해서 교교 학점제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정책들이 모두 이런 바탕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비약하면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없는 교육 정책으로 말미암아 현재 교육이 마치 '넝마'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학부모들의 비위에 맞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조성이 되자, 학교도 이제까지 했던 교육을 버리고 사회적 분위기에 서서히 끌려가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교육이란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들이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아이들이 스스로 어려움을 감수하는 교육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다. 당시 유행했던 말,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가장 시대에 뒤떨어지고 변화가 어려운 곳이 학교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교사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교육 현장이 변화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교사들이 교육을 포기한 결과라고 말해야 정확하다. 당시 필자뿐 아니라 모든 교사들이 그랬을 듯, 순식간에 달라진 분위기가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살아남을려면 어쩔 수없이 맞추어야 했다.
그래서 당시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면 어떤 교육을 할 수가 있을까?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런 교육은 있을 수 없다고, 교육이 되지않는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론적인 바탕이 전혀 없는 당시 필자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고, 사회적인 분위기 역시도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다음은 교육을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교육이란 조야하게 말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마음을 바꾸는 일은 어른이라도 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하기 싫은 일을 할려고 할 경우, 생각으로는 해야 하는데 마음이 거부하면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부(숙제)를 해야 하는데, 이건 생각으로는 해야 한다는 것이고, 마음이 하기 싫으면 공부하기가 어렵다. 작심 삼일 등등 대부분이 이런 경우이다. 마음이 하기 싫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 법륜스님이 잘 드는 예이다.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데 하면서 안 일어나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지, 몸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핑계다. 왜냐하면 누가 총을 들이대고 죽인다고 하면 벌떡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진짜 몸이 아프다면 총을 들이대도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극복하는 경험을 해야 앞으로 스스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한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주는 곳이 학교이고, 또 이 시기 아이들이다.
다음은 그 이유이다. 첫째, 삶이란 이런 어려움의 연속이므로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야 자신의 삶을 산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극복하게 할 것인가가 질문이 된다. 둘째, 초등학교 시기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시기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신과학적인 요소인 에테르체가 이 시기에 탄생하기 때문이다. 에테르체는 인간 뿐만 아니라 삼라만상의 생명을 영위하는 힘이다. 우리가 호흡을 하는 힘이 에테르체인 것이다. 이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 하면은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숨을 쉬며, 숨을 또 그렇게 평생 쉬어도 피로하지 않다. 이 힘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라고 할 수가 있고, 또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여기에서 끌어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하신 말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는 말씀이 곧 에테르체의 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고자 한다면, 그때 에테르체의 힘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죽을 만큼 힘들 경우 극복하는 힘이 에테르체에서 나온다. 그래서 이 시기,에테르체가 탄생하는 시기에 아이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험을 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이 시기 아이들은(7-14세 사이) 에테르체가 탄생했으므로, 자신의 에테르체를 파악하거나 활용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래야 훗날 어려움을 극복할 때 자신의 에테르체의 힘을 쓴다. 넷째, 에테르체의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교사를 통해서 이 시기 아이들이 배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이 시기에 에테르체가 탄생했으므로 활용할 줄을 모른다. 그 방법이 교사의 '권위'인 것이다. 교사 역시 자신의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자신의 에테르체를 뢀용하기 때문이다. 다섯 째, 그러므로 아이들은 교사의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교사의 권위인데, 교사가 교육내용을 가르치면, 아이들은 교육내용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에테르체를 경험하고, 다스리고, 활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앉았다 일어서기를 할 경우, 앉았다 일어서는 활동은 에테르체가 움직여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교사가 잘못했다라고 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에테르체를 단련시킬 수가 없다. 물론 지금은 인류가 정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정신과학적 요소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에테르체의 발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하면 여기서 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에테르체의 모든 기능이 발달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생각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 방법은 무엇일까? 영혼활동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영혼 활동은 사고(생각), 감정, 행동(의지)으로, 인간이 영혼활동을 하지 않는 경우는 죽음뿐이다. 살아있는 한 영혼활동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일을 한다면 반드시 영혼활동이 이루어진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서 생각은 의지가 발현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생각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생각이 마음으로 갈려면 반드시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 이 의지가 에테르체에 접목, 연결되어야 아이들이 의지를 발현시키는 것이다.
그 시기가 초등 시기, 에테르체가 탄생하는 시기이고, 이 시기에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험이 에테르체에 각인되어야 훗날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되풀이지만 그런 경험을 하는 시기가 초등시기이고, 교사를 통해서, 교사의 권위를 통해서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발달이 평생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아이들이 의지를 교사의 권위를 통해서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누구라도 의지를 낼려면 힘이 든다. 이렇게 힘이 들지만, 교사의 권위를 받아들이면, 아이들은 그렇게 힘이 들지 않고도 의지를 낼 수가 있다. 왜냐하면 권위란 그대로 받아들여서 따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교사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왜 해야 하느냐'라고 물으면 에테르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할 적당한 말도 없다. 안해도 된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에테르체를 활용하지 못한다. 훗날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슈타이너는 이 시기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중에는 절대로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훗날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 되어서 자신의 삶을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 에테르체는 우주의 지혜를 내포하고 있다. 만약 자신의 에테르체를 활용하거나 파악한다면 우주의 지혜를 얻는다. 현재 만약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렵다면, 이 시기 자신의 에테르체가 발달하지 않았다고 봐도 된다.
이제 첫 문단으로 다시 돌아가서 당시 교육을 어떻게 했느냐 살펴보면은, 아마 대부분의 교사들이 이렇게 했을 것이다. 아이들을 힘들게 하지 않는 교육이란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이란 아이들이 그 일을 함으로써 의지를 발현시키는 일인데, 힘들게 하지 말라니 교육을 하지 않을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교육이 겉으로 보이는 작업이 아니라서 안해도 당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훗날 아이들이 커서 드러나기 때문에 교사들이 그렇게 해도 알기가 어렵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내용인데, 중학교 아이들의 문해력 수준이 초등 3학년 수준도 안되고 수학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 이유가 수학문제를 풀거나 글을 읽고 해석하는 일 모두가 생각만으로는 안되고 의지가 발현되어야 한다. 의지가 발현되어야 사고가 행동으로, 에테르체를 통해서 이해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아이들이 공부를 안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에테르체가 발달하는 시기에 교사의 권위를 통해서 의지를 발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자아가 21세에 탄생하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스스로 판단하거나 선택하지 못하고 주변에서 이끄는 대로 끌려간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러므로 이 시기 아이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교육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에테르체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그렇게 된 자신을 파악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언론을 통해서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 시기 아이들을 망치고 말았다. 결국은 어른들이 돈, 권력(선거)을 잡고자 아이들이 희생된 것이다. 교사들은 왜 거기에 순응했느냐고 물으면, 당시 교사 역시 이런 교육을 받지 못해서 이런 내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역시 그런 흐름이 이어진다. 아이들의 문해력과 수포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많은 대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많은 예산을 배정해서 방과후 교사 등을 도입하지만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교육은 '자유'가 근본 바탕이다. 왜냐하면 이런 정신과학적 요소는 자유를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통제할려고 하는 학부모들의 마음이 있는 한,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교사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 아이들의 정신과학적 요소가 제때 발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 영혼은 연령대에 따라 특정한 것을 요구합니다. 나이에 맞는 것을 주지 않으면, 영혼은 불리한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위 책, 140)."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즉 지금의 청소년들, 교사의 권위를 무너뜨린 이후의 세대들의 문제들이 특히 그렇다. 그러므로 교육이 신자유시대의 논리나, 또 돈과 권력을 잡는 하부요인으로 전락하면, 부메랑이 되어서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