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사건과 인간 의지를 통한 사건 사이에 경계는 절대 선명하기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통해서 표상으로 매개되는 것과 외부 과정 사이에는 언제나 분명한 경계가 있습니다(청소년을 위한 교육예술, 2023, 52)."
현재 우리가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점점 늘어나는데, 그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뭘까? 예를 들면 직업을 구하지 않고 구해도 금새 그만두는 청년들, 집밖을 나오려고 하지 않는 은둔 청년들, 마약과 같은 약에 쉽게 중독되는 청년들, 또 선동에 쉽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청년들, 그들은 왜 그렇게 되는가. 그 이유가 질문이다.
현재 정부와 지자체에서 온 힘을 다해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점점 더 늘어나는 듯 효과도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급변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인류는 농업혁명, 산업혁명, IT 혁명을 거쳤고, 현재는 인공지능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중에서 인공 지능 혁명이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당시 모든 혁명이 그랬듯이 인공지능 혁명도 마찬가지로 일자리가 사라지거나 새로운 일자리로 바뀌고 있다. 전문적인 일자리, 반복적인 일자리할 것없이 인공 지능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데, 아직 가시화되지 않는 상태, 우왕 좌왕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얼마 전 언론 보도에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회계사들의 70%가 취업을 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 상황이 가히 짐작이 된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난 순간들을 생각해 보면 당시도 모두 몹시 어려웠겠지만, 인류는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에 현재에 이를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인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 그런 변화를 이긴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 존재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물론 그 상황에 맞게 적응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적응해 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변화해서 적응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질문으로, 이 시대의 청소년과 청년들이 힘이 드는 이유와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살펴 볼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는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이다. 15 세기 과학혁명 이후 인류는 이러한 인간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 또한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중에서 육체는 단지 물질로만 인정이 된다. 그러므로 아주 조야하게 말해서 정신이 발달한다거나, 정신이 어렵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정신으로 인한 병, 조현병, 우울증, 공황증세 등등. 하지만 이러한 정신병은 여전히 점점 더 널리 회자가 된다는 것도 역시 모순이다. 이러한 상황이 급속도로 퍼진 것은 19세기 과학의 발달이고, 그 이전에는 그나마 희미하게 여명으로나마 정신이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짐작하기에 19세기 이후 교육을 받은 세대들의 정신이 특히 어렵게 되었고, 그런 상황이 20세기, 현재의 21세기 초입까지 왔다.
그렇다면 정신을 인정하던 그 때와 인정하지 않는 지금과의 차이가 어떨까가 궁금하다. 다음은 이에 대한 슈타이너의 예이다. 슈타이너는 이를 에테르체의 차이로 설명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불에는 온기와 건조함이, 공기에는 온기와 습기가, 물에는 냉기와 습기가, 흙에는 냉기와 건조함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위 책, 188). 이것이 그리스인이 파악한 에테르체의 느낌이다. 이렇게 (그리스인이) 에테르체의 느낌을 파악했다는 것은 자신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에테르체의 작용을 파악했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이런 느낌이 인간의 몸에서 작용하는 에테르체의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에테르체는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므로, 이것을 느낀다면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 증폭될 수도 있고, 반면 못 느낀다면 쪼그라 들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현재의 우리 생각이다. 세계는 70여 가지의 화학원소가 있고, 외부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원소의 합성이나 분해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전문가이고, 그리스 시대 사람들처럼 불, 물 흙, 공기를 그렇게 느끼면, 시대에 뒤쳐진 사람들이다. 그렇게 에테르체의 느낌이 완전히 배제된 채 70여 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나의 에테르체가 내 몸에서 하는 작업을 모르는 상태가 된다. 이는 내 몸을 물질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물질처럼 인간의 나이 50세가 되면 서서히 몸이 경화되어 시체가 되어 먼지로 분해되는 상황으로 간다는 것이 슈타이너의 주장이다. 반면 에테르체의 느낌을 알면 내 몸에서 일어나는 에테르체의 작업도 알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몸도 다룰 수가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어느 날 건강검진을 하러 지방 소도시 내과에 갔는데, 발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대부분 약을 타러온 환자들이었는데, 일주일치, 보름치, 한달치 약을 타러 온 듯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마치 마루타와 같은 신세로 만드는 일이다. 어떤 약이든 약을 먹으면 그 부분은 정상으로 수치가 나온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도 일시적이다. 그렇게 그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부분만의 문제가 아니고, 온 몸의 기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온 몸의 기능이 잘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물론 건강 검진으로 자신의 몸의 기능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데, 이 또한 사후 성격이라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본능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본능이 에테르체의 기능이다. 12세 이전 아이들에게는 음식에 대한 본능이 살아있어서 12세 이전 아이들은 음식을 많이 먹는 과식을 하지 않는다. 본능이 조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12세를 기점으로 희미하게 저물어가므로 이 시기 이후에는 이성으로 음식을 조절해야 한다. 그래서 이 시기 아이들에게 교과과정으로 영양에 대해서 가르친다. 동물은 본능이 평생 작용해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지만, 배가 부르면 먹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본능을 살리면 자신의 몸을 스스로 조절할 수가 있다. 약을 먹는 것은 이러한 본능을 죽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 본능을 살리는, 몸이 저절로 기능을 하도록 하는 방법이 걷기이다. 걸으면 온 몸의 기능이 살아나서 조절을 한다. 걸으면 에테르체의 생명의 힘이 온 몸에 흘러서 에테르체의 힘이 증폭된다.
다음은 위문장과 정신의 관련이다. 먼저 말하면 인류가 정신을 배제했기 때문에 정신의 발달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과학적인 요소 역시 발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현재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은둔하고 쉽게 마약에 빠지는 것은 어떤 일에 의지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는 상태다. 또 어떤 일에 선동을 쉽게 당한다는 이야기는 누군가 선동을 하면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하지 못하고 끌려간다는 것이다. 이 또한 정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주입식 교육으로 아이들의 사고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계, 자동기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의지를 발현시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인간의 영혼 활동에 있다. 인간의 영혼은 공감활동과 반감활동을 호흡처럼 한다. 공감은 대상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활동이고, 반감은 대상에서 물러나와서 대상을 사고하는 활동이다. 인간의 영혼은 공감으로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한다. 대상과 하나가 되면 하나가 된 그 활동을 하게 된다. 의지가 발현되는 것이다. 예컨대 가수의 콘서트에 가서 가수의 노래를 열창하는 것은 영혼의 공감활동이다. 문제는 이 공감이 겉으로 절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의지가 발현되는 상황을 감지하는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반감은 대상에서 빠져나와서 대상을 사고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가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인간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영혼 활동 중에서 보이는, 감지되는 사고만 인정하게 된다. 즉 공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배제되는 것이다. 공감이 배제되면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문제를 이해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찾지 못한다. 요즘 청소년들, 청년들의 모습이다. 또 의지가 발현되지 않으므로 어떤 일을 꾸준히 적극적으로 하지도 못한다. 정신을 배제한다는 것은 공감 자체를 배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정신을 배제한다고 해서 영혼이 공감활동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잔다는 의미이다.
영혼활동에서 반감은 어떤 일을 하게 하는 힘은 없다. 현실에서 하는 사고가 상이기 때문이다. 즉 상에서 공감활동으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정신인 것이다. 여기에서 위 문장이 등장한다. '외부사건과 인간 의지를 통한 사건 사이에 경계는 절대 선명하기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머리를 통해서 표상으로 매개되는 것과 외부 과정 사이에는 언제나 분명한 경계가 있습니다'. 외부사건과 인간 의지를 통한 사건이란, 인간 의지는 외부사건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즉 인간 의지는 외부(대상)와 하나가 되어야 발현된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의지가 발현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류가 정신을 배제한 지금의 학교 교육은 외부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을 오히려 막는다. 하나가 되려고 하면 즉시 막아서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지식 그 자체가 대상으로 보고 글자로 표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머리를 통해서 표상으로 매개되는 것과 외부 과정 사이에는 언제나 분명한 경계가 있습니다'는 말은 표상은 대상으로 보는 영혼의 반감활동으로 대상과 분명 경계가 있다. 경계가 있으면 의지가 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청소년과 청년들이 어떤 일을 하는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신을 인정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인간 영혼의 공감황동과 반감활동 중에서 공감활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성으로 배제되어서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현재 반감활동은 강조되지만, 이는 현실에서 상으로 의지를 발현시키거나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지만 공감활동만 강조하면 대상을 사고로 파악하지 못하므로 현실에서 허황한 상황에 몰두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디(?)에 빠지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천재들은 어디에 빠져야 한다.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정신의 발달, 공감과 반감의 활동이 고르게 발달해야 하는데 특히 에테르체의 발달이 중요하다. 공감이 발달할 수있는 유일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7-1세 사이 에테르체의 탄생 시기이다. 이 시기에 공감활동만 잘 이루어져도 지금과 같은 청소년들의 문제, 청년들의 문제가 많이 감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