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버스의 패러독스 -「이생규장전」을 읽고.. (김숙례)
200330010 김숙례
밤하늘이 왜 어두운지 아는가? 해가 지니까..밤 =(equal) 어둠..이것은 보통의 우리네들이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김시습은 어두운 밤에 대한 실마리를 풀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에도 풀리지 않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이생규장전을 통해 올올이 형상화 시켰다.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힘들게 극복한 사랑은 또 한 번의 고난. 전란에도 불구 이뤄지지만 결국은 헤어지게 된다는 다소 비극적 이야기는 애를 쓰며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참여했음에도 변화되지 않은 세상에 내던진 일종의 경고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밤이 어두운 이유를 밝히기 위해 먼 우주를 여행하는 빛이 우주 공간을 지나면서 우주공간을 채운 물질들에 조금씩 흡수된다는 가정을 세운 올버스. 지구에 닿는 빛이 약해서 밤이 어둡다고 했지만 빛에너지를 흡수한 물질의 에너지가 높아지고 계속 빛을 흡수하다보면 그 자신이 나중에 온도가 높아지며 빛을 발하게 된다는 오류가 발생되면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만다..김시습은 당시의 상황을 이와 같은 올버스의 패러독스의 성립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한 김시습의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생규장전을 들여다보자.
시선 첫 번째, 이생이 담을 엿본 것 그것이 발단의 시초다. 담 넘어 안쪽은 속세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이생에게는 또 다른 공간인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적 특징을 두루 갖춘 존재임에도 불구 현실세계의 불만이라고 할까? 지루와 고단을 느끼고 이상의 이질적인 가치관을 내재하고 있는 담 안을 엿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엿보는 행위는 표상적인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시선 두 번째, 이생규와 최낭자의 만남이다. 선남선녀, 천생배필..소설 서두부터 두 남녀의 특별함을 강조하며 이야기는 풀어 나가고 있다. 그러한 특별한 사람들끼리의 만남은 가히 있을 수 없는 인연의 끈을 매듭지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지나침이나 강조는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의 극적 긴장감의 원칙에 따라 뒤에 이어질 시련을 꾸며 주는 장치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어울림의 가장 완벽한 전형성을 보여 주고 있는 두 남녀의 이상적 만남은 오히려 현실에서의 이루어 질 수 없는 헤어짐으로 고리고리 연결되는 아이러니한 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시선 세 번째, 부모의 반대다. 이것은 일차적 고난에 해당된다. 사랑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으로 이미 이생이 최낭자의 시에 어쩌다 봄 소식을/ 행여 전치 말 것을/ 비바람 무정함도/그 또한 슬프고녀/ 화답하면서 일어날 것임을 예견했던 일이다. 이는 집안끼리의 내부적인 요인에 불과하므로 곧 개인의 의지로 비교적 수월하게 진압한다. 그러나 커다란 뮤직박스 안의 작은 나사 정도는 조일 수 있는 힘에 불과하기 때문에 거울이 깨지는 원론적인 계기가 된다.
시선 네 번째, 홍경래의 난으로 인한 이차적 고난이다. 이 역시 최낭자가 이승의 법을 넘어서 목숨을 다한 상태의 모습으로 나타나 현실의 연을 이어감에 따라 어느 정도 극복이 되지만 앞서 말한 올버스 패러독스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임을 지각하고 주목해 볼 필요성이 있다. " 홍경래의 난" 은 당시 조선의 봉건적 사회상이 주요 원인으로 인해 일으킨 민란이다. 세조 정권의 왕위찬탈과의 연계선상에서 바라보자면 순리를 거슬리는 역행 구조이다. 세종의 왕위를 이어 문종과 단종으로 이어져야 할 나라의 운명에 세조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로 야기되는 억울한 여러 희생들 - 김시습은 바로 최낭자의 죽음으로서 표현하고 있는 - 로 인해 세상은 탁한 채색의 옷으로 덧입혀진다.
김시습은 그 경계를 넘어서까지 이 혼탁한 어둠에 타협하지 않는다. 어두운 이승을 인정하지 못하고 좀 더 실증과 구체적인 개혁을 위해 대변인 최낭자를 통해 죽음조차 넘어 남편의 곁에 안주한다. 보편적인 기준에 의한다면, 세계의 질서와 맞물려 본다면, 당시의 조선 사회는 어둡지 말아야 할 논리가 뒤따르지만 김시습과 맞닥트린 세상은 이상하게도 어둡다. 그는 마지막 몸부림의 수단으로 죽음을 거슬리는 선택을 한다. 그 몸부림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부부의 연이 다할 때까지는 적지 않은 행복을 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몸부림의 결과는 이별로 끝을 맺는다. 이것이 시선 다섯 번째다.
가장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시선 여섯 번째, 병들어 죽은 이생이다. 그는 최낭자 - 불협화음에 손을 잡지 않은 김시습의 분신 -의 의지에 흡수된다. 최낭자 자신이 신념을 굳건히 하였더니 남편까지 그 의지를 쫓아 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의 어두움이 마냥 비극적이고 암담함으로 무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당장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앞으로도 계속 물리적으로 불가능 한 것만은 아니다. 일말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길을 조금 열어 두었고, 그 단서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 시선 일곱번째, 결국 그는 자신의 사상과 생각이 내재되어 있는 최낭자의 열정, 열의 에너지를 거듭 말하고자 하고 있다. 이생과의 인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최낭자의 노력과 의지의 작용이 컸다. 그녀가 꽃 사이에 졸 고 있던 앵무새를 깨웠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혼인 전 최낭자의 화원에서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었던 것, 이생과의 결합을 위해 병으로 앓아 누었던 것,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지킨 절개(죽음을 초월하는), 이계의 질서를 깨트리면서까지 모험을 감행한 점..그것은 어떠한 순간에도 굳건한 믿음으로 밀고 나간 김시습의 혼과 일맥상통하며 그려지고 있다.
사회의 폐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별이라는 사회의 결말로 맺었다고 해서 섣불리 김시습이 완패했다는 단점은 큰 오산이다. 부모의 반대, 전란, 이계의 질서 대항, 곳곳에 배제되었던 갈등들을 부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여전히 어두울 수 밖에 없는 세상은 확실히 올버스의 패러독스와 같다. 그러나 들의 이별은 패배가 아니다. 끝까지 정조를 지킨 최낭자, 최낭자를 그리다 병들어 죽은 이생은 어두워진 세상의 원리 올버스의 패러독스를 풀지는 못했으나 어둠에 물들지 않고 끝까지 자신들의 신념을 고수했다. 그들은 이미 승리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생규장전의 인물들은 좀머씨 처럼 마냥 달리거나 우두커니 서 있지만은 않았다. 비록 만족스러운 결과로 끝을 장식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그들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가치하나로 믿고 순종하며 밀고 나가려는 혁명적인 의지가 있었다.
김시습이 바라본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그것은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는 올버스의 패러독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