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동녘과 함께 요한복음 5장 1-9절
올해로 동녘이 창립 38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38년 동안 이 공동체를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과 그리고 함께 애쓰고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번에 송원석 집사님 기획하신 책을 보면서 동녘도 40주년이나 50주년 즈음에는 주제별로 이야기를 묶어서 이야기와 툰과 비하인드 스토리 중심으로 하나씩 맡아서 역사책을 엮어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신앙의 다양한 주제를 교리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이야기로 풀어가면 보다 실감있게 읽혀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찌했든 지금까지 동녘과 함께 해 왔던 수많은 분들, 그리고 종교재판의 위기 속에서도 그리고 그 후 가장 어려웠던 시절 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몸소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던 분들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시간의 역사를 만들어내고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동녘교회는 여전히 슈퍼마켓만큼이나 교회가 많았던 시절에, 그리고 한국사회가 민주화를 향한 열정이 절정에 치닫고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회는 역사와 사회, 시대의 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시대, 그리고 오직 성장과 부흥, 배타적 사랑과 맹목적인 믿음을 좋은 믿음으로, 질문하고 의심하는 신앙을 나쁜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독교중심의 제왕적인 왕국 건설로 가르치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지켜온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계했습니다. 무엇이든 질문했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신앙을 존중했습니다. 내 믿음과 내 방향이 우리안에 갇혀 우리만의 바벨탑을 쌓는 건 아닌지를 경계했고 제대로 신앙하기 위해 확신보다는 믿음보다는 열린태도, 열린신앙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성서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성서 안의 증언, 옛 신앙인들을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 경험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것만을 절대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옛 사람도 사랑하시지만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인간도 사랑하시지만 자연도 동물도 사랑하시고 기독교인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기독교 밖에서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시고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서와 함께 역사, 인문, 자연, 타종교, 그리고 소수자의 경험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성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복성을 넘어서서 원복성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기도와 신앙생활을 통해 나만 잘되고 우리가정의 평안만을 추구하고 우리교회만의 성장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재적 은총을 존중하며 공존하는 원복성을 강조했습니다. 마치 갓태어난 아이를 안고 신기해 하듯 모든 존재를 그렇게 끌어안고 계시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 없는 존재는 없으며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귀하고 소중하며 축복안에 있으며 축복을 받아야하는 존재임을 존재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 내 가족의 안정과 평안과 회복도 기원하고 공동체 이웃 아픈 이들의 회복도 기원했고 모든 종교가 모든 존재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성장이 아니라 따스하게 공존하는 삶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개인적인 차원의 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안의 평안과 위로와 건강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우리 더 나아가 관계적이며 사회적인 소명에도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때로 나의 평화가 이웃과 관계의 평화를 지켜주지만 때로 지역, 이웃, 사회, 나라, 세계의 평화가 우리의 평화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리의 종교가 아니라 삶의 종교/특히 예수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보다 우리가 가진 믿음과 신앙으로 일상을 <어떻게 먹고 어떻고 입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존재하느냐> 즉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니라 신앙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이었고 평화가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철저히 우리에게 맡겨진 소중한 가정과 사람들, 일과 관계들을 위한 것들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좀 더 많이 좀 더 깊이 좀 더 자유롭고 풍요롭게 삶을 사랑하기 위해 성찰하고 사랑하는 종교적 삶을 추구했습니다. 앞으로도 동녘은 이러한 신앙을 계속해서 잘 견인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동녘의 모습에 이런 모습이 더 풍요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첫째는 수행하는 문화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공동체에서 종교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종교공동체는 마루종에 가르칠교 삶의 근본, 본질적인 것들을 가르치고 성찰하고 수행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그 어느 공동체보다도 수행하는 전통이 풍요로워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의 삶을 놓고 그분의 삶을 따르기 위해 애쓰는 공동체라면 그분의 삶을 내 삶에 뿌리내리기 위해 부단히 수행하는 거죠.
여기서 수행은 학이시습에서 배움의 영역이 아니라 습 익히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젬배를 4년째 배우고 있는데 제가 젬배를 배우지만 젬배를 치는 방식이 고스트 노트, 스랩, 베이스 세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가운데 베이스, 그리고 측면을 세게 치는 스랩, 그리고 측면을 약하게 치는 고스트 노트, 이 세가지 치는 방식의 다채로운 변형입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쳐야한다는 걸 처음에 배워요. 배운다고 아는 게 아닙니다. 아는게 아는게 아닙니다. 1년 동안 여러 주법을 배우면서 치다보면 치는 느낌이 어느 단계에 올라요. 4년을 치고 나니까 선생님이 같은 주법인데 그걸 제대로 치려면 손가락을 모으라는 겁니다. 근데 그걸 처음에는 아무리 알려주어도 못 친다는 겁니다. 2-3년 동안 쳐서 실력이 올라와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습이 받쳐주지 않으면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종교의 영역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한다 건 다 알지요. 근데 막상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을 못합니다. 그런데 습 연습하는 거죠. 한번 하고 두 번하고 수행하듯이 하다보면 어떤 날은 그 단어에 깊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면서 습이 쌓이면 만나게 되는 세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분이 명상을 배우고 싶데요. 그래서 유튜브 치면 명상이 정말 많이 나오는데 그것 중에 하나 골라서 세 달하고 그때 오면 가르쳐주겠다고 했어요. 습이 쌓이지 않고는 말을 못 알아들어요. 요즘 천만원짜리 명상도 있어요. 습이 쌓이지 않고 가서 들으면 내 꺼로 만들기 쉽지 않아요. 할 때는 좋지만 지나면 그만입니다. 습이 쌓여야 보이는 세계가 있습니다. 습에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매일매일 성경을 필사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설거지 수행을 한다든가, 빨래 수행을 한다든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매일 매일 그 시간이 되면 몸이 그곳에 있는 겁니다. 사실 매 주일 예배에 오는 것도 수행이고 돌아가면서 기도당번을 하고 식사당번을 하는 것도 수행이지요.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배움이 많아 가르치려는 사람이 많은 세상보다는 몸으로 하는 습이 많아서 몸으로 만들어내는 실천과 평화가 많은 세상은 보다 더 살만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게 생명평화 100배 절기도입니다. 제가 동녘에서 40배 절 기도를 시도해 본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녹음의 문제로 제대로 못 이어갔어요. 그리고 최근에 만난 기도가 이건데 우리 식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1. 매일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향한 근본을 성찰하고 시작합니다.
2. 절기도 : 생명을 겸손히 받드는 정신을 몸으로 쌓아갑니다.(겸손, 교만)
3. 온몸을 씁니다. 절대 50견 같은 것 안 걸립니다. 근육을 발달시킵니다.
4. 재활치료의 효과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닫혀져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열려있는 그러면서도 안전한 돌봄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저희 교회에는 “언제든지 달려갈게” 일명 언달이 있습니다. 지금은 소규모로 3-4명이 교인들의 집에 도울 일이 발생할 때마다 언제든지 달려가 해결해 주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세탁기도 고쳐주시고 필요하면 당근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형광등도 고쳐주시고 의자도 고쳐주시고, 그냥 혼자서 해결하기는 어려운데 한 두 분이 결합하면 쉬운 그런 일들을 함께 힘을 모아 도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돌봄 시스템이 소일거리에서 다자간의 네트워크로 좀 더 커지는 거죠. 그래서 서로의 지식과 지혜와 달란트, 그리고 소유가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시스템으로 발전시키는 거죠. 그러면 자본주의 시대 조금은 덜 돈을 가지고도 행복의 질을 높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텃밭의 규모를 조금은 더 안정적이게 가져가서 생산 공동체를 만들어 오병이어의 은행도 좀 더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생활을 넘어서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자존심 크게 다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이러한 정신을 협동조합의 형태로 만들어 교회를 넘어서서 좀 더 이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열린 형태로 발전시켜갈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동녘이라는 공동체는 있지만 그 경계를 알 수 없이 연결되어 그 네크워크처럼 연결된 네트워크가 놀이와 노동과 관계와 필요를 함께 채워가면 느슨하지만 좀 더 큰 픽텐트를 쳐가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동녘이 커지는 게 아니라 유기적 관계속에서 서로 안전하게 돌봄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커지는 그런 동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이와 관련된 담론들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부서를 만들어 그 담론을 구체화하고 필요하면 배우고 사례도 연구하면서 좀 더 진전시켜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이들어가면서도 좀 더 안전함을 느끼는 공동체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38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아왔던 환자가 자기 자리를 걷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38년 동안 그를 앉은뱅이로 앉혀 놓은 건 그의 육체적 현실이었을까요 아니면 나는 물이 동할 때 제일 처음 들어가야 나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처지와 현실에 놓여 어쩔 수 없었다 생각했던 그의 의식이었을까요?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어갈 수 있는 능력(가능성)이 언제나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예수가 되어 줍시다. 그래서 우리 안의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있을 때! 보다 실제적인 손으로 만져지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들을 몸으로 경험하고 느끼고 살아갑시다. 이런 귀한 연대의 길에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예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함께 애쓰고 노력하며 살아온 동녘의 38년의 세월을 귀히 받아 안으며 그 길을 함께 진심으로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