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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한불 국제연대세미나 - 대토론회
준비된 교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프레네 교육의 교사성장론과 한국의 교사양성론
축사 및 기념강연
송순재. 감리교신학대학교
1. 유영모의 제자인 김흥호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모쪼록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 선생님을 만나야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
저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선생님들을 몇 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점에서 적어도 저는 김흥호 선생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게 되었기 때문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대학 시절 제게 가르침을 주신 김정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인격적인 만남을 시도하셨습니다. 소년 같으신 마음으로 전해주시는 수업 시간은 늘 열기로 가득하였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면 페스탈로찌를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새해 인사를 드리러 가면 늘 한 상 가득히 차려 제자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제가 학부에 다닐 적에 저를 당신의 연구실에 데려다가 심부름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이 조교지 제가 하는 것은 별로 없고 늘 무엇을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몸소 하셨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아니면 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가끔 어느 날 오후 한가한 시간이 되면 제가 사시는 이야기,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요즈음 생각하시는 이야기들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저의 삶은 그분의 가르침 없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제는 8순이 되셨는데도 늘 소년 같은 생기와 민첩함을 가지고 살고 계십니다. 송구스럽게도 그 분께서는 요즈음에도 제자들을 만나시면 늘 경어를 쓰시고, 마치 흠모하는 친구에게 대하듯 그렇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 분의 학문적 신조 가운데 하나는 사상가 한 분을 택하여 평생 파고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 그러한 연구에 평생 매달리셨습니다. 페스탈로찌가 그 한 분이고 김교신이 또 다른 한 분입니다. 김교신은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갔던 진정한 조선 사람이요, 독자적인 성서 연구가요, 진정한 교사였습니다. 김교신은 오랫동안 초야에 묻혀 있다가 선생님의 손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교신은 성서의 세계에 눈을 뜨고 정기적으로 친구들과 성서를 연구하여 동인지를 발간했고, 양정학교 지리와 박물교사로 가르쳤으며, 십 수 명의 시골 학생들을 정릉에 있는 당신의 집에서 같이 지내도록 하고서, 성서도 가르치고 밭일도 같이하고 출퇴근도 같이 하였습니다. 그의 집은 일종의 서당식 가정 학교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매우 독창적이고 탁월하여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침마다 정릉 계곡에 가서 목탁소리를 들르며 기도에 정진했고, 자기 몸을 냉수마찰로 철저히 관리하여 강철 같은 체력을 연마하였습니다. 그는 베를린 마라톤의 승자인 손기정 선수에게 마라톤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제 하 독립의 길을 바로 이러한 성서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준비하고자 했습니다. 신앙과 철학과 자연과학과 예술과 한국의 문화에 정통했던 이 사람 김교신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제자들은 오늘날 한국 지성사의 면면을 일구어가는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에 의하면 김교신은 호를 갖고자 하지 않았으며 교직생활 전체를 통틀어 그저 평교사로 남아 일하기를 고집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질소비료공장 노동자들을 돕던 중 전염병에 걸려 그 마지막 생을 마치셨습니다. 김정환 선생님은 우리 근대사에 이런 선생님이 계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고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2. 저는 유럽의 대안교육을 연구하던 중 그 흡사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바로 셀레스땡 프레네입니다. 농촌 학교 교사요 평민으로서 아이 하나하나의 생명에 눈뜨고자 했던, 그리고 프랑스의 모든 아이들에게 진정한 삶과 교육 을 가능케 하고자 했던 프레네라는 선생님을 알게 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프레네의 사상의 성격을 다음 세 가지 교육모형론을 빌어 이해해 보려 합니다.
세간에 행해지는 교육은 대충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모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만들기 모형, 기르기 모형, 대화적 모형
“만들기” 유형이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듯 아이를 만들어냄을 뜻하지요. 여기서 한 아이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력 따위는 안중에 없습니다. 부모나 학교나 사회나 국가가 무엇을 바라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아이는 다만 그러한 이들이 준비해 놓은 주형(鑄型)에 넣어져 만들어질 뿐이다. 이렇게 하여 아이들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소망 충족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그때그때 국가가 추구하는 정책에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조작되고, 집단이 내세우는 구호나 효용성에 따라 처리됩니다. 이런 형태는 소위 전통적 가치규범이 지배적인 사회나, 모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집단주의 교육학이나, 산업 자본주의의 주문 내역에 따라 운영되는 국가의 공교육 체제 같은 데서, 그리고 계몽되지 않은 사회의 학부모들의 의사가 무차별적으로 가동될 때 나타나곤 합니다. 그 아이들이 만일 돌이라면 낯선 의도에 의해 깍여져 나갈 것이고, 흙이라면 제멋대로 주물럭거려지고 구워질 것이며, 풀이라면 뽑힐 것이고, 또 그렇게 해서 낯선 곳에 심겨질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친근하거나 낯선 얼굴들이 내세우는 교육적 틀에 의해 “만들어 집니”. 이를 다른 말로는 “공장형적 모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은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으면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우리가 손을 대기 전에 이미 “여기에”, 또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존재에 그런 식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것은 월권이며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적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길이 필요합니다. 이런 항변,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른 바 “기르기” 모형의 교육이 제창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아이들 하나하나 안에 깃들어 있는 생명에 경외감을 가지고, 그 자체의 법칙(이를 종종 “자연의 섭리”라 하듯)에 따라 키워내려 합니다. 마치 정원사가 꽃을 기르듯이 교사는 아이들을 기릅니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바람 잘 부는 곳에 데리고 가서, 물을 먹이고 따뜻한 햇볕을 쏘여 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자라나게 됩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탐스런 꽃망울을 터뜨리고 갖가지 열매를 맺고 멋진 나무와 무성한 숲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종종 “정원사 모형”으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그러한 내재적 힘이 만개하기를 꿈꾸는 일체의 “자유교육”과 “대안교육”과 “개혁교육학”과 “진보주의 교육학”과 “신교육운동”이 즐겨 모토로 내세우는 명제입니다. 그렇게 처음 선동적인 발언을 한 사람은 바로 루소입니다. 그 이래 교육 현장에서는 종전과는 상당히 다른 판도가 형성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아주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갔습니다. 우리가 즐겨 떠올리는 영국의 섬머힐 스쿨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제동을 거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고 정말 교훈적인 것이기는 하나, 교육적 진실 전체를 전적으로 옳게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또 다른 접근 방식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화적 모형”이다. 아이가 꽃처럼 자라나야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꽃 그 자체는 아니고 이를 넘어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교육은 여기에 정당하게 응답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그의 “손”을 통해 자신을 다채롭게 표현 한다 - 손은 “몸”, 인간의 고유한 육체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 그것이 바로 문화입니다. 인간 개개인과 문화는 순환적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지만, 문화 안에서 태어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문화의 인간적 조건이요, 인간의 문화적 조건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순환적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인간 삶과 교육의 의미가 정당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만일 문화라는 객관재 만을 중시하게 되면 문화에 의한 인간 개개인의 소외가 발생합니다. 그 때문에 바로 앞서 거론한 것처럼 “만들기 교육”의 병폐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인간 개개인만을 중시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렇게 되면 독선에 빠지거나, 허약하게 되거나, 망상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제멋대로의 자유만이 판을 치게 됩니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아이는 교사와의 대화적 관계 속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교사는 그에게 자연과 교류하게 하고 사회적 관계로 이끌며 다양한 전승과 문화를 매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교사는 단순히 주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그 자신 안에서 자유로이 전개하고픈 힘에 따라 스스로 추동되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이를 깨워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아이만의 고독한 행위를 뜻하지 않고, 문화 안에서 문화를 매개로, 문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아이와 문화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불가결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는 하나, 좀 더 중요한 것은 아이 그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의식을 가진 창조적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창조적 본질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점은 인간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은 뒤 독방에 가두어 놓으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그곳에서 사람은 한없이 무료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무료함이 바로 인간이 스스로 움직여 일하는 본성적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을 즐깁니다.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고 일하기를 원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아이도 그렇게 노예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이 점은 아이의 놀이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생생한 창조적 본질들을 망쳐놓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입니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즐겨하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습니다. 학생이라면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일반교육, 필수과목, 국민교육이라는 등등의 이름하에 앉혀놓고, 쑤셔 넣고, 평가하고, 선발하고 탈락시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런 학교에서 일종의 노예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지요.
학교는 우선 아이들 하나하나가 창조적 본질임을 인식하는 것을 최대의 의무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이 가장 즐겨하는 것을 마음껏 하도록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그러한 자유로운 활동이 일어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 외에 교사의 최대 의무라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를 바로 문화적 매개행위라 합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자기의 세계가 고독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풍요롭게 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 세계에 몰두하게 되고 또 타자들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여기서 비로소 아이는 행복에 겨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몰두하는 중심축을 차츰 차츰 넓혀가야 합니다. 아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의 세계가 소중한 것처럼 타자의 세계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타자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살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관심사를 넘어서 존재하는 다양한 객관 문화적 차원들을 배워야겠다는 흥미와 의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이를 “문화적 조건 속에서 깨워낸다”는 뜻입니다. 왜 깨워야 하느냐 하면 보통 이러한 힘은 인간 안에 깊이 “잠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교사는 이러한 힘이 아이 안에 존재함을 통찰해내고 이를 불러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이는 다만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 힘이 제대로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집중 과정이 필요합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결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 교육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와는 다른 것입니다 - 그리고 깨우침은 집중의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느 순간 홀연히 일어나게 됩니다. 이 현상은 보통 “아하!” 하는 탄성을 동반하는데, 이것을 바로 아이 스스로의 “깨침”이라 부릅니다.
“깨워냄”은 항상 아이 스스로의 “깨침”에 의거해 있습니다. 교사의 눈은 아이의 눈을 결코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보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르침은 배움에 봉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가르침이 배움 위에 군림하게 되면, 그때부터 교육은 교육이 아니고, 폭력이 될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세간에서 행해지는 조기교육이나 입시교육, 사교육은 대체로 이러한 병폐에 빠져있는 것들입니다. 아이들의 내적인 눈을 멀게 하는데 봉사하는 이런 것을 교육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탐욕스런 행위일 뿐입니다.
아이 만의 “깨침”을 위해서 교사는 마땅히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사의 이런 자기 인식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존재로서 자기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이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새로이 닦아나가는 모진 수행적 과정을 전제합니다. 이러한 뜻에서 교사가 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폴란드의 위대한 교사 야누쉬 코르착(Janusz Korczak, 1878~1942))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교사는 먼저 자신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고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비로소 아이들에 대한 과제를 인식해야 한다. 교사들은 마땅히 “아이들을 인식하려 하기 전에 스스로를 인식(해야 하고)”, “아이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의무의 경계를 그어주기 전에 스스로의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백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순서가 뒤바뀔 경우 오류가 발생하는데, 현 교육상황의 문제들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교사가 목청을 높여 지시하고 규정하는 대신 자기 비판적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며, 늘 깨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자기 계발에 매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사는 숨을 멈추고 훈련자의 새로운 길을 추구해야 한다.”1)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코르착은 파격적 제안을 합니다. 고독한 수행의 방식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경험을 쌓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이는 교사를 가르치며 교육(하는)” 존재이다. “교사에게 아이는 자연의 책”이며, “교사는 이 책을 읽으며 성숙해 간다”.2) 코르착은 이렇듯 끊임없이 아이로부터 교사에게로 흘러들어가는 힘의 역류 방향을 강조 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우친 사람을 원하며 스스로 깨우친 사회를 원합니다. 저는 이를 “깨우침의 모형”이라 인식하고 교육의 진정한 길로 여깁니다. 깨우침을 통해서 아이들은 환희하고 열광하며 행복에 겨워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좀 더 다른 형태의 개혁교육학, 대안교육, 자유교육의 형태가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레네(C. Freinet, 프랑스의 공교육 안에서의 대안교육을 위한 제창자)도 그런 주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저는 앞에서 김교신과 프레네를 흡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신의 기본적 지향성과 삶의 태도에 있어 그렇다는 것이지 전체적 면모에서 그리고 세세한 부분에 있어서까지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평교사였으며, 자연으로부터 즐겨 배우려했으며, 어린이와 약자와 민중을 사랑했으며, 교실 현장에서 승부를 걸려 했으며, 교육을 삶 전체로 살아내려 했으며, 매우 개성적이고 독창적이었으며, 많은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프레네 교육을 연구하기 위해 모인 국제 세미나 두 번째 모임입니다. 이 모임을 위해서 멀리 프랑스에서 올리비에와 장노엘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나라의 교육과 사회를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조명해 오신 홍세화 선생님으로부터 또 한 가지 배움을 얻고자 합니다. 오늘은 또한 그간 우리나라 대안교육 현장 곳곳에서 각자의 철학과 방법을 일구어 오신 선생님들 한분 한분으로부터도 소중한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길원, 유승준, 차용복, 김정은영, 이철국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프레네 공부 모임은 언어에 의한 행사가 아니라 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흘리며 깨침의 우물을 길어올리는 모임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 모임을 준비해 오신 성장학교 별지기 선생님들과 김현수 선생님께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모임이 우리 모두 교육의 새로운 통찰력을 얻고 진정한 용기와 우정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아름다움이라는 불꽃을 지닌 교사 ♤
송순재(감리교신학대학교)
1. 물음
나는 교사가 무엇인가, 대관절 어떤 존재인가? 곰곰이 물어보았다. 나는 그가 참된 한 인간이지 않으면 안되리라 생각하였다. 참된 인간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대충 짐작하시리라.
그것은 속이 들어찬, 도덕적 인간이라는 뜻이다. 나는 교사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道德性, 즉 道를 스스로 體化하려 得을 해내는 性格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되어야 한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있어야 젊은 영혼들에게 다만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도덕은 다만 도덕교사의 직무일 뿐 아니라 모든 교사에게 주어진 책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말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배워야 진정으로 배워지는 것일진대, 그것은 모든 학과와 일상적 만남과 교류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은 다시 말해서 모든 교사들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한 사람의 교사가 그 지적인 과제에 몰두하고 연구한 것을 가르칠 때 학생들은 道理가 무엇인지 안다. 또한 한 사람의 교사가 그 스스로를 삶의 근저에 놓인 도리에 부합하게 추구하여 걸어갈 때 학생들은 道德이 무엇인지 안다.
진정한 가르침은 가르치려 들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려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불러모으지 않아도 모여들고, 명령하지 않아도 따른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서 교사됨이라는 문제의 성격을 좀 다르게 표현해 보고 싶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사람을 잡아 끄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교사를 도덕적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綱領이 아니라 熱情이다. 그러한 열정은 단번에 타올랐다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촉발되어 섬광을 만들어내고 다시금 좀더 커다란 불꽃으로 타올라 자신을 불태우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하여 끊임없이 타오르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것은 삶에 대한 열정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그리고 자라나는 삶에 대한 열정 말이다. 나는 이 열정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생각하였다.
열정이 도덕적으로 만든다 하였거니와, 그러한 도덕인은 단순히 외적 규범에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혹은 규범을 강요하는 - 스스로에게나 남에게 -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힘에 의하여 살고 움직인다. 그것은 이성 때문이 아니라 感情力, 즉 느낄 수 있는 힘 때문이다. 여기서 참다운 의미에서 도덕이 문제시 될 수 있다.
나는 오늘날의 교사교육이나 학교교육에서 이 감정이라는 사안이 고갈되어 있음을 본다. 그 귀결은 목하 우리의 교육 정황이 두루 보여주는 바와 같다. 감정이 황폐화되어 있는 곳에서 도덕은 강요이며, 감정이 황폐화되어 있는 곳에서 인간은 다만 차디찬 기계일 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삶은 맛이 없고, 그 균형은 어그러져 버렸다. 삶에 맛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감정이라는 사안에 마땅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교육적으로 정당한 의미에서 어떻게 일깨워질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된다.
올해 어느 봄날 창가에 놓인 꽃 한송이에 마주쳐 불현듯 마음 속 깊이 탄성을 질렀다. 색채 때문이었다. 아마 수국이라 생각되는 이 꽃잎에 물든 보랏빛 색채는 그렇게 단박에 내 마음 속으로 밀고 들어와 나로 하여금 한동안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을의 정기가 유난히 뚜렷한 요즈음, 봄철 한결같이 녹색이었던 숲이 이 계절이 되자 그 본색들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소리도 없이 익어가는 색채들, 그리고 그 색채들의 잔치! 교정 뒤뜰 작은 단풍나무 잎새가 물드어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내 마음도 그렇게 고요히 물들어감을 알지 못하였다. 또 신비로운 무지개 빛은 늘 그렇게 엉뚱한 곳, 엉뚱한 시간에 나타나서 나를 놀라움에 빠뜨리곤 한다. 우주만물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색채의 향연 앞에서 그렇게 신묘한 아름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이다. 이것이 정말 즐거운 것이지, 다른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우주의 가르침이고 그것이 삶에서 배울만한 것이다.
2. 에로스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성이 발산하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소년과 소녀들 모두가 詩人이 되고 音樂家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때 비로소 사람들은 삶을 享有하기 시작하며, 그래서 비로소 삶을 살기 시작한다. 향유가 없는 삶을 정당한 의미에서 삶이라 부르기는 어려우리라는 뜻에서이다. 여기서 감정의 발달이 촉발되며 인간성이 그 한 면에서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순수하게 되고 이상을 바라보고 상대편에게 탐닉하게 된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시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러한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은 문화적 성격을 띠게 된다. 시가 써야하기 때문에 쓰는 것이고 가곡을 배워야 하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라면 그런 것들은 그들에게 하나의 역겨운 짐을 의미할 따름이지만, 아름다움의 체험으로 촉발된 詩想은 젊은 영혼으로 하여금 고래로 인간성이 구현해 낸 멋진 예술의 세계를 들여다 보며 그 안에서 아름답게 자라나게 할 수 있다. 그러한 詩作行爲는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기 안에 깃든 미적 힘을 자라나게 하는가 하면, 시 세계를 관통하는 情神의 道理를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것은 마침내 그를 하나의 도덕인으로 형성하는 길목으로 안내하게 된다. 이런 세계를 경험한 사람을 人間味가 있다 한다. 이런 味를 아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폭력적으로 나아가는 이 세상의 방향을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폭력에 항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대하고 결사체를 만들어 항거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주일에 한번씩 시와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 모일 수도 있다. 전자가 중요한 과제라면 후자 역시 그러하다. 가능한 이런저런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몸짓으로 우리는 고요히 둘러앉아 한잔의 차를 마시고 시를 낭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임은 우리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다시 살기 시작하고 다시 일어나도록 힘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나아가서 이런 모임은 우리들 자신에게 일정한 정신적-문화적 질을 갖춘 삶의 양식을 갖추도록 도와줄 것이다. 왁짜지껄한 음식점이나 노래방에서 있을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삶의 양식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아이들이 초대를 받아 같이 어울리기를!
이런 뜻에서 나는 자연세계와 자주 교류하도록 하거나 의미심장한 예술작품의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긴요한 일인지 곰곰히 생각하곤 한다. 이러한 체험은 자기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좀더 명확히 각인시켜 줄 것임에 틀림없다.
3. 유혹하는 아름다움과 정신적 아름다움
덕으로 이끄는 아름다움이 있다면 오류로 빠져들게 하는 아름다움도 있다. 그것을 유혹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성격이야 무슨 상관이야, 예쁘기만 하면 그만이지!” 이건 어떤 영화 대사의 한 대목이다. 몸매만이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날 때, 혹은 그러한 몸매만을 탐닉하고자 할 때, 그러한 형태는 유혹하는 것으로, 즉 속이거나 기만하는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형태가 정신적 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이런고로 아름다움을 기피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경우 즉각 도덕을 도입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을 도덕적 아름다움으로 만들기 위하여 아름다움에 굴레를 쒸우는 방식으로. 아름다움은 마치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으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을 설교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조치는 인위적 성격을 강제하거나, 아름다움 자체를 왕왕 거론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식이 아니면 다른 길은 없는가? 일단은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이 비록 유혹적인 성격을 띄고 나타날지라도 자유롭게 나타나도록 하는 편이 옳다. 아름다운 형태가 우리들 감각에 매혹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감정 자체를 순화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이 경우 앞서 예로 든 색채 경험 같은 것은 아주 유의미한 작용을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는 가치론상 여러 층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말이다. 이를테면 정신적 질에 의한 아름다움이 있음을 아는 것. 그러나 유혹하는 아름다움을 거절하기 위해서 아름다움의 정신적 질 만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삶은 물적, 생물학적 존재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한 것이기 때문에, 즉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통째로 다루어져야 한다. 어떤 정신적 질이라 할지라도 그 질은 몸으로 다시금 표현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렇게 드러난 겉에서 다시금 속을 읽어낼 수 있는데, 여기서 통째로 드러나는 양상을 다시금 아름다움이라 일컬을 수 있다. 그 결과 육체적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을 흔히들 일컫는 유혹하는 미색의 아름다움과 대비시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아름다운 여인과 멋진 남성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러한 상에 인생을 깊이 경험한 어떤 노인의 얼굴을 대비시켜 볼 수 있고,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대비시켜 보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삶과 그들이 창작해 낸 다양한 예술 세계들은 이런 아름다움의 層位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평가하도록 도와준다. 이를테면 반 고흐의 삶과 작품 세계는 이런 점에서 많은 가르침을 준다. 고흐는 고도의 인간적 깊이를 가지고 가장 단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시엥이라는 거리의 여인을 모델로 그린 작품들은 대표적인 것이다. 시엥은 딸 아니를 가진 거리의 여인으로 곰보였으며 알코홀 중독에다 성병마저 앓고 있었으나 고흐는 신체적으로 손상된 슬픈 거리의 여인들 모습에서 고통받는 자기 삶과 가까움을 느껴 그 여인과 결혼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이 만남과 동행의 과정에서 그려낸 60여점의 그림들 중 “시엥과 품에 안긴 어린아이”, “슬픔”, “요람 앞에 무릎꿇고 있는 소녀” 같은 작품들은 고도의 인간적 깊이로 작업해 낸 정신적 아름다움(崇高美에 해당하는)으로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표현된 것들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표현형태를 잘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이런 작품들은 보는 이에게 종종 충격을 안겨다 주는데, 여기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아름다움의 층위 역시 파악되기 시작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런 예술세계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한 한 우리의 감정세계 역시 유감스럽게도 둔감한 상태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4. 부드러운 덕
아름다운 감정으로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을 부드러운 덕을 구유한 사람이라 불러보고 싶다. 부드러운 덕이라 하였다. 덕은 덕이로되 혹독하거나 엄숙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주는 덕을 말한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점에서 경륜이 많은 그런 분들에게서 종종 그런 느낌을 받곤 했던 기억이 있다.
학문함과 가르침에 있어서 부드러운 덕이란 나의 경험을 빗대어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청년시절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자문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물음은 뭣 모르고 시작한 이 일에서 좀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록 상대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들을 가르칠만한, 그럴만한 푼수가 되나? 설령 내가 그들에게 이런 저런 지식을 가르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활동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인간적 존재 형성을 위한 것일진대, 그러한 과제 앞에서 나 스스로는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 때문이었다. 이 물음이 나를 몹시 어렵게 만들었고 학생들 앞에서 나 스스로 가혹한 태도를 가지도록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숱한 세월을 지나면서 지금에 이르러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나, 도움을 받은 몇가지 생각이 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이를테면 나는 스스로 학생들과 더불어 진리를 공동으로 탐구하는 자이지 안되리라는 생각에 사무친 적이 있는데, 그 후 나는 학생들 앞에 나서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진리에 대한 공동 탐구라는 것은 이런 뜻이다. 학생들이 던지는 물음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으로, 만일 질문이 제기되면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을 바탕으로 그 해법을 자동적으로 풀어놓지 않고, 마치 나 역시 모르는 사람처럼 문제를 들여다보고 탐구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 해법을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스스로를 늘 공부하는 자로서 발견할 때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편으로 선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이라는 말이다. 학생이란 학문을 스스로 탐구하는 자라는 뜻으로, 스스로 늘 공부하는 자라는 뜻이다. 나는 이렇게 좀 나이든 학생으로서 어린 학생들과 함께 진리를 공동으로 탐구하는 자로서, 그 이상 주어지는 짐은 지고자 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껏 가르치는 일의 무게를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런 뜻으로 읽어보기도 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14).
그런가 하면 옛 선인들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그러한 뜻을 배울 수 있었다. 이것은 “위인지학(爲人之學)”,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와는 달리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닦아나아가는 공부를 뜻한다. 이 위기지학의 공부가 언제나 지적인 공부와 아름다운 감정의 세계를 더불어 조화롭게 추구함을 통해서 수행되었음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
우리 사회는 갈수록 모질고 가혹해져 버린 감이 있고, 우리들 교육의 현장도 그렇게 굳어져 버린 감이 있다. 나는 옛 행습에 고착되어 있고 변화할 줄 모르며 세속이 즐겨하는 공식에 따라 움직이는 선생님들이 있는 그런 현장 몇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부드러운 덕으로 자기 삶을 돌보고 아름다운 감정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기를 즐겨하는 선생님들이 일하고 계신 그런 곳도 몇 알고 있다. 그런 곳에서는 예외없이 어떤 특별한 정신 현상이 목도되는데 그것이 바로 熱情이다. 이전의 신비가들은 이안에서 “하나님의 불꽃”을 읽어냈다. 나는 우리의 교육현장이 다만 이 불꽃에 의해서만 다시금 타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세간에 행해지는 교육은 대충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모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만들기 모형, 기르기 모형, 대화적 모형
“만들기” 유형이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듯 아이를 만들어냄을 뜻한다. 여기서 한 아이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력 따위는 안중에 없다. 부모나 학교나 사회나 국가가 무엇을 바라느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아이는 다만 그러한 이들이 준비해 놓은 주형(鑄型)에 넣어져 만들어질 뿐이다. 이렇게 하여 아이들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소망 충족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그때그때 국가가 추구하는 정책에 따라 천편일률적으로 조작되고, 집단이 내세우는 구호나 효용성에 따라 처리된다. 소위 전통적 가치규범이 지배적인 사회나, 모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집단주의 교육학이나, 산업 자본주의의 주문 내역에 따라 운영되는 국가의 공교육 체제 같은 데서, 그리고 계몽되지 않은 사회의 학부모들의 의사가 무차별적으로 가동될 때 나타난다. 그 아이들이 만일 돌이라면 낯선 의도에 의해 깍여져 나갈 것이고, 흙이라면 제멋대로 주물럭거려지고 구워질 것이며, 풀이라면 뽑힐 것이고, 또 그렇게 해서 낯선 곳에 심겨질 것이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친근하거나 낯선 얼굴들이 내세우는 교육적 틀에 의해 “만들어 진다”. 이를 다른 말로는 “공장형적 모형”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생명은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또 결코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우리가 손을 대기 전에 이미 “여기에”, 또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존재에 그런 식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것은 월권이며 죄악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적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길이 필요하다. 이런 항변,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른 바 “기르기” 모형의 교육이 제창되었다. 여기서는 아이들 하나하나 안에 깃들어 있는 생명에 경외감을 가지고, 그 자체의 법칙(이를 종종 “자연의 섭리”라 하듯)에 따라 키워내려 한다. 마치 정원사가 꽃을 기르듯이 교사는 아이들을 기른다. 바람 잘 부는 곳에 데리고 가서, 물을 먹이고 따뜻한 햇볕을 쏘여 주는 게 중요하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자라난다. 탐스런 꽃망울을 터뜨리고 갖가지 열매를 맺고 멋진 나무와 무성한 숲으로 자라나기 까지. 이런 뜻에서 이런 접근 방식은 종종 “정원사 모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아이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그러한 내재적 힘이 만개하기를 꿈꾸는 일체의 “자유교육”과 “대안교육”과 “개혁교육학”과 “진보주의 교육학”과 “신교육운동”이 즐겨 모토로 내세우는 명제이다. 그렇게 처음 선동적인 발언을 한 사람은 바로 루소이다. 그 이래 교육 현장에서는 종전과는 상당히 다른 판도가 형성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아주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갔다. 우리가 즐겨 떠올리는 영국의 섬머힐 스쿨이 바로 그런 것 이다.
그런데 여기에 제동이 걸렸다. 물론 그러한 생각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고 정말 교훈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교육적 진실 전체를 전적으로 옳게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또 다른 접근 방식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화적 모형”이다. 아이가 꽃처럼 자라나야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꽃 그 자체는 아니고 이를 넘어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교육은 여기에 정당하게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그의 “손”을 통해 자신을 다채롭게 표현 한다 - 손은 “몸”, 인간의 고유한 육체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인간 개개인과 문화는 순환적 관계에 놓여있다.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지만, 문화 안에서 태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문화의 인간적 조건이요, 인간의 문화적 조건이라 할 수도 있다. 이 순환적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인간 삶과 교육의 의미가 정당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만일 문화라는 객관재 만을 중시하게 되면 문화에 의한 인간의 소외 현상이 나타난다. 그 때문에 바로 앞서 거론한 것처럼 “만들기 교육”의 병폐가 생겨나는 것이다. 또 거꾸로 인간 개개인만을 중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는 독선에 빠지거나, 허약하게 되거나, 망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제멋대로의 자유만이 판을 치게 된다.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아이는 교사와 대화적 관계 속에서 자라나야 한다. 교사는 그에게 자연과 교류하게 하고 사회적 관계로 이끌며 다양한 전승과 문화를 매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교사는 단순히 주는 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그 자신 안에서 자유로이 전개하고픈 힘에 따라 스스로 추동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이를 깨워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아이만의 고독한 행위를 뜻하지 않고, 문화 안에서 문화를 매개로, 문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아이와 문화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불가결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는 하나, 좀 더 중요한 것은 아이 그 자신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의식을 가진 창조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창조적 본질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점은 인간을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은 뒤 독방에 가두어 놓으면 알 수 있다.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그곳에서 사람은 한없이 무료해질 수 밖에 없는데, 이 무료함이 바로 인간이 스스로 움직여 일하는 본성적 존재임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우리는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을 즐긴다.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고 일하기를 원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이도 그렇게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이 점은 아이의 놀이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생생한 창조적 본질들을 망쳐놓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이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즐겨하든 그렇지 않든 개의치 않는다. 학생이라면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일반교육, 필수과목, 국민교육이라는 등등의 이름하에 앉혀놓고, 쑤셔 넣고, 평가하고, 선발하고 탈락시킨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쩌면 학교에서 노예로 자라난다.
학교는 우선 아이들 하나하나가 창조적 본질임을 인식하는 것을 최대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나서 아이들이 가장 즐겨하는 것을 마음껏 하도록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사의 최대 의무는 아이들에게 그러한 자유로운 활동이 일어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 바로 문화적 매개행위라 한다. 여기서 아이들은 자기의 세계가 고독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세계가 풍요롭게 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아이들은 이 세계에 몰두하게 되고 또 타자들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여기서 비로소 아이는 행복에 겨워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에 몰두하는 중심축을 차츰 차츰 넓혀가야 한다. 아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의 세계가 소중한 것처럼 타자의 세계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타자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살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관심사를 넘어서 존재하는 다양한 객관 문화적 차원들을 배워야겠다는 흥미와 의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이를 “문화적 조건 속에서 깨워낸다”는 뜻이다. 깨운다 함은 보통 이러한 힘은 인간 안에 깊이 “잠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이 아이 안에 존재함을 통찰해내고 그리고 이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만 때가 되면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힘이 제대로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집중이 필요하다. 집중하지 않으면
결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 교육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와는 다른 것이다 - 그리고 깨우침은 집중의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느 순간 홀연히 일어난다. 이 현상은 보통 “아하!” 하는 탄성을 동반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이 스스로의 “깨침”이다.
“깨워냄”은 항상 아이 스스로의 “깨침”에 의거해 있다. 교사의 눈은 아이의 눈을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다. 스스로 보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르침은 배움에 봉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가르침이 배움 위에 군림하게 되면, 그때부터 교육은 교육이 아니고, 폭력이 된다. 유감스럽게도 세간에서 행해지는 조기교육이나 입시교육, 사교육은 대체로 이러한 병폐에 빠져있다. 아이들의 내적인 눈을 멀게 하는데 봉사하는 이런 것을 교육이라 할 수 없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탐욕스런 행위일 뿐이다.
아이 만의 “깨침”을 위해서 교사는 마땅히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사의 이런 자기 인식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존재로서 자기 스스로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이와의 관계에서 자기를 새로이 닦아나가는 모진 수행적 과정을 전제한다. 이러한 뜻에서 교사가 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폴란드의 위대한 교사 야누쉬 코르착(Janusz Korczak, 1878~1942))은 이렇게 주장했다. 교사는 먼저 자신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고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비로소 아이들에 대한 과제를 인식해야 한다고. 교사들은 마땅히 “아이들을 인식하려 하기 전에 스스로를 인식(해야 하고)”, “아이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의무의 경계를 그어주기 전에 스스로의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백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순서가 뒤바뀔 경우 오류가 발생하는데, 현 교육상황의 문제들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라 했다. 이는 교사가 목청을 높여 지시하고 규정하는 대신 자기 비판적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며, 늘 깨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자기 계발에 매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사는 숨을 멈추고 훈련자의 새로운 길을 추구해야 한다.”1)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코르착은 파격적 제안을 한다. 고독한 수행의 방식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경험을 쌓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이는 교사를 가르치며 교육(하는)” 존재이다. “교사에게 아이는 자연의 책”이며, “교사는 이 책을 읽으며 성숙해 간다”.2) 코르착은 이렇듯 끊임없이 아이로부터 교사에게로 흘러들어가는 힘의 역류 방향을 강조 했다.
우리는 마땅히 “아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 깨우친 사람을 원하며 스스로 깨우친 사회를 원한다. 우리는 이를 “깨우침의 모형”이라 인식하고 교육의 진정한 길로 여긴다. 깨우침을 통해서 아이들은 환희하고 열광하며 행복에 겨워할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좀더 다른 형태의 개혁교육학, 대안교육, 자유교육의 형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프레네(C. Freinet, 프랑스의 공교육 안에서의 대안교육을 위한 제창자), 쉬프랑어(E. Spranger, 정신과학적 교육학의 기초자), 케르쉔슈타이너(G. Kerschensteiner, 노작교육의 기초자), 리이츠(H. Lietz, 전원학사의 기초자)가 그런 사상을 펼쳐 냈다. 또 거슬러 올라가면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부처에게서 그런 정신의 장려한 전개를 대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네 근대사에서는 이승훈, 김교신, 함석헌, 이찬갑, 전영창, 김흥호 같은 분들의 이름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적 정신으로 가득한 학교는 이러한 삶의 전개, 이러한 교육적 환희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를 학교라 부른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교는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