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우수 무렵 / 변경서
쑥 물 드는 을숙도엔 여백이 남아있다
스스로 몸 낮추며 드러누운 저 강물
나란히 일렬횡대로 명지바람* 불어오고
쓰다듬고 매만지면 상처도 꽃이 된다
떠났다가 때가 되면 다시 드는 밀물 썰물
웃을 일 슬픈 일들이 찰랑찰랑 뒤척인다
등 돌리면 공든탑도 모래성 되는 세월
겨울은 정이 들어 떠나기가 어려운지
갈대밭 하구를 따라 멈칫멈칫 걷고 있다.
* 명지바람 :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을 뜻하는 순 우리말.
[당선소감]
저 먼 도시의 끝으로부터 마음속까지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집니다. 칠전팔기(七顚八起)라 했던가요?
자유시로부터 시작했던 신춘문예 도전, 8년 만에 당선통보를 받았습니다.
코피를 쏟으면서도 당신의 존재를 믿었기에 기도 하나로 견디어온 인고(忍苦)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물을 사물로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죄를 사하여 주신 당신, 당신께서 가라시는 시인의 길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죽어 있는 글보다 살아 있는 글, 초겨울날 젖은 장갑을 모닥불에 말리는 인부들의 때 묻은 거룩한 손길 같은, 짧고 굵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나 자신만의 오롯한 향기가 나는 그런 작품을 쓰겠습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화려한 빛을 따르기보다는 그늘진 곳의 마음을 읽는 그런 시안(詩眼)을 가지렵니다. 지치고 힘이 빠질 때마다 끝까지 살아계셔서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당신의 뜻을 기억하겠습니다.
제 삶의 이유인 당신께 이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당선 위해 기도한 아내와 바다 건너 캐나다에서 기도해준 아우식구 모든 가족에게, 그리고 기도해주신 목사님과 성도님, 항상 미소 띤 얼굴로 시조의 길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 그리고 한우리문학회 회원, 시조아카데미 문우들과 '시로 여는 이 좋은 세상' 식구,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분과 이 영광과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끝으로 미숙한 작품을 영광의 자리로 올려주시고 꽃을 달아주신 심사위원님, 국제신문사에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본명 변현상. 1960년 경남 거창 출생. 2006년 전국 단수시조 백일장 분기 장원. 2007년 전국 단수시조 백일장 연 장원. 인터넷 문학클럽 시로 여는 e좋은 세상 고문. New Tech Fitness 대표.
[심사평]
설레는 마음으로 한동안 작품을 읽게 된다.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기쁜 마음이다. 선자의 합의에 의해 '용강리 64번지'(오영민), '폭포'(김호), '우수 무렵'(변경서), '구름의 초상'(박해성), '요철의 법칙7'(이은암), '알'(김지송), '가랑잎 랩소디'(김상민) 등이 예선을 통과했다. 시어의 선택이 예사스럽지 않고, 율격도 나무랄 데 없다.
절제된 언어와 함축미, 적절한 비유와 활달한 시상, 전체적인 짜임과 흐름을 살피면서 숙고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폭포'와 '용강리 64번지', '우수 무렵' 등을 가려놓고 거듭 읽게 된다. 오랜 시간 논의를 거듭한다. 김호의 '폭포'는 긍정적 인식에 의한 시어의 구사가 참신하고, 호흡의 흐름이 유장하여 공감을 사고 있으나, 짜임이 느슨하다. 오영민의 '용강리 64번지'는 추락해가는 고향 정서와 농촌의 현실 문제를 아프게 조명하고 있으나, 참신성이 요구된다.
변경서의 '우수 무렵'은 을숙도의 정경을 적절한 시어로 정갈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연의 순환과정을 사람의 삶에 비겨 감칠맛 나게 묵히고 삭혀 숙련된 공력을 느끼게 한다. 이미지가 교직되면서 싱싱하게 살아 움직인다. 탄력성 있는 상의 전개와 감각을 의미화하는 능력이 돋보여 당선작으로 합의했다. 언어를 아름답게 직조하는 가인이 되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임종찬(시조시인·부산대 교수) 김복근(시조시인)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인삼반가사유상 / 배우식
1
까만 어둠 헤집고 올라오는 꽃대 하나
인삼 꽃 피어나는 말간 소리 들린다.
그 끝을 무심히 따라가면 투명 창이 보인다.
2
한 사내가 꽃대 하나 밀어 올려 보낸 뒤
땅속에서 환하게 반가부좌 가만 튼다.
창문 안 들여다보는 내 눈에도 삼꽃 핀다.
무아경, 온몸에 흙물 쏟아져도 잔잔하다.
깊고 깊은 선정삼매 고요히 빠져있는
저 사내, 인삼반가사유상의 얼굴이 환하게 맑다.
3
홀연히 진박새가 날아들어 묵언 문다.
산 너머로 날아간 뒤 떠오르는 보름달,
그 사내 침묵의 사유가 만발하여 나도 환하다.
[당선소감]
신춘문예 당선! 전화기를 잡은 내 손에는 어느새 햇살이 가득 쥐어져 있었습니다. 내 마음 너무 환해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을 옮기며 잠깐 뒤를 돌아봅니다. 3년 전 우연히 서점에서 시조집 몇 권을 읽으면서 나는 약간의 제한된 틀 속에 자신을 구심점으로 모아 담는 현대시조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집으로 가는 길에는 달 같은 시조와 함께 환하게 걸었습니다. 접었다 일시에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시행에 다시 앉아 날아오를 자세를 취하는 긴장과 절제의 시조는 내게 정말 매력덩어리였습니다. 꿈속에서조차도 여백의 미에 흠뻑 빠져있는 내 삶은 온통 시조뿐이었습니다. 시조만을 껴안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 오늘은 시조가 나를 껴안아줍니다. 이제 다시 한 발짝을 옮기며 고마우신 분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존경하는 문덕수 선생님과 따뜻하게 격려해주시는 김규화, 최은하 선생님, 시조의 세계로 맨 처음 이끌어주신 윤금초 선생님, 고맙습니다. 열정적으로 가르침을 주시는 감태준, 이승하, 박제천 선생님, 늘 응원해주시는 이동희, 김명배, 박숙희 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두 손 가득 환한 햇살을 쥐어주신 심사위원 이근배 선생님께 큰 절을 올립니다. 친구 송병록님, 변학섭님, 유경님, 그리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렇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어서 오늘, 참 기쁩니다. 이 기쁨을 아내 박영자님, 아들 현성, 현중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 배우식: 1952년 충남 천안.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졸업.
[심사평]
오늘의 시조가 어디까지 왔는가는 신춘문예 응모작품들이 내비게이션으로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시조가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행렬이 늘어간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모국어의 경작을 꿈꾸는 천재들이 시조에 눈을 돌리거나 형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지 않은 속에서 새 모습의 시조를 들고 나오는 신인을 만날 때 그 기쁨은 더하게 된다.
장은수씨의 ‘새의 지문’ 변경서씨의 ‘일몰 앞에서’ 배종도씨의 ‘천마도장니’ 배우식씨의 ‘인삼반가사유상’이 각각 새맛내기의 솜씨를 보인 작품들이었다. ‘새의 지문’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에 있는 빗살무늬토기에서 새 한 마리를 꺼내들고 시간과 공간을 누비고 있는데 그만큼 한 깊이와 무게를 채우는데 틈이 있었다. ‘일몰 앞에서’는 지는 해가 연출하는 스펙터클을 강렬한 채색으로 그리고 있으나 사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지 않음이 걸렸다. ‘천마도장니’는 너무 사실(史實)에 매달려 더 넓은 시야를 갖지 못했음이 시를 가두었다.
당선작 ‘인삼반가사유상’은 오래 흙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태어난 인삼뿌리에 생각을 입혀서 소리와 빛깔을 알맞게 구워내고 있다. 쉽게 찾아지지 않는 글감을 골라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사유를 명징한 이미지로 엮어내는 시적 기량이 믿음직스럽다. 앞으로 붓끝을 더 날 새워 시조의 틀을 새롭게 짜고 시상의 자유로움을 열어가기 바란다.
- 이근배·시인
[2009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연어를 꿈꾸다 / 김영희
시작이 끝이었나, 물길이 희미하다
매일 밤 고향으로 회귀하는 꿈꾸지만
길이란 보이지 않는 미망迷妄 속의 긴 강줄기
바다와 강 만나는 소용돌이 길목에서
은빛 비늘 털실 풀듯 올올이 뜯겨져도
뱃속에 감춘 꿈 하나 잰걸음 꼬리 친다
내 다시 태어나면 참꽃으로 피고 싶다
붉은 구름 얼룩달록 켜켜로 쌓인 아픔
흐르는 물속에 풀고 가풀막을 오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도저한 역류의 몸짓
마지막 불꽃이 타는 저녁 강은 황홀하다
비로소 바람에 맡겨 눈감고 몸을 연다
[당선 소감]
응모 작품을 퇴고하고서 몹시 아팠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남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한 부끄러움과 욕심을 채워주지 못하는 부족한 재능을 탓하며 온몸이 무거웠습니다. 제 마음에 드리워진 무게는 결국 이틀 밤낮을 꼬박 앓게 했지만, 제 마음을 비우게도 했습니다.
신춘문예를 통과하고 문학 내공의 키도 훌쩍 자라 언젠가 시집을 내게 된다면 모든 이가 호응할 시조를 쓰리라 다짐했습니다. 이제 그 꿈을 향해 한발을 내딛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꿈의 문을 열어준 동아일보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시 쓴다는 핑계로 거실이며 안방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과 잡동사니들을 기꺼이 눈감아주고 치워주기까지 한 그이와 아들 지성, 지강을 뜨겁게 포옹해주고 싶습니다. 시조의 세계로 이끄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윤금초 선생님, 시의 깊이를 일깨워주신 이지엽 선생님, 처음 시조를 접하게 해준 주영숙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격려와 관심으로 용기를 북돋워준 민족시사관학교 선배 문우들, 함께 습작한 친구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헛헛한 세상과 쓸쓸한 영혼들을 달래줄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열심히 나를 채찍질하며 부지런히 주어진 길을 걷겠다는 다짐으로 오늘의 벅찬 희열을 대신합니다.
* 김영희: 1967년 대구 출생. 열린시조학회 회원.
[심사평]
새로 태어나는 모국어를 위해 시조는 오래 숨겨온 가락의 새 목청을 뽑는다. 응모작들에서 껍질을 깨려는 사나운 부리를 본다. 다만 발상의 자유로움과 형식미를 찾아내는 데에 끝까지 돌파하지 못함이 눈에 띄었다. 예년에 비해 당선권에 들어선 작품들이 높은 기량을 갖춰 당선작을 뽑는데 거듭 읽어야 했다.
당선작 ‘연어를 꿈꾸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의 모천(母川)에 이르는 역류가 눈부시다. 회귀를 꿈꾸는 건 연어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그를 낳아준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려 온 몸을 던진다. 오래 두고 써 왔던 낡은 글감을 전혀 다른 새것으로 빚는 일이 쉽지 않음에도, 서두르지 않고 시적 대상을 안으로 끌어들여 차분하게 시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있다. 시조의 틀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익숙하게 운용해 나가는 힘이나 낱말의 쓰임새도 고르게 놓여 있다. “비로소 바람에 맡겨 눈감고 몸을 연다”의 매듭이 더욱 빛난다. 그러나 시의 감도를 높이려면 외연보다는 내면의 공간을 좀더 깊이 천착했어야 했다. 지금부터가 출발점이고 시조의 넓은 수면에 역류의 속도를 더욱 내주기를 바란다.
마지막까지 겨뤘던 작품으론 박해성의 ‘빗살무늬토기’, 배종도의 ‘청자압형수적’, 황윤태의 ‘돌아오지 않는 소리’, 설우근의 ‘흡수불량증후군’, 배용주의 ‘자전거는 둥근 것을 좋아한다’ 등이 실험정신을 곁들인 탄탄한 역량을 보여줬음을 부기한다.
- 이근배 시조시인 /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우도댁 / 김정숙
다단조로 내리던 게릴라성 폭우도 멎은
성산포와 우도사이 감청색 바닷길에
부르튼 뒤축을 끌며 도항선이 멀어져.
이 섬에도 저 섬에도 다리 뻗고 오르지 못해
선잠을 자다가도 붉게 일어나는 아침
어떻게 흘러온 길을, 제 무릎만 치는고.
눈 뜨면 부서지는 것쯤 타고난 팔자려니
젖었다가 마르고 말랐다가 또 젖는
짭짤한 물방울들에 씻기다만 저 생애.
[당선소감]
바삭바삭 겨울바람에 제 몸 말리는 억새를 봅니다. 얼기설기 구름 띄운 하늘에 대고 연방 고개를 끄덕이는 억새무리들. 점점 깊어가는 겨울 속으로 맨 몸을 맡기면서도 씨앗 하난 허투루 날리지 않습니다.
휴대전화 통화권 이탈지역인 한라산 중턱 억새밭에서 당선소식을 들었습니다. 깜빡깜빡 끊기는 <대구매일신문> 기자님의 목소리에 몇 번씩 되물으면서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전화를 끊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억새밭을 내려와 곰곰 생각했습니다. 글쓰기 5년, 시조쓰기 4년…아직 여물지 못한 나의 문학적 소출이 시조의 들판을 어지럽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습니다.
졸작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민족 고유장르인 시조도약의 현장에서 열심히 벽돌을 날라달라는 주문으로 여기겠습니다. 일요일저녁마다 함께 문학의 텃밭을 일구는 반달동인들, 컴퓨터 앞에 앉을 때마다 늘 따뜻한 방석을 펴주는 남편과 아이들,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 푸른 시절 삶의 모태가 되어주시다가 지난여름 홀연히 먼길을 가신 시어머님께 당선작 <우도댁>을 바칩니다.
* 김정숙: 1960년생. 제주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제주 농업기술원 근무
[심사평]
시조의 품격은 정형이 빚는 정제미와 가락이 이끌어내는 긴장미에 의해서 정해진다. 형식이 주는 절제미란 언어 뒤에 숨겨진 공간의 여유와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하나의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코 물리적인 언어의 분절이나 과도한 시상의 나열로는 감동에 이르게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심사의 기준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접근하였다.
전체적으로 이번 응모작들의 수준은 상당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심 끝에 마지막까지 남은 네 편의 작품은 쉽게 순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각기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겨울 강구항」 「우도 댁」과 같은 '가슴으로 쓴 시'와 「겨울, 랩소디」와 「몽자류 소설처럼」과 같은 '머리로 쓴 시'가 곧 그것이다.
박미자의 「겨울 강구항」은 발상과 언어의 구사능력이 돋보였으나 수식어의 선택과 종장처리가 미숙하였고 박해성의 「몽자류 소설처럼」은 풍부한 이미지와 시상의 범위에 호감이 갔으나 주제의 통일성을 잃은 아쉬움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황윤태의 「겨울, 랩소디」와 김정숙의 「우도 댁」을 두고는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겨울, 랩소디」는 투명한 언어감각과 시상을 전개하는 역량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나 지나친 작위성으로 인해 이미지의 선명도가 떨어지는 흠이 아쉬웠다.
그에 비해 당선작으로 뽑은 「우도 댁」은 '우도'라는 섬의 태생적 한계를 온몸으로 이겨내는 한 여인의 아픈 삶을 리얼하게 형상화시켜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다. 비록 그 처방까지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섬과 바다와 우도 댁과 시인을 일체화시킨 체험적 진솔성과 절망을 극복하는 따뜻한 시선이 신뢰를 갖게 하였다.
좋은 시조는 사색과 사유를 넘어 통찰에 이른 작품이라고 보았을 때 앞으로 당선자는 이를 과제로 삼아 그 신뢰를 채워주기를 기대한다.
- 민병도(시조시인)
[2009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그해 겨울 강구항 / 박미자
극(劇) 끝난 화면처럼 다 쓸린 해안선 따라
더 이상 참지 못해 안부 묻는 비릿한 초설(初雪)
복숭뼈 아려오도록 길을 모두 감춘다
흰 이빨 드러낸 파도 밤새 기침 해대고
사연 낚는, 집어등 즐비한 환한 횟집
화끈히 불붙는 소주로 동파의 밤 데워간다
가출한 갈매기 떼 돌아오는 아침이다
풍향계 돌려대는 바람은 신선하고
풀리는 뿌연 입김에 인화되는 흑백 한 컷
[당선소감]
소띠해는 분명 희망입니다
코끝이 싸한 삶을 연출하던 무대의 바다. 납작하게 엎드린 한 어촌을 집어삼킬 듯, 산만큼이나 배가 불러오던 아침해.
손 마디마디 옹이 진 늙은 어부는 찬바람 마시며 아직도 찢어진 그물코를 꿰매고 있을까. 아득하지만 생생한 빛바랜 흑백 필름 몇 컷을 되돌려 보면 아픔으로 잘려나간 NG 없는 단편적인 부분들, 아 아버지…. 이젠 고향엔 가지 않으리.
춥다.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고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래도 살아 볼 만한 이 땅이 아닌가. 정녕 우리를 춥게 하는 건 삶의 구차함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돋아나는 불신의 독소일 것이다.
정신없이 돌아간 묵은해의 몇 달 동안 따뜻하게 손 내밀어 준 여러 지인님, 학부모님, 늘 부모님을 대신한 큰 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잘해 준 다혜 병곤아! 우리 모두 아빠의 빠른 쾌유를 빌자.
문학의 허기 앞에 목을 축여 준 울산 남부도서관 문예창작반 선생님, '문학' '글쌈' 선후배님, 무엇보다 설익은 작품을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정진의 자세 잃지 않겠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제일 먼저 당선 소식을 전해 주신 기자님! 소띠해는 분명 희망입니다.
* 박미자: 1965년 경북 영덕 출생. 제32회 샘터시조상 장원. 2007년 유심시조백일장 장원.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2008년 6월 장원. 제2회 좋은생각 생활문예대상 금상 수상. 한국방송통신대학 유아교육과 졸업. 현재 한우리 독서·논술 지도사
[심사평]
현대시조 100년이 지난 오늘 시조가 현대시의 그것과 결코 다르지 않음은 금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응모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결코 자유시에 못지않은 비유와 상징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높은 수준이었다.
최종 당선권으로 압축된 작품은 천강래 '노고단, 어느 날', 김상민 '쇠똥구리', 전해수 '겨울 꽃밭', 변경서 '써래질하는 사내', 이태호 '그 해 달월역', 배승우 '봉숭아', 나동광 '무화과나무 아래서', 조명수 '옹관 속으로', 송필국 '낡음에 대한 경의', 박해성 '그리운 사과에게' 그리고 당선작으로 뽑힌 박미자 씨의 '그해 겨울 강구항'이었다.
이 중 김상민, 이태호, 전해수, 변경서, 나동광, 송필국 씨의 작품이 완성도 면에서 제외되었고, 배승우, 조명수 씨의 작품 역시 음보의 불확실성이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천강래 '노고단, 어느 날', 박해성의 '그리운 사과에게', 박미자 '그해 겨울 강구항'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시적 성숙도가 다른 작품들에 월등 앞서 있었다. 그러나 박해성 씨와 천강래 씨의 경우 안정감은 있었으나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당선작에 비해 다소 부족했다.
당선작 '그해 겨울 강구항'은 다소 언어의 상충성이 없지는 않았으나 시어 선택이 다른 응모자의 작품들보다 신선하고 첫 수와 셋째 수 종장 표현을 현대시조의 시학적 관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함께 깊은 신뢰를 보낸다. / 심사위원 유재영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흰소를 타고 / 송지원
- 이중섭의 일기
한밤을 새고 나면 절벽 같은 아침 온다
안개에 젖은 생각 무지개로 걸어도
화판 속 내 아이들은 웃을 줄을 모른다.
사부랑한 삶의 고리 다부지게 조여 본다
직강으로 쏟는 햇살 또 튕겨져 나가는 꿈
그리움 건너지 못한 바다 끌어안고 눕는데
거미보다 낮은 몸에 까마귀 떼 날아온다.
아이들 울음소리 경문처럼 박혀 와서
늘품 진 황소를 타고 무명으로 떠나는 길
어디로 갈 것인가 흰 뼈대만 있는 길을
천근의 무게 업고 뚜벅뚜벅 걸어가면
마침내 또 다른 문이 어둠속에 열린다.
[당선소감]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이순근 선생님을 모시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꿈을 꾸었다. 유난히 밝으신 모습에 가슴까지 포근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당선의 기쁨을 알리기 위한 전초였나 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가슴을 헐어내는 일이다. 그 자리에 바람을 들이고 그 바람에게 내 정신의 뼈와 살을 입혀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하든 그렇지 않든 오롯이 내 몫이며 내 분신으로 남는다. 지금까지 시조라는 분신을 키우며 살았던 것은 그 절제미에 반해서 이었을까?
그 역할을 담당하셨던 김환식 선생님, 글의 바른길을 안내하셨던 고 이순근 선생님 항상 젖은 눈으로 지켜보았던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문학은 인간의 이해부터 비롯된다고 가르침을 주신 유한근 교수님과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그리고 이 기쁨을 함께하는 학우들에게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되길 소망하며 아직도 먼 길 달려야 하는 신발에 징을 박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송지원(본명 송금례): 1964년 충남 출생.2002 월드컵시조백일장 장원.한밭 시조 백일장 차상. 서울 문화예술대학교 재학.
[심사평]
17명의 작품 71편이 예심을 거쳐 최종심사 대상이 됐다. 여기서 다시 당선권으로 압축된 작품은 여섯 편. ‘감은사지에 와서’ ‘반구대 기행’은 형식과 시적 수사에서 평가받기에 충분했으나 ‘후학들 눈 틔운 포은 학이 되어 날아갔고’(반구대 기행)나 ‘남은 생, 지척에 모시는 시종이나 될까보다’(감은사지에 와서)와 같은 낡은 표현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새소리 귀에 젖다’의 경우 ‘해 진다 서글퍼 않고, 달 뜬다 갈채도 없이’(새소리 귀에 젖다)와 같은 평이한 표현들이 시의 균형을 깨트리고 있었고, ‘가는 정 오는 정’의 경우에는 작품을 다루는 솜씨가 부분적으로 뛰어났으나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정서의 일관성이 부족해 보였다. 같은 이의 작품 ‘五色川 訃音’ 역시 소재의 특수성에 비해 성급하게 다룬 점이 무엇보다도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작품은 일장일단이 있었다. 우선 ‘칼 가는 사람’은 손색이 없을만큼 구성이 탄탄하고 전개가 활달했다. 또 아버지를 등장시켜 감성적 밀도를 높이는데 성공을 거두고 있었으나 ‘푸르죽죽 거친 손에 때 묻은 낙엽 몇 장’과 같은 표현은 첫수 전체의 구도상의 문제로 지적됐다.
당선작 ‘흰 소를 타고’는 표현과 구성면에서 앞선 작품들에 비해 나무랄 데가 없었다. 특히 넷째 수의 생동감 넘치는 표현은 응모자의 시적 신뢰를 갖게 했다. 그러나 ‘칼’(칼 가는 사람)의 참신성에 비해 ‘이중섭’(흰 소를 타고)이라는 소재가 너무 흔하고 식상한 것이어서 소재의 참신성이냐 완성도냐를 두고 최종 결정을 망설이게 했지만 결국 ‘흰 소를 타고’를 당선작으로 뽑은 것은 응모자의 다른 작품들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인으로서 성장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커보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소재의 다양성과 표현의 섬세함을 더 한다면 분명 우리 곁에서 기억에 남을 좋은 시인 하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 심사위원 유재영
[2009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소방수첩 2 / 강경훈
한 달 넘는 수색에도 못 찾던 그 소녀를
개가 찾아냈다. 수확 끝난 과수원에서
개만도 못한 이 세상, 내가 내게 침 뱉는다.
용서하라, 이 땅의 남자들을 용서하라.
얼음장 같은 땅을 깨고 나온 복수초
서귀포 노란 봄날을 다시 한번 묻고 싶다.
[당선소감]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은 용눈이 오름에서 ‘이어도를 봤다’고 했다.
나는 용눈이 오름을 오를 때마다 그가 봤다는 용눈이 오름이 어느 쪽 방향일까 하는 1차원적 생각만 했다. 둘러봐도 허허벌판에 오름들만 몇 개 솟았을 뿐인 것을.
그 오름들 중에서 유난히 우뚝한 오름이 있었다. 언제 한 번 그 오름에 가 봐야 되겠다는 생각만 늘 되뇌이고 있었다.
오늘 마침내 그 오름에 올랐다. 당선통보를 받은 시각, 왜 내가 그곳으로 갔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오름이 바로 다랑쉬다.
사실 다랑쉬는 품새도 좋고, 높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데 오늘에야 이 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의 전환점에 좋은 인연이 되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직장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어느 선배가 말했다.
‘소방관에게 포기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포기라는 건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눈에도 서귀포의 어느 봄날은 분명 슬픔과 절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냥 있기엔 세상을 향해 내리쬐던 봄볕이 너무도 따뜻했었다.
오늘은 이 곳에 와 내년 봄 얼음새꽃이 환하게 피어나기를 기도해 본다.
다랑쉬 오름에 함께 올라주신 정드리 가족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하겠다.
추호도 흐트러짐 없이 갈 작정이다.
부족한 글을 뽑아 올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그리고 뉴스제주신문사에 큰절을 올린다.
이쯤에서 내 가족들에게도 ‘사랑한다’는 귓속말을 전해야겠다.
▲주소: 제주시 연동 1965-4번지 신광아파트 807호
▲연락처: 017-699-1882
1975년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 출생
‘정드리사람들’ 회원
제주소방서 근무
[심사평]
흔히들 시조를 민족시․겨레시라고들 한다.
다양한 우리민족의 정서를 절제된 언어의 묘미로 담아낼 수 있는 운율적 구조(형식)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현대시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러한 전통적 특성을 어떻게 현대적 감각을 가미하며 계승 발전 시켜 나가느냐 하는데 있다 하겠다.
본심에 올라온 다섯 편의 시조 즉, 단풍책(김형태), 겨울 속초에서(김화섭), 학교 공사장을 지나며(나동광), 제주 물영아리오름 습지(이우식), 소방수첩․2(강경훈)의 작품은 저마다 신인다운 패기와 실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 땅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징하지가 않았다. 읽고 나서 무릎을 친다거나 진한 감동으로 코끝이 찡해지는 그런 작품들이 드물다는 뜻이다.
‘겨울 속초에서’와 ‘학교 공사장을 지나며’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지만, 완성도가 약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도 없는 것이 아쉬웠다.
‘제주 물영아리 습지’는 생태 환경적인 측면을 다루고자 했지만, 시상 전개가산만한 게 흠이었다.
‘단풍책’은 다소 동시풍이고 4수를 한 편의 시로 끌고 가는 솜씨도 결코 녹록치 않다. 특히 선자는 넷째 수에 주목했다.
‘달랑 남은 마지막 단원마저/읽혀져 나가고 책의 올곧은 뼈대와 영혼이 오롯할 때까지/ 가을은/ 쉬지도 않고 읽고 또 읽어낸다’는 표현들은 돋보인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앞서 지적한 대로 메시지의 명징성의 결여가 문제였다.
결국 마지막 남은 「소방수첩․2」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무릎을 칠 정도는 아니지만, 읽고 나면 뭔가 코끝이 찡해지는 메시지가 다가온다.
아마 응모자는 소방관련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인 것 같다. 제목이 암시하듯, 현장에 출동해서 사건 사고를 마무리 하고 그것을 일기 쓰듯 표현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보낸 소방수첩 연작시 여러 편으로 입증된다. 직업이 소방관이라면 이런 작업도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축하하면서 대성을 빈다. <심사위원 정인수>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허 균(許筠)/박성민
때늦은 여름밤에 그대 마음 읽는다
지금도 하늘에선 칼 씌워 잠그는 소리
보름달 사약 사발로 떠 먹구름을 삼켰다
어탁(魚拓)처럼 비릿한 실록의 밤마다
먹물로 번져가는 모반의 꿈 잠재우면
뒷산의 멧새소리만 여러 날을 울고 갔다
심사평 - 압축된 정형미… 탄탄한 짜임새
감상적 아나키에 휩싸인 듯이 감정이 과잉 소비되는 요즘,쉽게 뜨거워졌다가 다시 쉽게 식어 버리는 마음들이 넘친다.이처럼 정서의 기복이 심한 초고속 감정의 현대에도 오랜 전통의 시조가 어울리는 까닭은 정형의 틀로 어지러운 생각을 추스르고,운율 안에 서정이 담긴 고유 미학 때문이다.
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 응모작은 천년 역사를 지닌 시조의 현대적 진화를 개척하고 있다.그런 만큼 당선작을 1편이 아니라 20편가량 선정하고 싶을 만큼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였고,시적 호흡을 길게 하면서도 짜임새를 잃지 않은 3~5수에 이르는 작품들이 많았다.정형시의 구성을 지키면서 저마다의 해석을 가미하여 운율의 묘미를 살렸고,글감의 다양성이 발상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노련한 창작으로 이어져 현대 시조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지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당선작 박성민의 ‘허균(許筠)’은 무엇보다 압축된 정형미가 돋보인다.3수 이상이 주를 이루는 응모작들 사이에서 ‘허균(許筠)’은 2수로 되어 다소 간결하게 보이나,구성의 부피감과 상관없이 탄탄한 짜임새가 작품 전반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역사 속의 인물 ‘허균’을 소재로 삼으면서 이야기 서술로 흐르지 않고 내적으로 승화시켜 역량을 발휘하며,빼어난 이미지 형상화까지 더해져 시조의 품격과 날카로운 감수성을 함께 갖춘 절창이다.
최종심에 오른 김문정의 ‘환한 그늘’,최순섭의 ‘가을 흰 나비’,황윤태의 ‘외도,보타니아의 저녁’,천강래의 ‘겨울비-어느 탈북 미망인’,방승길의 ‘흙 한 줌도 뜨거운,-무용총 수렵도’ 또한 남다른 착상의 시어와 매끄럽게 재단된 표현이 뛰어난 연륜을 보였다.다만,심상의 이미지 전환,그리고 각각의 연과 언어의 흐름이 만들어 내는 시적 리듬에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이들과 더불어 응모작들 편편마다 시조의 밝은 앞날을 예시하고 있는 것이 장르의 기쁜 수확이라 여겨진다.
이근배· 한분순
첫댓글 변현상 시인, 당선을 축하합니다. 꿈을 이루셨군요. 우리 부산시조단에도 기쁜 소식입니다.
감사합니다.
변현상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자료 올려주신 손 회장님!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제 졸시를 올려주신 산호수 손증호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