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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복선二重複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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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누워있는 황량한 논밭이 두엄냄새를 풍긴다. 단종에게 영월은 세상의 끝이자 절망이라 했다던가. 동강물줄기를 끼고 선 봉래산, 단종의 몸종들이 그 아래 강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백 번도 넘게 굽이쳐 흐른다는 동강의 긴 곡선에 한참동안 눈길을 담갔던 여치는 다시 차에 올랐다. 키를 꽂았으나 얼른 시동을 걸지 못했다.
- 어디로 가야 하지.
산 아래 긴 강물이 거꾸로 거슬러 흐르는 것만 같다.
“야! 너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영월읍내에서 정태찬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가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서울에서 짭새들이 다녀갔단 말이다.”
여치의 전화를 받은 태찬은 서울의 강남경찰서에서 두 명의 형사가 다녀갔다고 했다. 쿵!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지! 송곳에 대해 이것저것을 캐묻고 갔다는 태찬의 말을 듣고 여치는 얼굴빛이 변할 만큼 당혹스러웠다.
“지금 어디야?”
“강원도에 와있는데…, 그리 갈 수도 없겠구나.”
“주변에 짭새들이 쫙 깔렸어, 인마.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을 벌인 거냐구.”
“지금 말할 수는 없고…, 아무튼 넌 나랑 연락이 안 되는 거다. 알았지?”
“형사들한테도 그렇게 말은 했어.”
“다시 연락하마.”
“종민아, 몸조심해라.”
수화기를 내려놓은 종민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 내가 너무 안일했어.
송곳에서 혐의점을 발견하리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 윤기를 죽임으로써 남현태 교수의 사건까지 완전히 덮는다고만 여겼었다. 완전히 갈무리한 범죄라고 스스로 장담했는데 그게 아니다. 기호 형을 찾아내 거기서 범행의 실마리를,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캐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젠 울산에도 갈 수가 없다. 태찬에게 갔다가는 바로 체포되기 십상이다. 태찬이한테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김태산 사건으로 체포될 때처럼 길거리에서 수갑이 채워질 뻔 했다. 휴우우, 긴 한숨이 절로 새나왔다.
길게 휘어진 물줄기가 굴곡진 삶처럼 느껴진다. 작고 허름해 보이는 한 척의 배가 물가의 나무에 매어진 채 떠내려가지도 못하고 기우뚱 흔들거리고 있었다. 흔들거릴 때마다 물이 들어찬다. 여치는 자신의 인생이 물에 떠있지 않고 그 안에 물을 채우려 했던 조각배처럼 여겨졌다. 다시 동강기슭 곳곳에 망연한 시선을 던진다. 불거져 솟다가 깎인 바위들도 자신의 한심한 삶을 비웃는 것만 같다. 창창하게 젊은 나이에 가파르기만 한 인생이 저 물줄기 곳곳에 삐져나온 바위와 흡사하다. 이리 깎이고 저리 깎이다가 마침내는 덧없이 스러지고 말 것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종민은 두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강줄기에 솟은 또 다른 바위에 누나 수연의 모습이 보인다. 누나는 살인사건과 하등 관계가 없다. 살인자의 누나라는 딱지를 붙이게 할 수는 없다.
- 내가 잡히면 어떻게든 누나한테 큰 피해가 가게 될 거야. 누나 혹을 떼 주려다 더 큰 혹을 붙이는 결과가 되는 셈이야. 그렇게는 안 돼, 절대로.
수연은 동생이 살인사건의 범인인 걸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알아서는 안 된다. 누나를 위해서였지만 누나가 몰라야 한다는 절대전제하에 한 일이다. 그래서 심사숙고했고, 매형 윤기에게도 자신이 가담한 걸 철저하게 비밀로 부치도록 했다. 잘 지켜졌다.
그런데…. 그런데 박정민 사장이 사전에 범행을 알게끔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누나에게 죄를 가중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계획대로 범행하는데 암암리에 누나가 개입되지 않고는 실행이 어렵다는 윤기의 제안을 좀 더 신중하게 검토했어야 했다. 아니 그보다는 윤기의 속내를 미리, 보다 냉정하게 파악했어야 했다.
계곡을 잇는 긴 물줄기 끝에서 음산한 선율이 들려온다. 처음 윤기로부터‘세컨드 레이디’에 대한 얘기를 듣고서야 그 영화를 봤다. 다시 영화의 상세한 속 내막을 들었을 때 보통 큰 일이 아님을 알았다. 다시 윤기가 중차대한 심각성을 강조하지 않았더라도 일이 잘못 되면 누나가 얼마나 큰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는지 충분히 감이 왔다. 그걸 풀어야 했다. 완벽하게 푼 걸로 믿고 있었다.
- 그런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어쩌면 좋지.
종민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 원작자라는 유현수가 박정민 사장을 만났다면서 윤기는 하소연처럼 괴로움을 토로했다. 유현수가 알게 됨으로써 누나가 곤경에 처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것이었다. 누나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윤기가 고뇌하며 그 어려움을 풀어주려고 애쓰는 것이 처음에는 너무 고맙기만 했다. 윤기와의 만남이 잦아졌다. 비록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 중이기는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엉켜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는 남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처남이자 당사자의 친동생이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예견했던 대로 그는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남현태 교수만 없어진다면….”
윤기는 푸념처럼 잔뜩 한숨을 섞어 소리 냈다. 이제나 입을 열까, 저제나 꺼낼까하며 은근히 기다려왔던 말. 둘 사이에서 맴돌기만 하던 살인이 처음 거론되는 순간이었다. “네에?” 하며 짐짓 놀란 척 했다.
윤기는 “할 수만 있다면 남현태 교수를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난.” 하고 술잔을 비웠다. 윤기가 술기운을 빌어 속을 내보이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다지 취기가 오르지 않은 상태임을 알았다. 이미 윤기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윤기가 어설프게 잔머리를 굴리고는 있지만 그가 독백처럼 뇌까린 살인의 실행의지가 어쩔 수 없이 누나를 건져내는 유일한 길임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먼저 언급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려왔던 것이다.
심각하게 앉아 술잔만 기울이다가 못이기는 척, 어쩔 수 없다는 척 동참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주렁주렁 포도송이를 열리게 할 수 없다면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포도나무 작대기에 불과한 자신이다.
홍사진은 세상욕심을 버리고 불자가 되었다. 엄기호 역시 자신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영어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아직 버릴 때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없는 누나가 나한테는 있다. 누나의 삶을 위해서라면 내 몸이 두 개라도 다 내버릴 각오가 되어있다. 내 영혼이 두 개라면 그걸 모두 팔아서라도 누나의 행복을 살 것이다.
- 그런 후에….
북한산정상에서 빈 하늘을 올려다보며 최종결심을 굳혔었다. 알이 굵고 당도糖度가 풍부한 포도를 수확해서 누나, 수연에게 주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과연 정식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를 위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해. 왜 그 대상이 유현수가 아닌 남현태 교수인가에 대해. 윤기가 살인을 계획하는 진정한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에 대해. 그러자 그 답이 우연한 곳에서, 참으로 우연히 나타났다.
드르르륵, 윤기의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종민은 깊이 잠든 윤기를 쳐다보며 망설이다가 휴대폰플립을 열었다. 30대 중반쯤 들어 보이는 여자의 목소리, 콧소리 가득 요염한 음성.
“윤기? 나, 정 여사야. 나 보고 싶지 않아? 호호!”
당황한 종민은 얼른 휴대폰의 플립을 닫았다. 그리고 윤기한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코까지 골면서 잠이 들어있었다. 다시 두 번인가 더 휴대폰이 진동했으나 받지 않았다. 종민은 윤기의 휴대폰을 들고 원룸을 서성이다가 문자버튼을 눌렀다.
‘지금 전화 받기 어려움. 문자메시지로 용건을 보내기 바람.’
곧바로 답신이 왔다.
‘S호텔 703호실을 예약했어. 저녁 7시까지 와. 기다릴게.’
일요일오후, 윤기는 대낮부터 맥주를 사들고 종민의 원룸으로 찾아왔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냉장고에 남았던 맥주까지 몇 병을 더 마시더니 윤기는 침대에 쓰러져 곯아떨어졌다. 종민은 혼자 골똘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의 휴대폰이 진동한 것이다. 윤기를 깨우려고 흔들었으나 곤히 잠든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을 진동하다가 멈추더니 다시 울린다. 종민은 대신 전화를 받아 용건을 전해주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여자의 다정스런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 정 여사? 그럼 유부녀?
플립을 닫으며 종민은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상대여자가 누구인지 호기심이 먼저 생겼다. 절대 가벼이 넘길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교태가 진득한 그녀는 누나 몰래 윤기가 숨기고 만나는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누나하고 살면서 딴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게 동생으로서 모른 체 지나칠 문제는 아닐 성 싶었다. 부리나케 정 여사라는 여자한테서 온 통화내역과 발신메시지를 지웠다. 그녀의 웃음이 윤기의 휴대폰에서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 7시까지 S호텔이라고?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었다. 1시간 30분이 남았다. 종민은 윤기의 머리맡에 휴대폰을 놔두고 잠시 후 윤기를 흔들어 깨웠다.
“매형! 그만 일어나요, 많이 잤어요.”
윤기가 부스스 눈을 떴다. 그가 세수를 하고 나오더니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본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서두른다.
“처남! 나, 갈게. 누나 올 시간이 된 것 같아. 내일 만나서 다시 얘기 나누자.”
“그래요.”
종민은 윤기를 배웅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원룸을 나섰다. 그의 아파트단지 앞에서 택시를 잡고 기다렸다.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기의 SM 7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저 차를 따라가 주세요.”
종민은 S호텔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미아리를 거쳐 동숭동 대학로를 지난 윤기의 차는 퇴계로에 있는 S호텔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로비에 들어선 윤기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윤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후 종민은 바로 걸음을 돌렸었다.
다음 날, 종민을 만난 윤기는 남 교수를 죽이고 싶다고 했고, 종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매형한테 좋은 방안이 있는 거, 맞죠?”
“그렇게 보였어?”
“매형이 너무 걱정해서인지 모르지만 어제와는 분위기가 달라 보여요.”
“하하하! 처남은 누나가 칭찬한대로 역시 똑똑하고 눈치도 빠르군.”
윤기가 웃음을 멈추고 정색을 했다.
“난, 결심했어.”
“네? 결심이라면….”
“남현태 교수가 사라지지 않으면 누나가 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난, 우리 수연이가 망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어쩌시려고요?”
“남 교수를 없애겠어.”
윤기는 주정하듯 내뱉었다.
“매형! 벌써 취한 거예요?”
“난 별로 취하지 않았어. 처남!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지금 돌아가는 꼴이 무슨 수든 쓰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고 말았어.”
“그렇기는 하지만.”
종민은 단번에 소주를 털어 넣으며 동조의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자신의 뜻에 동조한 거나 다름없다고 판단한 윤기의 눈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남 교수만 없애면 누나한테 평생 업보가 될지 모를 불행도 자연히 없어지게 돼. 남 교수를 없애야 누나의 장래도 보장되는 게 지금 처한 현실이야.”
그러지 않고는 뺄 수도, 박을 수도 없게 되고 말았어. 윤기는 보다 강한 자극으로 당사자의 동생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가 끄집어내는 말마다 다분히 설득 조였고, 공범으로서의 동참이 당연하다는 듯 확신하고 있었다.
종민이 볼 때 겨우 단조로운 복선複線을 깔고 손아래처남이라고 얕잡아 대하는 윤기에게는 포커페이스라는 게 있지 않았다. 노름판에서 보고, 겪고, 몸에 익힌 함정으로의 유도액션, 정靜과 동動을 적절히 구사하는 포커페이스와 블러핑이 그에게는 없었다. 윤기는 그가 원하는 살인의 목적을 달성하려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대를 이용하려고만 할 뿐 상대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토끼를 잡으려 할 때도 호랑이는 발톱을 곧추 세우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사람을 죽이려 하면서 자신의 좁은 소견을 깨닫지 못하고 상황을 그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그런 점에서 그는 한 걸음 뒤에 있었다.
되레 역逆으로 완전한 장막을 위해 누나와 함께 산 윤기를 이용해야 했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게 누나를 지키고자 함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그가 원하는 건 누나를 통해 얻게 될 돈이었다. 그의 속셈은 허황된 욕심과 만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질에 눈이 멀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또한 도박판에서 체득한 생리다.
이제 사건의 주동자는 윤기가 아니었다. 종민은 마치 종범처럼 수동적인 척 행동했지만 스스로 주범이라 여겼고, 결국 단독 범행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유야무야 누나의 죄를 가중시키는데 따른 반대급부는 무한대無限大여야만 한다. 그래서였다. 누나가 범죄에 한 발 더 다가서야 한다는 게 몹시도 거슬리기는 했다. 그랬기서 제 2의 범행을 염두에 두어왔던 것이다. 기왕에 저지르는 살인이었다. 완벽하게 처리하는 만큼 건져야 할 것도 작지 않아야 했다. 그 모든 게 누나에게 돌아가야 했다.
1년 형기를 채우고 출소한 후, 누나를 찾아왔다가 처음 윤기를 보았다. 그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누나는 “글쎄.” 라며 모호하게 답했다. 그리고 누나가 되물었다. 넌 어때? 마음에 드니, 매형으로서? 나야 누나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맘에 드는 거지, 뭐. 그렇게 답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하게는 보다 나은 남자였으면 했다. 너무 어렵고 가난하게 살아왔다. 서로 사랑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충분한 경제력을 갖춘 사람이 누나의 남편이기를 내심 바랐었다.
다시 박정민 사장을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누나는 오히려 윤기 형을 대상으로 물었을 때보다는 명쾌하게 답했다. “그런 것 같아.” 누나의 그 대답이 두고두고 뇌리를 떠나지 않더니 결국 윤기가 죽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로 덧붙여지고 말았다. 공범이자 매형인 조윤기는 처음부터 죽어야 할 예정된 운명이었다. 사냥에 나서기 전부터 사냥 이후를 겨냥했다. 함께 사냥에 나섰지만 그 개를 삶을 물을 끓여두고 있었다. 애당초 그는 사냥개였다.
살의殺意는 운명처럼 우연히 찾아온다. 그러나 살인의 계기는 보다 구체적이고 숙명처럼 필연적이다. 운명처럼 다가와 우연히 접하게 된 살의를 무심하게 지나쳐 버릴 수 없었다. 살의는 살인의 이유를 만드는 필연적 절차를 거치게 된다.
누나 수연이 부탁한 CD롬을 찾으려고 이 서랍 저 서랍을 모두 뒤졌으나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수연은 전화를 걸어 새로 쓴 시나리오원고가 저장된 CD롬을 찾아서 JM시네마로 급히 가지고 오라고 했다. 오후에 원고 검토를 위한 제작 회의가 갑자기 열리게 되었다면서 잘하면 자신이 쓴 글이 영화로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누나의 들뜬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날아갈 듯이 벅차올랐다.
아파트로 급히 달려가 잘 정돈된 CD롬 케이스를 뒤졌으나 누나가 말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있을 만한 곳을 모두 찾았다. 수연도 정확히 어디에 보관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책장과 모든 서랍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수연과 윤기 두 사람은 하나의 책장과 한 책상을 함께 사용하느라 각자의 사물이 뒤섞여 있었다. 수연이 일러준 CD롬을 찾다가 먼저 발견한 건 녹음테이프였다. 책장에 꽂힌 여러 종류의 책들 사이에 두 개의 소형테이프가 비닐케이스에 넣어져 있었다.
아아, 만일 무심하게 지나쳤더라면! 며칠 뒤, 마치 몰래 감춰놓은 것처럼 보였던 테이프에 다시 관심이 쏠린 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서랍에서 녹음기를 꺼내 테이프 하나를 꽂았다. 두 번째의 녹음테이프까지 모두 숨죽여 들었을 때 강하게 속을 파고드는 게 있었다. 바로 살의였다. 우연히 접한 살의였지만 그건 중독처럼 강했고 유혹처럼 거부하기 힘들었다. 누나의 행복만을 바라고 한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했는데, 두 사람인들 못 죽일 게 없었다.
윤기는 남현태 교수의 살해공범이자 그 현장에 있던 유일한 사람이다. 두고두고 누나와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사람 또한 윤기다. 그러나 처음에는 누나 수연에게 후유증처럼 남을 수도 있는 잡티쯤으로 가벼이 여겼었다. 잡티는 신체에 이상 징후를 보일 때 제거해도 그다지 늦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막상 녹음내용을 들으니 윤기의 존재는 단순한 우려가 아니었다. 윤기의 죽음은 그 직후부터 예정대로 진행될 과정이었고 다가올 현실이었다. 녹음테이프를 움켜쥐자 윤기라는 존재는 잡티가 아니라 종양이고, 세포균열을 일으킬 암 덩어리임을 새롭게 자각했다.
참으로 우연하게 발견한 녹음테이프에 조윤기가 죽어야 할 명분이 뚜렷하게 녹음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내용을 녹음할 수 있었는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걸 아는 건 나중 문제다. 우선 윤기의 속셈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왜 하필이면 유현수가 아니리 남현태 교수죠?”
“남 교수라야 유현수에 대한 누나비밀이 완전히 가려지니까.”
일리가 있었다. 윤기의 말을 들으면서 남 교수가 타당한 대상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윤기가 남 교수를 죽여서 얻고자 하는 것은 그가 입성 번지르르하게 내뱉은 동거녀의 행복 때문이 아니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숨겨둔 녹음테이프가 그걸 말하고 있다. 다른 여자와 수시로 호텔을 드나드는 자에게서 사랑을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윤기가 원하는 건 녹음된 내용 그대로 엄청난 돈이다. 수연을 징검다리 삼아 부자가 되려는 게 그의 욕심이었고 남 교수 살해의 이유임은 명명백백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발생한 살인의 계기에 따라 윤기의 목에 송곳을 꽂았다. 가슴에 박힌 송곳을 빼낼 때,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의 마지막 모습이 선하다. 살려줘, 처남…. 애절한 눈에 글썽인 눈물의 색깔은 붉디붉은 선홍의 핏빛이었던 것 같다.
PC방에 들어가서 강남경찰서로 이메일을 보낸 건 윤기에 대한 알량한 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또한 누나를 위해서였다. 몸뚱이만 재가 되어 뿌려졌다는 사실 때문에 누나는 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찾아 다시 장사를 지내주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어떻게든 누나를 불면과 악몽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이젠 살해현장을 애써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곳에 윤기머리만 묻고 나머지 몸뚱이는 다시 사지四肢를 절단해 조금 떨어진 고령산기슭 쓰레기소각장에서 태웠다. 다 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스님 한 사람이 부리나케 뛰어내려왔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윤기를 다 태우지 못하고 물러났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 그랬었는데….
종민은 경찰의 수사력에 혀를 내둘렀다. 불에 잔뜩 그슬린 조각난 몸뚱이만으로도 조윤기임을 알아내고, 다시 송곳살인에 초점을 맞춘 경찰이 경이로웠다.
- 윤기 형은 송곳으로 죽이는 게 아니었어.
차라리 남 교수를 죽였을 때 윤기를 함께 살해한 만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젠 어쩔 수 없다. 애당초 살인을 공모한 남매로 하늘아래 함께 존재할 수는 없었다. 한 가족이 함께 절도나 강도로 치부해서 잘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살인으로 행복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가당치 않다.
홍사진이나 엄기호처럼 자신의 존재를 훌훌 털어낼 시기는 또 늦춰지고 말았다. 일단 다시 출국을 해야 했다. 아니, 출국한 것처럼 누나한테 또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이제는 아주 오랫동안 누나를 보지 못할 것 같다. 1년이나 2년의 기한을 두고 다시 만난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자신의 실체가 뚜렷이 드러난 이상 사랑하는 누나와의 상봉은 요원해지고 말았다는 현실이 처절한 아픔을 주었다.
- 지치고 아픈 누나와 억지 생이별을 해야 하다니.
종민의 긴 숨이 차창에 뿌옇게 서린다. 몇 년이 지나도 포도를 매달지 못하는 나무에서 투둑, 가지하나가 부러지는 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