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62)
◇ 사주팔자
조실부모한 구두쇠 월천꾼 팔목이…허대사에게만은 월천삯 안받아
어느날 팔목의 생시 듣고난 허대사…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드는데…
구월천엔 배도 없고 다리도 없어 오가는 길손들은 바짓가랑이를 한껏 올리고 스스로 건너든가 아니면 월천(越川)꾼 등에 업혀가는 수밖에 없다.
이곳 월천꾼 팔목이는 부지런해 이른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개울 옆을 지킨다. 팔목이는 알부자로 소문났다. 조실부모하고 어렵게 자라며 ‘돈이 없으면 죽는 수밖에 없다’는 걸 어릴 적부터 체득해 제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절대 나가는 법이 없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월천꾼으로 돈을 모으고 겨울이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장에 팔았다. 논밭이 나왔다 하면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얼른 낚아채는 사람이 바로 팔목이다. 돈이라면 엄동설한에 발가벗고 십리를 가서 일전 한 닢이라도 주워올 팔목이지만 단 한사람, 신통암 허대사에게만은 돈을 받지 않는다. 응달진 산자락에 잔설이 소빈대처럼 붙어 있는 이른 봄날, 장딴지가 얼어붙는 것 같은 찬물에 허대사를 업어주고 그날도 팔목이는 월천삯을 받지 않았다.
허대사가 팔목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네 생시(生時)를 말해봐라.” 팔목이가 말하자 육갑을 짚어보더니 “파―” 한숨을 토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허대사가 툭툭 털고 일어나 갈 길을 가자 뒷모습만 바라보던 팔목이 발딱 일어나 달려와서 앞길을 막았다. “말씀해 주십시오, 제 사주팔자가 어떤지.” “말할 수 없다. 내 입으로는….”
그날 밤, 팔목이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허대사는 좀체 남의 사주팔자를 봐주지 않지만 용하다는 소문은 강호에 널리 퍼져 있다. 닭이 울기도 전 팔목이는 신통암으로 내달렸다. 허대사의 목탁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어슴푸레 동녘이 트였다. 다짜고짜 법당문을 열고 들어가 허대사 법의 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매일 새벽 찾아갔다.
절대 입을 열지 않던 허대사가 보름 만에 입을 열었다. “너는 갑술년 섣달 초나흘에 이승을 하직할 팔자야.”
팔목이는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와 발을 뻗고 통곡을 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아직 3년하고도 아홉 달이 남았어! 남이 삼십년 살 거 나는 3년 만에 다 살 거야.”
팔목이는 먼저 부엌아궁이 밑을 파서 돈 항아리를 끄집어 내고 거간꾼을 찾아가 논밭을 매물로 내놓았다. 대처로 나가 친구들을 추월관으로 초대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스물두 해, 생전 처음 기생집에 가본 팔목이는 색시를 끼고 친구들과 진탕 술을 마시고 주모가 뒷방에 펴준 금침에서 열여섯 홍엽의 머리를 얹어줬다. 용두질만 하다가 색기가 넘치는 홍엽의 옷고름을 풀자 팔목이는 숨이 넘어갈 뻔했다. 추월관 주모에게 돈 보따리를 안겨주고 아예 홍엽과 살림을 차렸다.
주지육림에 파묻혀 일년을 살고 나니 그것도 시들해져 평양으로 가 홍엽보다 더 예쁜 기생을 만나 금강산으로 유람갔다. 세월은 어찌 이리도 빨리 가는가. 갑술년이 오고 봄여름가을이 후딱 지나고 무서리가 내릴 때쯤 팔목이의 돈 항아리는 거의 바닥이 났다.
“짧고 굵게 살았네.” 팔목이가 기지개를 켜는 사이 섣달 초나흘이 지났다. 팔목이는 죽지 않고 멀쩡했다. 초닷새, 초엿새…. 이게 꿈인가 생신가, 볼을 꼬집어도 아프고 다리를 꼬집어도 아팠다.
팔목이와 허대사가 사또 앞에 섰다.
“이 늙은 엉터리 돌중 때문에 소인은 어렵게 모아둔 전 재산을 탕진해 진짜 죽고만 싶습니다.” 허대사가 입을 열었다.
“이 젊은이가 월천꾼이었을 때 소승에게 적덕을 해 사주팔자나 봐주려고 생시를 물었더니 진사오미, 진시에 난 놈이 신유술해, 신시에 났다 했으니.”
“내가 언제 신시라 했어요? 진시라 했지.”
결국 사또의 판결대로 팔목이는 삭발한 사미승이 돼 허대사 밑에서 사주팔자 보는 법을 배웠다.
“스님, 제가 진시에 태어났다면 내 사주팔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삭발 입산할 팔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