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18~23)
오늘은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입니다.
오늘날 세상 가운데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점점 퇴색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점점 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과 상관없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내가 사랑하고 나의 인생에 소중한 사람의 생일은 중요하지만
내가 알지도 못하고 나와 상관도 없는 사람의 생일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는 다시 한번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 날은 우리에게 너무도 복되고 소중한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사명이 새롭게 회복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작년에 아부다비에서 크리스마스에 함께 모여 축하하며 예배를 드리는데
케익을 준비했더니 처음 예수님을 믿은 자매가 ‘오늘 누구 생일이예요?’라고 해서 웃었습니다.
혹시 크리스마스가 누구의 날인지 모르시는 분이 이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이 우리 인생에 가장 의미있고 복된 날로 바뀌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교회를 처음 나오시는 분이라고 할지라도 이 사실을 모르시거나 부인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위해’ 이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교회는 사실 이 전혀 다른 차원의 기적이 우리 마음에, 우리 삶에 일어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9:23~2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에는 때로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역설처럼 느껴지는 말씀이 많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예수님을 오래 믿는 분들도 때로는 이 말씀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이미 예수님을 믿었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제 목숨을 잃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자기의 자존심이 죽으면 정말 죽는 것처럼 여깁니다.
자기의 경험이나 자기의 상식이나 논리를 벗어나면 죽을 것처럼 힘들어 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2천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이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나의 이성과 상식과 경험의 모든 것에 죽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믿음이 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먼저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나의 이성가 자아가 죽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끔찍한 살인이나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옥에 있지도 않고, 그러한 법적인 판결을 맏은 적도 없는데 우리가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라는 것입니다.
내 이성과 논리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대신해 죽어주심에 대해
내가 그러한 죄인이었다는 것에 대한 내 자아가 죽고 내 영혼이 깨닫는 마음이 없다면,
그분이 나의 죄를 대신 값지불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거부감과 화가 날 것입니다.
나를 왜 죄인이라고 하냐고 불편한 마음으로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을 믿고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나의 자아와 이성과 내 상식과 경험이 죽지 않으면...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사람의 상식과 흔히 말하는 ‘과학’을 의지하는 사람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연들에 의한 진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나의 옛 자아의 생각이 죽고,
영이신 하나님의 생명의 생각으로 다시 한번 새로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분으로 인해 내가 다시 살았고, 그분이 나의 구주가 되신 것
그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이미 우리의 상식, 경험, 이성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을 때 새생명으로 태어난 줄 믿습니다.
그 믿음안에서 우리가 깨닫고 맏아들이게 된 또 하나의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경험할 수 없고,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데 어디에 어떻게 계십니까?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알아도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은 깨달을 수도, 누릴 수도 없는 축복입니다.
그분은 지금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청와대나 백악관에 한번만 다녀와도 큰 자랑으로 삼습니다.
왕궁에 출입하며 일하는 사람은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의 자녀나 왕비가 되어 왕궁에 사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왕이 사는 곳을 왕궁이라 합니다.
그곳은 그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고, 가장 귀한 곳이고, 가장 보호받는 곳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비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그 왕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그분이 나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분이시고, 전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은 크리스마스도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지를 알기에,
그분이 오시지 않으셨으면,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오시지 않으셨으면
나에게는 구원이 없고, 영원히 죄와 사망에 묶여 살아야 할 존재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나의 구원이 되신 예수가 되시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어 주신 것
너무도 큰 감사이고, 내 인생을 새롭게 하며 복되게 하는 축복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