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감사한 일 중의 하나는 새해 벽두부터 들려왔던 남북 평화 무드였습니다. 급기야 4개월만에 남북정상회담을 이뤄냈고 세기의 사건인 북미회담까지 이끌어 냈습니다. 9.19 평양선언 군사 분야 합의서 이행의 일환으로 남북 군사당국이 땅과 바다, 하늘에서 상대를 겨냥했던 적대행위를 11월 1일 0시를 기점으로 모두 멈춰세웠습니다. 실제 포문의 덮개를 덮었고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했고 무기를 내려놓고 있습니다. 미군만 없으면 실제적인 평화협정 상태입니다. 남북은 더이상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눌 의사가 없습니다. 서로 화해와 협력을 통해 서로를 살려가고자하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고군분투를 한 한해였습니다. 여전히 쉽지 않은 길이지만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이 한반도가 세계 평화의 교두보 역할을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능곡역에서도 평양을 거쳐 러시아를 지나 유럽을 가는 기차표를 끊을 날이 올 것입니다.
교회적으로는 한해동안 열심히 공사만 한 한해였습니다. 여행을 가려면 여행가방을 싸고 여행 준비를 하듯 새로운 길을 떠나기 위한 준비의 한 해 였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버려졌던 땅을 새롭게 개간해서 처음 텃밭을 일구어봤습니다. 이재원 집사님과 처음 나무 비닐하우스를 걷어 냈던 순간부터 지난 주 마무리 공사를 할 때까지 거의 올 한해는 허물고 짓고 세우는 평생동안 거의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한 한 해였습니다. 텃밭에서는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텃밭에서 벌레를 무서워하며 울던 아이들이 어느새 그 벌레들과 함께 노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직접 기른 채소를 들고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소리지르던 아이들의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콘크리트 벽에만 갇혀 살던 아이들이 흙과 자연으로 나오니 그 모든 것이 아이들의 스승이었고 아이들을 안아주는 품이었고 아이들의 힘을 길러주는 생명의 기운들이었습니다.
비전토의가 공전을 할 때 과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때도 있었고 공동 주택을 짓자던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가고 생태적 목회를 위해 땅을 사보자는 시도 역시 원점으로 돌아갔을때 이것이 우리의 한계인가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2-3년의 적지 않은 시간을 돌고 돌며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아이들에 대한 문제를 찾기도 하였고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것들, 미래로 남겨둬야 하는 것들과 지금 당장해볼 수 있는 것들을 여과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그리고 올 해가 가기전에 우리는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이전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모든 건 은총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공전을 거듭하며 돌고 돌던 시간도 아니면 말고, 이 산이 아닌게벼 특유의 낙천성을 잃지 않았고 누구도 서로를 비난하지 않았고 왜 시간만 낭비했냐며 몰아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여건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했을때 열어갈 수 있는 최적화된 방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다양한 마음결들을 존중해주지 않았다면 느긋하게 기다려주고 서두르지 않고 인내하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길찾기를 하지 않았다면 결코 올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감사절을 맞이하며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은 일입니다.
공간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살림이 시작되다 보니 새로운 공간을 좋은 것으로 꾸며가고자 하는 다양한 결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정혜신 박사님 강의를 들었는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유하고 공감하고 활동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건물짓고 공간부터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직접 일을 해보니까 휴지 한타래(울면 닦을) 마실물 한병(말을 많이 하니까 목이 마르니까) 그리고 의자만 있으면 되더라는 겁니다. 한 인간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데는 결코 장소가 문제가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냉장고 없어도 살고 다른 것 다 불편해도 살 수 있지만 마음의 집들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는게 아니라 노파심에서 그러는거예요. 마음의 집들을 더 건강하고 예쁘게 지어가면 모든 건 다 은혜가운데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챙기고 마음 돌보고 마음을 가꾸는 일이 우선순위에서 0순위입니다. 사람 귀한 줄 알고 생명 귀한 줄 아는 세상에서는 채소를 먹으며 살아도 기쁘고 사는 것 같지만 사람 귀한 줄 모르고 생명 귀한 줄 모르고 사는 세상에서는 진수성찬에 기름진 고기만 먹어도 지옥인 거죠.
저도 마음의 집들을 잘 가꾸어가는데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기에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건 추수감사절이란 절기입니다. 사실 추수감사절은 농사절기에 따른 절기입니다. 더이상 도시인에게는 맞지 않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매달 월급을 받고 매달 수확을 합니다. 심지어는 매일 매일 수확을 하는 사람도 있고 매주 수확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땅에서 살지 않기에 하늘의 은총을 자연안에서 발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저는 텃밭을 지어보면서 땅을 보면 볼수록 땅이 하느님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은 땅에서 길러지고 땅에서 자라고 땅에서 결실되고 또 그 모든 것은 땅으로 돌아가서 또 다시 땅을 살려냅니다. 땅이 하느님입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입니다. 식물을 키우다보면 결코 나의 나된 노력만으로 생명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 겸손해지고 더 나눌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돈으로 그 모든 것을 사기 때문에 그 세계를 경험하질 못합니다. 삶의 촘촘한 은총들을 다 외주화했기 때문에 현대인은 은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습니다. 모든 은총을 돈으로 사야만 하고 그래서 또 돈을 벌어야하고 돈이 신이되어버렸고 돈이 은총이 되어버렸고 돈에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더욱 추수의 관점에서만 감사를 바라보면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과부와 같은 사람은 감사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 과부는 두 렙돈(하루품삯의 1/64)을 받쳤습니다. 본문의 이야기에 보면 자기가 가진 것 전부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종교지도자들에게 착취당합니다. 한 인간이
열심히 일을 하는데 하루 품삯의 1/64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 사회는 뭔가 불평등한 사회이고 그
사회는 이 여인의 정당한 삶의 권리를 착취하고 있는 사회인 거죠. 사회도 그런데 종교는 그여인의 그
남은 것 마져도 착취해 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탐욕에 눈이 어두운 종교권력과 그것에 가진 것
전부를 빼앗겨버리는 암울한 종교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을 보면 이런 성전은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난 주에 고시원에서 불이 났습니다. 말이 좋아 고시원이지 2평도 되지 않는 감옥입니다. 아내가 여름에 너무 더워 고시원에 들어갔었는데
침대하나에 책상하나 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자 사는 직장인들이래요. 그래서 낮에는 무척 조용하데요. 그리고 초저녁부터 코고는
소리만 들린데요. 어느곳에도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지
못했데요. 고시원이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주거 공간인 겁니다. 주거공간이 감옥이예요. 그 공간에는 사람도 없고 창문도 없고 음악도 없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갖추어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인생을 잘못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로 아침 일찍나가 저녁 늦게 들어와 잠만 잔답니다.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구조적으로 그들의 삶이 누군가에게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1년 열두달을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쥐어진 것이 없는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야 할까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방된 세상에서도 숨어지내야하고 이제는 빨갱이로 연좌제로 가족들까지 피해 받으며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댓가를 받지도 못하면서 평생을 쫒겨다니며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나요? 정혜신
박사님이 상담자중에 제일 힘들었던 이들이 고문피해자들이었데요. 민주화를 위해, 정직한 글을 위해, 시대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자기 삶을 지켰을
뿐인데 평생을 환청과 우울에 시달리며 자기 몸하나 가누지 못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나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평생 순종하며 살아왔는데 남은 보상이라는게 약과 우울증이라면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나요? 평생을 죽는 날까지 빼앗기고 착취당하고 유린당하고 살아왔던 이들은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나요?
이것이 추수감사절 절기를 준비하면서 이번 주 제 깊은
고민이었습니다.
추수로 열매로, 삶의
결실로 결과로 감사를 드려야 한다면 결코 감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겨울 나무를 봅니다. 옛날에는 겨울 나무를 보면 매우 쓸쓸하고 허무했었습니다. 그런데
텃밭에서 일을 하면서 겨울나무를 보면 그 겨울나무가 무척이나 거룩해 보입니다. 지난 주 공원을 한바퀴
돌았더니 낙엽들이 많이 떨어졌더군요. 하나 둘씩 떨구던 나뭇잎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주고 추운 겨울을
온몸으로 버티며 얼어붙은 대지위에 겨울 나무는 서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기에 앙상하고 헐벗고 초라하고 쓸쓸하게만
보여지지만 그가 있기에 봄이 있습니다. 그래서 겨울나무는 거룩합니다.
비록 초라하고 쓸쓸하게 보일지라도 아낌없이 다준 그가 없다면 결코 봄은 없습니다.
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 농사꾼들은 자기들의 등불이 자기들의 초라한 탁자를 비추는 줄로 생각하지만
팔십키로 밖에서도 우리는 그 빛을 보면서 길을 찾을 수 있지"
비행기 조종사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농부는 자기 삶을 밝히기 위해 오롯히 촛불을 들고 있지만 그렇게
그 자리를 지켜 살아온 그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길이 되고 힘이 되고 나침판이 된다는 겁니다.
한평생 나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던 그 존재 덩어리가 그랬기에 빼앗겼고 볼품없이 초라하게 보여지고 가진 것없이
비참한 모습일지라도 그들로 인해 삶에는 늘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비록 어렵고
힘들게 올한해를 살아왔을지라도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한 것처럼 외양간에 소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보여지지 않을지라도 무너지는 자기 자신과 싸우며 자기를 지켜왔던 시대와 역사를 지켜왔던 모든 거룩한 존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추수해서 놓고 감사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우리들의 존재를 놓고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여전히 가진 것 없을지라도 자기를 잃지 않고 소중하게 삶을 가꾸어왔던 존재로써의 아름다운 시간들이 있었기에 삶은 여전히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와 시대와 삶을 열어가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