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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의 꿈 혹은 일상이라는 환멸
김석준
일상은 늘 무료했고 답답했으며, 동일한 것의 반복들로 가득 차 있다. 울혈이 인다. 암담하다. 상상력은 고갈되었고 무기력했으며 나른하기까지 하다. 새롭고 신기한 것은 부재하고 꿈은 사라져 소멸한지 이미 오래다. 권태롭다. 아니 일상 내부엔 차라리 꿈이 부재하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역시 암울했으며 또 환멸의 세계상 밑으로 꿈이 소거된다. 물론 소소한 일상 내부를 내밀하게 바라다보면 그 일상이 곧 삶의 주름이자 흔적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겠지만, 삶은 늘 탈주를 꿈꾸고 새로운 세계로의 비약을 몽상하게 된다. 나비가 되기를 열망하면서 우화의 꿈만을 꾸고 비상하게 된다.
다시 추락한다. 추락은 필연이고 이 세계가 구성되는 치밀한 원리이다. 만약에 추락이 생을 떠받치고 증명하지 않는다면, 생도 없고 역사도 없다. 동일한 것의 반복이 인간학을 떠받치고 또 일상의 반복이라는 교묘한 원리가 생을 지속시키지 않는 한, 생은 언제나 환멸로 휘어져 반복 내부로 자신의 인간학적 태도를 소거시키게 된다. 이를테면 그 반복적인 일상이야말로 생이 응결되는 가장 첨예한 존재론적 태도라 하겠다. 일상이라는 반복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 생을 유혹하고 도발하게 된다. 반복은 도발이고 충동이고, 생을 자극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이다. 생을 생으로 기술하는 유일한 방법은 반복과 일상뿐이다. 물론 그 일상과 반복이 생 내부를 차폐로 가로막고 있는 한, 우리는 늘 침강하는 자로 평가된다. 현실과의 타협이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현실의 논리에 굴복하는 순간이 일상과 반복 내부에 비일비재하다.
그러다가 문득 일상의 반복이 환멸 가득하다는 사실을 느끼곤 소스라치게 놀라 일상으로부터 탈주가 시작된다. 송종규 시인의 신작시들은 일상이 빚어놓은 권태를 다양한 몽상의 전언으로 응결시켜 말과 세계 사이를 꿈으로 봉합하고 있다. 비록 그 봉합이 불완전하고 미봉책으로 비추어지지만, 시인의 그것은 신선했고 짜릿했으며, 가벼운 일탈을 도발하게 된다. 적벽의 능선을 바라다보다가 문득 상념에 젖는다. 시간이 멈춘다. 세계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또 인간의 세계가 아닌 곳으로 이입되었다는 착각이 일어난다. 환상이다. 세계의 이편에 환멸이 음습해있고,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또 다른 지대에 환상이 숨어 있어 있다. 꿈을 꾼다. 아니 우리는 늘 꿈을 꾸면서 새로운 세계로 비약하기를 열망하거나 스스로를 숭고한 곳에 위치시키게 된다.
송종규 시인의 신작시에 전개된 시말운동이 재미있고 흥미로운 점은 일상과 맞닿아 있는 경계면 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다양한 일탈의 태도들을 이접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때론 환멸이 펼쳐지는 일상이라는 공간적 지평을 몽상이나 환상으로 덧씌우기를 하면서, 때론 환멸 너머의 아름다운 이상향의 세계를 꿈꾸기도 하면서, 시인은 미지의 말―공간을 정초하고 있다 하겠다. 말하자면 송종규의 그것은 생이 지시할 수 없는 의미의 기호들을 말의 함수로 치환시켜 몽상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작시들이 언표한 시말의 정체성이다. 마치 나비 알레고리 속에 기입된 우화의 꿈 내부에 자신의 존재론적 정체성이 응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시인은 우화의 꿈과 일상적인 삶의 공간 사이사이를 아슬하게 종주하면서 생이 처한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考究하고 있다.
솔직히 볼품없고 징그러운 껍질을 세상에 남기지 않은 것은
내 우월감과, 공중과, 우유부단한 구름 때문이다
문제는 공중, 공중에는 또 수많은 공중이 있다 「녹색부전나비의 문제」일부
생은 환멸과 꿈 사이를 종주하는 단 일회의 진자운동이다. 우리는 나비에 관한 몽상을 통해서 아름다운 생에의 비약을 꿈꾸다가 “껍질”로 산화하는 그저 그런 존재이다. 우화羽化를 꿈꾸지만, 늘 생 앞에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가 산적해 있고 또 그로 인해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몽상하게 된다. 반복이 일렁이고 모든 것이 순환한다. 마치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색채의 마술이 죽음본능을 꼬드겨 절멸의 순간을 맞이하듯이, 생은 꿈의 이편과 저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종주하다가 문득 그것이 미망으로 휘어진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아름답고 가장 화려한 생에의 형식도, 변신을 열망했던 저 눈물겨운 고통의 시간도, 그저 하나의 “문제”로 남아 덫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나비 알레고리가 문제의 중심으로 위치하는 한, 인간학이란 하나의 가상이고 허망하기 그지없는 반복의 제의일 뿐이다.
송종규 시인의 시 「녹색부전나비의 문제」는 상승과 하강 사이를 인간학적 소망으로 응결시켜 노래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것은 운명의 그물에 걸린 존재론적인 함정에 관한 담론적 사유인지도 모른다. 시말이 “껍질”과 “날개” 사이를 힘겹게 교차하고 또 질주하는 한, 그것은 일종의 “최면”이다. “비상”에의 꿈 혹은 고귀한 신분 상승에의 열망. 시말은 이 양자 사이를 교묘하게 가로지르다가 화려한 빛깔로 채색한 “날개” 이미지에 인간학적 운명이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인에게 “녹색부전나비의 문제”는 존재론적 운명이 응결된 인간학적 사태다. 그것은 역으로 나비의 문제가 시인의 문제라는 말과 같다. 어떤 “우월감”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우월한 족속”이라는 여기면서, 송종규 시인은 일상이라는 반복의 덫으로부터 벗어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다.
갑자기 “겨드랑이” 밑에서 날개가 돋아나고 그로 인해 “삶의 방식”이 형질 변이를 일으킨다. 나비의 이편이 그저 진부한 일상이라면, 그것의 저편은 고귀함에의 열망이다. 비록 녹색부전나비의 문제 전체가 날개의 안과 밖 사이에 위치한 이질성으로 인해 빚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문제의 중심은 날개 그 자체가 아니라 날개에 채색된 화려한 색채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시인이 전개한 일련의 시말운동은 일종의 생에의 비약이 일어나는 극적인 순간을 역동적으로 그러내고 있다. 마치 천변만화경을 일으키는 “공중”이라는 공간적 지평을 다층적으로 겹쳐놓으면서, 시인은 인간학의 진면목을 나비 알레고리에 응고시키고 있다. 때론 저 일상의 권태로움에 무료함을 느끼면서, 때론 화려한 색채에 응고된 운명의 함수를 정관하면서, 송종규 시인은 생이 처한 운명을 우화의 꿈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이 새벽
난감한 것은 내 집의 침실까지 침입한 저들의 무례를 꾸짖을 도리가 없다는 것과 나비처럼 가여운 내 방을 누구에게도 호소할 길이 없다는 것, 세상은 온통 불통이라는 것, 무엇보다 나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다는 것
꼬박 밤을 새우고 아홉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불운했던 지난밤과 공동주거구역의 밥칙을 깨뜨린 몰염치를 전화기 저쪽으로 고발했다 「榜을 붙이다」일부
일상은 늘 혼동으로 가득 차있고,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환멸을 체험하게 된다. 시간은 소진되고 새로운 날은 밝아온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일상이 있고 일탈이 있다. “난감”했으며 또 “무례”함이 도를 넘어, 굳건히 닫힌 일상의 수레바퀴를 해체시키게 이른다. 생이 우화의 비상과 일상이라는 환멸 사이를 종주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난감한 것”에 직면하게 된다. 익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연속적으로 흐르는 일상 내부에 불연속적 간섭이 개입하고 삶의 흐름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굴절된다. 일상의 닫힌 폐쇄회로가 끊기고 또 짜릿함과 환멸이 동시에 생에의 특별한 감각을 촉발한다. 만약에 일상 내부에 휨 작용에 의한 전도된 순간이 부재하다면,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무덤 속 같은 고요로 추락하게 된다.
예기치 않는 타자의 목소리가 “늦은 잠”을 깨우고 삶의 흐름을 단속시킨다. 삶이 불연속적이고 단속적인 그 무엇으로 표상되지 않는다면, 인간학이란 것이 애초에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학의 역사는 비동일자의 표정이다. 만약에 일상적 삶이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면 “榜”을 붙일 이유도 없고 또 늘 권태와 무료함이 밀어닥칠 것이다. 정체가 모호한 소리가 “침실”로 파고든다. 소리의 침입으로 인해 어제와 오늘 사이에 경계가 생기고 도주선이 개입하게 된다. 송종규 시인의 시 「榜을 붙이다」가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심의 일상을 내밀하게 返照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은 그저 무기력한 반복이 아니다. 일상은 환멸이면서 생기발랄한 그 무엇이고, 생동하는 듯하다가 이내 절망으로 질적 변환이 일어나는 변곡점이다. 일상은 중층 결정되어 있다. 일상은 예기된 삶의 방식이자, 예기치 못한 도발이다. 일상은 “불한당”들의 겹침 현상이자, “법칙”이 공존하는 인륜적인 삶의 공간이다.
“시끌벅적하”지만 정교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 위를 종주하는 일상과 그 일상의 흐름을 깨트리는 침입 사이에 “온통 불통”인 “세상”이 있다. “고발”이 일어나고 다시 평정 상태에 이르는 순환주기가 삶의 내밀한 모습이고 또 이 세계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일상의 원리이다. 익명의 섬으로 도시의 공간을 살아가는 무기력한 일상인에게 어쩌면 환멸의 체험은 신선했고, 또 생을 다시 의욕하게 만드는 촉매제인지도 모른다. 시지포스의 신화가 그렇듯, 일상 내부를 동일한 것의 반복으로 가득 채우는 바로 그것이 환멸의 원인이자 실체이다. “안락”과 “불순한 음모” 사이에 도주선이 그어진 순간, 생은 일상 내부에 일탈을 기입하고 새로운 인간학적인 삶을 재개하게 된다. “지난밤의 혐의”가 짙은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응시하며 “천천히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나온다”. 다시 일상이 시작된다. 에너지가 충전되고 생이 안락으로 재차 휘어지기를 염원하면서 어젯밤의 혼란을 “생의 뒤쪽”으로 흘려보낸다. 우화의 꿈과 환멸의 일상 사이에 생의 오묘한 진법이 설계되어 있다.
온통 흰색과 푸른색의 공중에, 서서히 달빛 스며드는, 그 한 장의 풍경 아래
어떤 생에 대해 떠올리려다가 꿀꺽 삼키면, 아무런 의식도 없이 슬픔은 몸을 부풀려 최대의 질량으로 덮쳐온다
누군가 첨탑을 만들고 누군가 또 빗장을 열어놓고 갔다
누군가 돌아오지 않는다 「고요한 종이」일부
사실 생이 슬프고 아름다운 이유는 우화의 꿈과 환멸의 일상 사이에 미지의 공간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작용이고 의식이고 존재이다. 공간은 평면 위에 벡터값을 설정하여 새로운 의미를 입체적으로 설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종이”라는 공간의 부력이자 양력이다. 이차평면이 삼차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종이의 부력이 인간학적인 존재의 음영에 관한 탐구로 휘어져 있다면, 그것의 양력은 역사적 지평을 색인하고 창조하는 비약의 공간이다. 상상력이 개입하고 “고요” 내부에 인간학적 토포스를 개입시키면서 종이는 입체적인 공간으로 새롭게 정립되는데, 그것이 바로 시 「고요한 종이」의 정체라 하겠다. 송종규 시인에게 종이는 하나의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다. 말이 은거해있기도 하고, 또 새로운 공간의 조형술이 탑재되어 있는 미지의 공간적 지평이 바로 종이다.
고요했고, 침묵이 흐르며 또 환멸과 꿈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공간이 종이의 표상력을 의미하는 한, 종이는 “생”에의 공간이고, 생의 밑그림을 형성하는 풍경이다. 종이의 공간은 익명의 공간이다. “누군가”에 의해 발화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봉인되기도 하는 종이는 천변만화경을 겪는 일상의 삶이자 꿈의 가능태이다. 역으로 인간의 삶은 종이의 삶이자, 종이 속에 기입된 상상적 지평이 만든 구성력이다. 종이는 우화의 구성이고, 환멸의 현실이다. 종이는“태초 이전”이나 “태초”를 상징하는 원형적 질료의 공간이자 “슬픔”이나 “생”의 흔적들이 산종하고 파열하는 최초의 공간이다. 비록 종이의 공간적 지평 내부를 지배하는 벡터의 움직임이 “고요” 속에 이루어지기까지 하지만, 본성상 종이는 정중동의 미학을 구현되는 노자의 내밀한 공간이다. 행해지는 것이 없는 듯하지만 결코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는 공간이 바로 종이의 양력이자 부력이다.
송종규 시인에게 종이는 인드라망이자 天網이다. 인간학이 색인되고, 생에의 “옹이”가 매듭을 이루고 또 “절절한 마음”이 가두어진 곳이 바로 종이다. 생이, 의식이, 슬픔이 종이의 공간적 지평을 횡단하는 한, 그것은 “흰색”과 “푸른색” 사이를 활기차게 내달리는 “폭풍”이다. 시간이 흐른다. 공간이 탈색되고 또 빛은 “서서히” 공간의 뒷면으로 사라져 변색된다. 사라진다. 사라져 소멸하고 또 “누군가 돌아오지 않는다”. “한 장의 풍경”은 하나의 세계이자, 인간학적 태도가 중층 결정된 마성적인 공간이다. 그것은 역으로 “누군가”의 삶이 바로 종이를 통해서 표상된다는 말과 같다. 시인에게 종이는 태도이고 흔적인 동시에 생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이자 출입구이다. 마치 종이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 놓인 간극을 고요로 봉합하면서 시인은 종이의 단면도 내부에 삶의 흔적과 생에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부조시키고 있다. 종이의 이편이 안온한 우화의 꿈이라면, 그것이 저편에 환멸의 세계상이 인간학 전체를 옥죄고 있을지도 모른다.
숲의 캄캄한 안쪽
나는 빨간색 볼편을 들고 쫓아가 숲의 옆구리를 들추려다 말고 나는 남자를 문밖으로 밀어 내려다 말고 괘도를 이탈한 이 오랜 시간들을, 숨이 차도록 많은 미끄러운 문장들을, 받아적는다 꾸역꾸역 받아먹는다 앵무새와 의자와 동그란 스탠드와 함께 나도 공중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책장 속에는 앵무새가 살고 박물관 속 남자가 산다 「빨간색 볼펜」일부
꿈과 환멸은 동일한 세계상에 관한 전혀 다른 태도의 휨 작용이다. 전유가 일어나고 또 마술이 풀려 마법의 순간이 펼쳐진다. 우화의 꿈과 환멸의 일상 사이에 말이 존재하고 또 “빨간색 볼펜”이 마술을 일으켜 말과 세계 사이를 이접시킨다. “숲의 캄캄한 안쪽”을 경계로 꽃이 피고 시간이 흐른다. 송종규 시인의 시말운동은 비상을 열망하는 우화의 꿈과 일상의 환멸 사이를 환상의 매직펜으로 그려나가면서, 그 모든 것들을 말―공간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말이 씌어지고 “책”의 공간이 이 세계를 점령한다. 시간이 멈춘다. 말의 상궤가 무너지고, 시간 또한 또박또박 흐르지 않는다.
말의 공간이 매혹적이고 숭고한 것은 모든 것들을 휘어지게 만들고 상대화하기 때문이다. 아니 역으로 말은 그 자체로 마성적이고, 모든 것들 집어삼키는 블랙홀과 같은 욕망의 집적체이자, 마침내는 그 모든 것들을 생산의 구조로 환원시키는 화이트홀이기도 하다. 말은 우화의 껍질이고, 날개이다. 말은 세계의 접촉면이다. 말은 꿈이다. 말은 말해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휘어지게 만들어 말해질 수 있는 말로 말하게 되는데, 그것이 말의 본성이고 또 시 「빨간색 볼펜」의 정체라 하겠다. 공간의 이동이 일어나고, 차원 변이가 발생한다. 말의 숲은 말의 코라이자, 말의 쌩볼릭이다. 이를테면 송종규 시인의 그것은 쌩볼릭으로 존재하는 말의 질료를 세미오틱으로 의미 전환시키는 바로 그 지점을 응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로 빨간색 볼펜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그것의 존재론적 정체성이다. 빨간색 볼펜은 세미오틱 코라다. 송종규 시인의 시말은 말의 저장고에 잠재되어 있는 말들을 응결시켜, 하나의 서사구조를 짜 맞추어 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말의 날것들이 말의 축조술로 응결되는 그 순간을 포착한 것에 해당한다. 환상이 일어나고 구조가 구축된다. 마침내는 다양한 말들이 발화되어 시말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우화에 성공한 꿈의 시말이 날아다니고, 또 그 옆에 환멸의 세계상이 펼쳐진다. 분명 송종규 시인의 그것은 신선하고 예민했으며, 또 상상적 지평 내부에 예리한 감각의 촉수를 들이대 새로운 말―공간을 정초했음에 틀림없다. 새로운 시말이 탑재되고 또 말의 축조술이 진화하게 된다. 말들은 날아다니고 또 공간 이동이 일어나 말의 신기원에 당도하게 된다. 송종규 시인의 「빨간색 볼펜」이 재미있는 것은 다양한 서사들이 적층을 이루고 있는 문학의 공간과의 의미적 대화를 통해서 말―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빨간색 볼펜”이 가닿는 지점에 말이 있고 세계가 있고 궁극에는 문학의 공간이 존재한다.
시인에게 문학의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환상이다. 시간이 착종되고, 공간의 비약이 일어난다. 정상적이던 모든 “괘도”는 이탈되어 탈주를 감행하게 된다. 짜릿하다. “미끄러운 문장”들이 쏟아져 나오고 또 새로운 말들이 내뱉어진다. 세계는 말이다. 세계는 말과의 이접이나 연접의 방식으로 상호 소통하면서 꿈과 환멸 사이를 종주하게 된다. 환상에 일어나고 또 새처럼 공간의 날개가 돋는다. 양력이라는 꿈의 추진체가 부력을 일으켜 빨간색 볼펜을 떠다니게 만든다.
아파트 마당에 너덜해진 장갑이 버려져 있다
한 번도 획기적이지 않았던 그의 삶에 새긴 주름진 골짜기를
많은 날짜들이 짚어갔을 것이다, 검붉은 얼룩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적어 넣을 게 없는 당신에 관한 문제이고
이것은 기막힌 어떤 생의 실종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당신들과 덥석 악수하고 싶었지만 시커멓게 닳은 손톱 때문에
멈칫거리던 그의 손을
장갑은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불운했던 한 사람의 생애, 굳은 손바닥에 새겨진 깊은 금들을
장갑은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소요에서 수수꽃다리까지 가려면 며칠이나 걸리는지
자동차가 무심한 듯 그의 손금을 뭉개고 지나간다
햇살들이 내려와 손가락을 덮는다 봉분, 소복하게 솟아오른다 「장갑」전문
우화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반드시 환멸에 당도해 그것이 가상이었고 허상이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어차피 삶이 나비 알레고리와 같은 그 무엇으로 휘어져 인간학 전체를 혼돈으로 이끄는 한, 생은 이 세상에 들어온 목적을 정확하게 실천하지 못한다. 이미 예정되어 있고, 또 버려진다. 사라진다. 죽는다. 그것으로 끝이고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의미 아닌 곳에 당도하게 된다. 일상은 늘 추락의 연속이고 또 환멸은 필연이다. “실종”이 일어났으며 “삶에 새긴 주름진 골짜기”엔 시간의 지층들이 널브러져 있다. 시간은 파열되어 산산이 흩어졌고 “검붉은 얼룩”이 “많은 날들” 사이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다. 헤지고 너덜너덜했다. 암울했고, 환멸이 밀어닥쳤으며 마침내는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죽음의 지대에 당도하게 된다. 송종규 시인의 시 「장갑」은 생이 처한 운명적 사실을 버려진 “장갑”에 비유하면서, 어쩌면 이 세계가 환멸적인 일상으로 중층 결정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가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획기적이지 않”다. 그저 동일한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또 산적해 있다. “덥석”과 “아마” 사이에 장갑이 있고 “어떤 생의 실종에 관한 문제”가 잠재해 있는 한, 생은 그다지 특별난 것이 아니다. 우화의 꿈을 꾸는 생도, 환멸에 당도하는 삶도 그저 뭉개지고 망각의 강으로 사라져 버린다. 초지일관 무관심했고 소외되어 있었으며 또 “불운”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생에의 형식으로 이 세계를 통과해가고 있었을 뿐이다. 기억이 망각 사이를 헤집고 질주하고, 망각은 기억의 자장 밖으로 탈주하여 모든 것을 미망으로 가라앉힌다. 늘 승리하는 쪽은 추락이고 미망이고 죽음이다. 설령 송종규의 그것이 사라져 소멸하는 것에 관한 애절한 감정을 문면에 심어놓기는 했지만, 우리 모두는 익명화된 “당신”이거나 부정사 “어떤”이다. 우리는 객체로 산종되고 “어떤”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인칭이 아니라 비인칭이다. 우리는 “무심한”이다. 우리는 깊은 주림이 박힌 “굳은 손바닥”이다. 일상이라는 삶의 덫이 우화의 꿈을 차폐로 가로막고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닳은 손톱”이 되어 길 밖에 버려진다.
비록 인간학적인 꿈이 언제나 저 높은 곳으로 비상하기를 열망하지만, 생은 “어떤”으로 뭉개지고 망각으로 소진되어 절멸에 이르게 된다. 너무도 투명한 “햇살”이 삶―시간―세계를 반조하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시간의 선분 내부를 검은 색으로 덧칠하면서 생 내부를 익명화된 파편으로 조각조각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너덜너덜 헤지고 파열하여 꿈의 자리에 암울한 죽음본능이 스멀스멀 기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죽음이 실현되고 레테에 당도해 생이 미망이었음을 예증하고 있다.
김석준 출생 : 충남 아산
약력 : 1999년 시와시학(시), 2001년 시안(평론) <기침소리>(시집)
<비평의 예술적 지평>,<현대성과 시>,<감히 시인에게 말을 걸다>, <무덤 속의 시말><박찬일 시세계의 본질-상징에의 저항>(평론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