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0RIgtzYHIeI?si=Oe-LnRns6IUj2K5S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마태복음 5장 43절
오늘 본문에서 저의 마음이 가장 많이 머무는 문장은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새롭게 해석하시면서 십계명에서는 이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님은 전통에 메이지 않았습니다. 전통을 수용하시되 그 말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그 말의 본질적 의미에 충실하셨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상응보복법은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질서를 유지는 보다 나은 법이었지만 단절되지 않는 복수극이 난무하는 시대에는 더 이상 구원의 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복수보다는 소설 한강과 같은 인간의 한계와 아픔과 고통을 들여다 보아야하는 시대임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전통을 이해하된 그 본질적 사유를 멈추지 않는 예수님의 사유의 능력에 관심합니다.
일본 사회를 한나아렌트의 관점에서 해석한 “왜 지금 한나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은 어느 특정한 악한 개인이 저지른 게 아니라 주어진 명령을 아무 생각도, 의문도 없이 충실하게 수행한 평범한 사람들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었다. 아렌트는 당시 ‘악의 타겟’을 찾아 응징하고 자신들은 면죄부를 받으려는 사람들의 심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악은 특정한 사람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의문하지 않고 주어진 명령에 충실하게 살아간 사람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근대시민사회에서는 피곤해진 사람들이 다양한 문제를 뚝딱 해결해낼 대답을 턱하니 던져줄 영웅 같은 인물을 몹시 바라게 된다. 세계관 정당의 힘이 점점 불어나는 까닭은 든든하게 앞에서 끌어주는 ‘누군가’의 뒤를 졸졸 따라가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생각하는 주체’라는 자각적 존재를 내던지고 자기들 대신 생각해 줄 ‘지도자’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기 사고를 정지시키고 지도자에게 그 사고를 위임하는 삶의 방식이 악을 키워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찾아가는 주체적 사고의 힘은 내 영혼의 삶의 근원, 신앙의 근원으로 이끄는 힘입니다.
지난 주 어르신 한분을 찾아뵈었는데 80세가 넘으신 그 어르신이 저에게 질문을 하시더라구요. 목사님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것을 말씀드렸더니 저는 반대하고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바뀌어 가는 군요. 그리고 목사님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있네요. 하시더라구요. 80세가 넘으셔도 스스로 마을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이것저것을 배우시고 읽고 노력하시는 그 어르신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본 하루였습니다. 오늘 또 다른 사유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