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나무
정영선
두 개의 손들이 마주보며
밑둥을 만들고
가지를 뻗고
잎사귀로 핀 나무
닿으려고 다가가는
잎은 지지 마라
꽃대가 곧 나온다는 어느 꽃의 절규처럼
동쪽으로 떠났으나
영원히 동쪽에 닿지 못한 비행운처럼
몸은 없는
포개지지 못한 두 개의 밀랍 손들
저울을 내던지고
양 볼을 만지던
애무는 시들해지고
혼자로 남기 위해
두 뼘쯤의 거리로 밀어내는 손들
당김과 밀어냄 사이
허공은 팽팽하다
사하라가
모래 아래 바다를 가라앉힌 개벽만큼이나
세계의 끝에서 도착한
우여곡절을 겪은 손, 손들
사이로 시간은 층층 뻗고 있다
한 그루 나무는 밀어 올려지고 있다
무수한 손들 가운데
잃은 장갑이 짝을 찾듯
너는 내 잎사귀 손을 알아볼까
오우옥*
혀를 내둘러도 닿는 건 마른 바람
잎새들은 가시가 되고
몸속을 파고 들고
몸에 꽂힌 가시 하나, 둘, 셋....셀 수 없지요
찔린 몸이 꽃을 밀어 올릴 때
꽃 주머니에
소리 내지 못한 울음을 모았지요
딱딱한 정장 얼굴을 한 당신
울음이 발효한 향기를 맡아 보아요
포장마차에 앉아있어도
침묵 아래로 가라앉는군요
정답이 없는
말이 말을 복제한 힘센 말들 사이에서
말들에 포박 당한 채
혀를 뽑아요
생의 골목마다 포진한 어둠을
폭파시켜 드리지요
몸을 잠근 말
산산조각 날 때
보세요, 길 위에 당신을 홀로 세우던 길들 물러나고
그 위로 깔리는 저녁 멀어져요
오색의 꿈을 안감으로 댄 햇빛 한 벌 입고
힘 빼라구요
무너져 본 자가 쓰러진 자를 일으킬 수 있다구요
밤의 회로
낮은 앓는 밤을 모른다. 거듭 말하면 진부하다는 햇빛에 입을 다문다. 하얗게 기억을 지운 낮이 물러가면 힘세진 밤은 쥐를 불러들인다. 낮 동안 기억은 어디에 잠복해 있는 걸까? 검정 콩 눈을 뜨고 쥐가 나를 본다. 기억의 골목을 더듬고 쓰레기 봉지 뒤지는 소리에 고막이 터진다. 터진 봉지에서 스멀스멀 새어나오는 악취에 잠은 마비된다.
정리 끝낸 골목에서 시작이다. 바람의 의도였다 치자. 그 바람을 걷는 길 외에 길은 없었는가? 나는 뛰어 들었어야 했었어. 아니 그의 선택이야. 그는 내가 아니야. 안정된 길을 빨리 결정해 주었어야지. 끝난 거야. 골목이 다가온 거야. TV를 밤새 켜놓는다. 안팎 소리는 엎치락뒤치락한다.
봄마다 피는 꽃은 진부하지 않다. 하루 두 번 밀물 썰물 상투적이지 않다. 매번 물때 맞춰 빠져나가지 못한 아침 해변에 널린 조개 진부하지 않는데 붉게 피 흘리는 상처는 두 번 말하면 진부하다. 해변에 널린 햇살을 비닐에 담으면서 내가 나에게 두 번 말해도 상투적이다.
두 개의 항아리
은비늘 놓고
아가미 피 쏟고
터진 내장들 피떡 되었다고
상처 난 것들만이 빨리 삭는다며
뱃사람 둘이 그물 채 배 옆구리에다 쳐대던
멸치 이름 놓은 멸치들 쓸어담긴
항아리가 부둣가에 하나
입술 터진 자리 또 터져
뺨 맞은 자리 또 맞고
잠을 빼앗겨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는 적을 격리 못해
말을 금지시키고
동그라미 그어 나를 보관한
항아리가 그 옆에 또 하나
항아리 밖에서는
목련 피고
은행알들 발밑에서 터질 때
쓰라린 곳은 더 쓰라리도록 천일염이 듬뿍
하나로 절절 발효되는
고요한 항아리 옆에
상처를 움킨
삭지 못해
너는 아직도 너냐
너무 많은 나들로 웅웅대는
시끄러운 항아리가 또 하나
K와 k
여교수 K는 오래 전 은퇴했다. 남편은 먼저 갔고 아이는 없다. 혼자만의 벙크에 산다. 그녀는 살구들을 노랗게 익히는 여름 햇빛을 기피한다. 잎을 흔드는 바람의 발랄함을 외면한다. 공황 장애가 도질 때면 밖에 누군가가 있다고 잠근 문을 또 잠근다.
교회에서 K는 k를 만났다. 눈이 작고 체구가 작은 k는 K의 벙크에 입주했다. 미화원을 그만두고 K의 밥상을 차리고 외출 때는 K 곁에 묵묵히 서는 그림자가 되었다. 개 목욕과 산책을 시켰다. 잘 닦인 계단처럼 K는 윤이 났다. k는 주말에도 집에 가지 않았다.
K가 신경성 기침으로 입원했을 때 매일 K에게 개를 보이러 데리고 다녔다. 늙은 개도 k더러 안으라고 했다. 착함은 더 착해지라 했다
k가 쓰러졌을 때 골목은 잠잠했다. 행려병자로 보인 k는 병원에서 병원으로 옮기는 길에서 숨을 거두었다. K의 통장을 안은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k는 그림자를 거둬 갔고 K는 벙커에 남겨졌다. 익은 살구가 쩍 갈라지면서 나무를 떠나는 걸 오래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신경성 기침이 멎었다. 늙은 개마저 며칠을 앓다 죽은 날 순서가 바뀐, 죽음 대기자는 양로원이 적격이라고 내게 전화를 해왔다.
----정영선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