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스님은|1916년 중국에서 태어나
수년 동안 오대산에서 폐관 수행을 통해 큰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시절 인연이 도래하자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을 교화하셨습니다.
특히 생생한 인과법문을 통해 업장을 소멸함으로써 치유시키는 신이한 힘을 가지셨습니다.
말년에는 은둔 수행을 하시다가 2004년 87세로 입적하십니다.
스님이 알려진 것은 중국에서 발간된 [현대인과실록]을 통해서 였으며
우리나라에는 2006년 [오대산노스님의 인과이야기]로 소개되었습니다.
스님의 가르침의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은 단지 나쁜 짓을 할 줄만 알지 참회할 줄은 모르며,
단지 복을 구할 줄만 알지 복을 자기의 분수에 맞게 쓰려고 하지 않네.
염불 일성이 무량한복을 증진시키며,
예불 일배가 강가의 모래알같이 많은 죄를 없애는 줄을 전혀 모르네.“
“예불은 부처님의 덕을 경배하는 것이며,
염불은 부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며,
간경은 경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며,
좌선은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은 부처님의 도를 증득하는 것이다.“
노스님은 또한 불자들에게 능엄경을 숙독할 것을 권하였는데,
능엄경을 보면 법안을 갖출 수 있으며
또한 「대불정수능엄경』은 지혜를 여는 경으로서 이 경을 이해하면,
더욱이 그 중의 '사종청정명해‘와 ‘오십 가지의 음마'
이 두 부분의 내용을 이해하면 자기의 수행수준을 찾을 수 있으며,
정법에 부합한지 여부를 비춰볼 수 있는 표준이라고 일러주십니다.
또한 불자라면
반야심경 「지장보살본원경」, 「육조단경』과
『양황보참과 같은 책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일러주십니다.
많은 불자들의 병을 치유해주시면 한결같이 그 사람에 맞는 경전을
수지독송할 것을 일러주셨습니다.
대덕 고승의 저작을 따라서 경서를 많이 읽으면
지혜가 증장된다고 하시면서
"경장에 깊이 들어가면 지혜가 바다와 같이 깊다.
많이 보면 자기의 지혜를 계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에게 법을 설하시기 전에 인과율(因果律)은 대자연에 적용되고 있었으며,
단지 우리들 범부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고해(苦海)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며,
이러한 고해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부처님의 경서를 통해
가르침대로 살아나갈 것을 누누이 일러주십니다.
스님의 게송입니다.
“눈 밝은 스님은 찾기 어려우나
경 속에서는 찾을 수 있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할까.
재가불자로서 네 가지 중계를 엄히 지키고
육도만행을 몸소 행하니
자비희사는 보살이며
모든 행에 머묾이 없음이 선(禪)이네.
청정한 아미타불이 마음 가운데 앉았으니
희로애락이 모두 범음(梵音)이네.
중생을 널리 교화하면 백의(白衣)를 입은 것이며
자기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면
불신(佛身)을 증득하리라.“
한번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오십여세 된 여인이 스님을 찾아와 병을 앓게 된 이유를 묻자
스님은 그녀에게 살생의 업이 중하여 그 병을 얻게 된 것이라고 일러주시자
그녀는 어릴 때 부터 담이 작아 조그만 벌레 하나도 죽이지 못한다고 하면서 어찌된 일이냐고 반문하자
스님은 ‘자주 바닷가에 가서 살아있는 바다 게를 먹지는 않는지’ 되물었고
그녀는 놀라 그녀의 딸이 일본에 파견되어가 생활한지 몇 년이 되어
매년 일본에 가서 한달 정도 살다가 오곤 했는데
딸은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매주 차를 몰고 바닷가에 가서 그녀에게 바다 회를 사주었다고 하며
하지만 종업원이 들고 온 바다고기들은 모두 익힌 것이고 자기가 죽인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자
스님은 이들 바다 게는 손님이 먹으려고 주문하기 때문에 비로소 주방장에 의하여 솥에 삶아져 죽게 된 것이니
그 죽은 동물은 손님을 기억하려 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마음속에 의혹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채신 스님은
’어떤 사람이 많은 생명을 죽였고 심지어 살생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어도 그는 현재 여전히 건강하며,
어떤 사람은 단지 한번 어떤 동물을 죽이고 한번 고기를 먹었을 뿐인데도 병에 걸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개개인이 전생과 금생에서 누적된 업력과 복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하시며
마치 어떤 사람은 매일 한 병의 술을 마셔도 단기간 내에 그는 아무런 병에 걸리지 않는 반면
어떤 사람은 한잔의 백주도 마시지 못하며 마시면 곧 취하는 것처럼
이는 각자의 주량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기호가 사람에게 초래하는 해로움은 단지 빠르고 늦을 뿐이라며
구복(口腹)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함부로 동물을 잡아 기름 솥에 넣는 등 온갖 방법으로 요리하여
이런 비린내 나는 ‘맛있는 요리’가 비록 게걸스러운 식욕을 채우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한의 화근을 초래하는 것이라며 ‘병은 입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병에 대한 스님의 말씀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하네.
모든 유정의 중생은 자기 생명을 아끼니 그 삶을 보호해 주어야 하네.
무슨 고기를 먹어 보신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
남을 해쳐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은 단지 일시적으로는 즐겁지만
마침내는 결국 자기를 해치는 것과 같아 이후 배로 갚아야 하네.“
부처님을 믿고 채식하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함일 뿐 아니라
더욱 우주 인생의 대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설해 주십니다.
또한 불교를 배우는 사람은 대중과 화순(和順)할 줄 알아야 한다며
이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습관, 선택, 신앙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며
심지어 자기 자녀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일러주십니다.
사람들은 자식들이 불교를 믿고 채식을 하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기회를 보아 가르침을 주어야 하며,
급하게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바라는 바와는 정반대로 되어,
그들이 불교에 대하여 모순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제도하는 데는 시기와 방법을 중시해야 하며
말로 가르치는 것 외에 몸소 실천하며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혜로운 말씀을 일러주십니다.
많은 재가 불자들을 불법으로 이끈 스님의 일화 중 하나를 더 소개하자면
대만대학교 교수로 있는 교수부부가 오대산에 와서 노스님을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어릴 때부터 눈병으로 고생하던 여교수는 스님에게 그 이유가 궁금해 여쭈자
스님은 그들의 과거 금산사의 수몰인연을 얘기해 주십니다.
수행을 하던 백사와 청사가 있었는데 당시 법해노스님의 권고를 듣지않고
오히려 그와 대결하여
수신을 충동질해서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를 일으켜 금산사를 수몰시켰는데
절을 수호하던 호법천신이 번개로 수신을 때렸고 불덩어리로 수신을 치려는 순간
재빠르게 물속으로 피해 목숨은 건졌으나 두 눈이 번개에 손상을 입어
수신의 부하들이 급히 비단으로 눈을 감싸 다른 절의 스님에게 도움을 청해
그 절 스님이 치료해주었는데 수신의 미모에 반한 스님이
그동안의 공부를 잊고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
금생에도 부부의 인연으로 오게 된 내력을 상세히 말씀해 주시며
그때 본의는 아니었지만 부지불식간에 나쁜 무리를 도와
금산사를 수몰시킨 죄가 크므로 법당에 가서 숙세의 업을 참회할 것과
늘 양황보참으로 참회하며 항상 지장보살본원경을 독송하면
눈병이 좋아질 것이라고 일러주시고
그 남편에게는 매번 과거 생에서 근기가 좋은 노 수행자였으나
음심을 놓지 못해 깨달음을 눈앞에 두고 막판에 실수로 그르쳤음을 상기시키며
금생에는 더욱 함께 발심하여 이 생에서 반드시 계정혜를 닦아
무상보리를 증득할 것을 일러주십니다.
스님은 또한 노인이 되면 항상 '세 가지를 좋다' 말해야 한다며 아래와 같이 당부하십니다.
이는 사실 노인에게 뿐 아니라
자식들을 키우는 부모들에게 주는 뛰어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첫째, 항상 자녀가 좋다고 말해야 하며,
좋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둘째, 항상 생활이 좋다고 말해야 하며, 좋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셋째, 항상 친척, 친구가 좋다고 말해야 하며, 좋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야합니다.
이상 세 가지를 항상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입에 달고 있어야 합니다.
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다고 합니다.
자녀 또는 친척, 친구, 이웃을 막론하고 설령 이전에 잘지내던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당신은 언제나 그들의 나쁜 점을 숨기고 좋은 것을 드러내며,
덕으로 원수를 갚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도 뉘우치게 되고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항상 '세 가지 좋다'를 말하면 반드시 모두의 존중과 추대를 받게 될 것이며,
당신의 생활은 갈수록 좋아지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다른 사람이 자기를 존중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곳곳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다른 사람의 그릇된 점을 들추어내면
일은 자기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됩니다.
자녀, 친척, 친구들과 틈이 벌어지게 되고,
생활도 끊임없이 마찰을 빚게 되면서
사람마다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계는 마음을 따라 바뀐다'는 이치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바뀌면 당신 집의 분위기, 환경도 바뀔 것이며,
나쁜 기운이 화하여 상서로운 기운으로,
번뇌는 보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만법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입니다.
한가할 때는 경전을 많이 읽고 자기의 지혜를 증장시켜야 합니다.
평소 밖으로 나갈 때 산책을 하거나 차를 운전할 때
쓸데없는 말은 적게 하고,
'불보살님의 명호를 항상 마음속에서 올라오도록
이근(耳根)을 충만시켜야 할것입니다.
성불을 하려면 먼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 자비희사(慈悲喜捨)하시며,
대각자이시며, 무상의 지혜와 신통을 갖추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에게 화를 내어 질책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설하는 법은 당신으로 하여금 이치를 밝히게 하는 것입니다.
단지 청정심을 가지기만 하면 부처님의 가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재물로써 사원에 보시하면 사원은 금을 쌓고 은을 쌓는 궁전과 같아서
수행자의 청정한 범행을 오염시킬 것입니다.
만약 재물로써 공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덕행으로 사원을 호지하면
사원은 비로소 진정으로 만덕이 장엄한 도량이 될 것이며
시방 중생을 널리 제도하게 될 것입니다.
경을 독송할 때 많이 하고 빨리 하는 것을 탐하지 말아야 하며,
독경시 마음과 입과 눈이 서로 관조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절대로 혼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일자일구를 독송하면 천자, 천구를 독송하는 것과 같으며,
한 부의 경을 독송하는 것이 만 부의 경을 독송하는 것과 같아.
법계중생 모두 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통력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
“무엇을 신통이라 하는가?
소위 말하기를 "묘한 작용 헤아리기 어려움을 신(神)이라 하며,
무애 자재함을 통(通)이라 한다."고 합니다.
헤아릴 수 없고 장애가 없는 사람은 자재한 힘을 쓸 수 있으니 천변만화(千變萬化)하며,
이는 보통사람 [범인)이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계입니다.
신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소승인은 사제법을 닦고 십이인연법을 관하여
원만한 경계에 도달하면 신통을 얻게 됩니다.
대승인은 육도만행을 닦고 참선·좌선하며 지관을 수습하고
보살도를 행하여 원만한 경계에 도달하면 곧 신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한의 신통은 일정한 한계가 있어 단지 삼천대천세계 이내의 사물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팔만 대겁이내의 인연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을 내어 관찰해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살의 신통은 한량이 없으며 미진 속의 세계,
세계 속의 미진, 무량세계의 부처님을 볼 수 있으며,
무량세계 제불의 묘법을 설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무량세계 가운데의 중생과 일체의 심념을 알 수 있으며,
팔만대겁 밖의 인연도 알 수 있으며,
또한 정 중에서 관찰할 필요 없이 한번 생각하면 곧 알 수 있습니다.
보살은 보살도를 행하여 공덕이 원만하기 때문에
이러한 갖가지의 신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만약 보살심을 발하여 보살도를 행하면
여러 가지의 신통을 얻을 수 있고,
단지 수행하여 원만하게 되면 구하지 많아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가르침에 따라 봉행하고 법에 의거하여 수행하며
계율을 엄수하고 실행하면 이것이 바로 정법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삿된 법입니다.
무릇 계율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며,
계율에 부합하면 힘써 행하는 것이야말로 보살이 가야 할 길입니다.
왜 사람들은 신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신통을 비판하는 자는 다른 속셈이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정법을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하며,
같은 무리보다 뛰어난 불교도의 존재를 부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근 지혜가 없는 몇몇 불교도는 도처에서 말법시대에는 신통을 드러내면 안 되며,
신통의 가능성조차 없다고 하는데 왜 그런 선전을 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어리석기 때문에 힘써 수행하기는 싫고
자기보다 도 가 높은 사람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말법 시대에는 진심으로 수도하는 사람이 필요하며,
깨달은 사람이 필요하며, 과(果)를 증득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과를 증득한 후 다시 머리를 돌려 인연 있는 친구를 끌어들여 삼계를 벗어나게 하고,
상적광정토에 가게 하는 것이 내가 여러분에 대한 기대이며 희망입니다.
이처럼 도를 크게 깨달으신 뒤
시절인연에 따라 수많은 불자들을 만나 그들의 병을 치료해주시며
부처님의 바른 법으로 이끌어 주셨던 묘법스님은
우리곁에 가까이 오셨던 큰 선지식이자 불보살님의 화신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위 내용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올려봅니다)
https://youtu.be/JkeBlTcuj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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